청량산 최고의 전망대인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사. 경북 오지인 봉화에 숨어 있어도 발품을 팔아 찾아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청량산(淸凉山·870m)은 경북 최북단 봉화의 오지에 숨은 명산이다. 평범한 외형과 달리 품속으로 직접 들어서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집채만한 절경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이어진다. 단풍이 절정인 요즘엔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바위산의 전형인 월출산이나 월악산에 비해 덩치는 비할 바 못 되지만 수많은 암봉들이 몸을 비벼대며 서 있는 자태는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인상적이다. 또 암봉 사이로 층층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늘푸른 소나무와 울긋불긋한 단풍의 오묘한 조화는 조물주가 의도를 갖고 빚어도 이토록 아름답게는 못하리라.

 만추의 단풍으로 특히 유명한 청량산은 산꾼들에게 흔히 ‘육육봉’으로 불린다. 주봉인 장인봉(의상봉)을 비롯 경일봉 금탑봉 선학봉 연화봉 자소봉 탁필봉 축융봉 등 큰 봉우리가 모두 12개이기 때문이다. 육육봉 외에 청량산에는 김생굴 등 4개의 굴과 어풍대 원효대 등 전망대나 수도처로 사용된 12개의 대(臺) 그리고 총명수 등 4개의 샘터가 유명하다.

 산행 도중 시야에 들어오는 백두대간 연봉들과 태백에서 발원한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의 굽이치는 물줄기도 자뭇 감동적이다.

 산행은 매표소~입석~응진전~총명수~어풍대~산꾼의 집~청량정사~청량사~청량정사~산꾼의 집~김생굴~경일봉~자소봉(보살봉)~탁필봉~뒤실고개~정상(의상봉)~두들마(민가)~폭포슈퍼~매표소 순. 청량산 산행의 백미인 청량사를 코스에 넣기 위해 일부 지점이 겹쳐 산행시간은 6시간 정도로 길다. 하지만 산행 도중 체력이 부칠 경우 청량사로 향하는 탈출로가 곳곳에 열려 있어 큰 부담은 없다. 



 매표소에서 20분 정도 걸으면 삼거리. 가파른 왼쪽 포장로는 바로 청량사 가는 길, 산행팀은 직진한다. 10분 뒤 만나는 3m 높이의 검은 입석 맞은편이 들머리다. 입구에 등산안내도와 ‘청량사, 응진전'이라 적힌 이정표가 보인다.

울퉁불퉁한 돌길로 오른다.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와 굴참, 생강나무가 반기고 우측에는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이어진다. 300m쯤 가면 갈림길. 왼쪽은 청량사, 산행팀은 오른쪽 응진전 방향으로 간다. 통나무 계단길로 15분 오르면 외청량사라 불리는 응진전. 응진전 뒤 기암괴석이 금탑봉이고, 전방에도 깎아지른 절벽이다. 의상 대사가 창건한 기도 도량인 응진전은 공민왕을 따라 피난 온 노국공주가 16나한상을 모시고 기도했던 곳. 금탑봉 꼭대기에는 바람불면 흔들린다는 동풍석(動風石)이 위태롭게 놓여 있지만 절대 떨어지지 않는단다.

응진전을 지나 산모롱이를 돌면 신라의 대학자 최치원이 마시고 정신이 맑아졌다는 총명수(聰明水)가 있고, 이어 청량산 최고의 전망대인 어풍대가 기다린다. 수십 길 낭떠러지인 어풍대에 서면 청량사를 가운데 두고 왼쪽에서부터 연화봉 자란봉 뒤실고개 탁필봉 자송봉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우측 낭떠러지에는 형형색색의 단풍나무가 위아래로 각각 걸려 있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산꾼의 집에서 청량사로 내려가는 나무계단. 주변 경치가 무척 아름답다.

청량사에서 바라본 축융봉. 운치있는 소나무 아래 너른터에선 매년 가을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청량사 본전인 유리보전에 모셔진 약사여래불은 전통 닥종이로 만든 지불(紙佛)을 도금한 것이다.
신라의 명필 김생이 글공부를 했다고 전해오는 김생굴.

이어지는 산길. 4분 뒤 갈림길. ‘산꾼의 집'과 ‘청량정사(淸凉精舍)'를 잇따라 지나 청량사로 향한다. 본전 격인 그 유명한 유리보전(琉璃寶殿)을 둘러보고 왔던 길로 되돌아 나온다. 이어 신라의 명필 김생이 글공부를 했다는 김생굴을 본 뒤 경일봉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보살봉으로도 불리는 자소봉.


이때부터 본격 산행이 시작된다. 10분쯤 오르면 주능선에 닿고 20분이면 경일봉(750m)에 선다. 지금부턴 청량사를 중심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돈다. 오름길과 내리막을 두 세 번 반복하고, 철계단과 집채만한 기암괴석을 넘고 에돌면 자소봉(840m). 50분 소요. 30m쯤 돼 보이는 수직 절벽이라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조망이 끝내준다. 정상석을 바라보고 정면 동쪽엔 일월산, 북으로 소백산 방면 백두대간, 남으로 축융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청량사 주봉인 의상봉을 향해 오르는 계단길. 

철계단으로 내려와 우측 우회길로 6분 정도 가면 탁필봉(820m). 정상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길섶에 정상석이 서 있다. 여기서 8분 뒤 연적봉. 정상석이 없다. 다시 급경사 철계단을 내려서면 뒤실고개. 체력이 부칠 경우 대개 여기서 청량사로 하산한다.
뒤실고개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수직절벽. 왼쪽으로 크게 에돌면 다시 큰 봉우리가 버티고 있어 한 번 더 암봉을 우회한다. 이번엔 바위와 바위 사이로 난 좁은 급경사길로 오르면 안부에 닿는다. 여기서 한 번 더 내리막과 오름길을 반복하면 청량산 최고봉인 의상봉(870m)에 선다. 주변 숲에 막혀 조망은 썩 좋지 않다. 서쪽인 왼쪽으로 100m쯤 가면 난간이 설치돼 있는 전망대가 있다. 붉은 저녁 노을 아래 굽이쳐 흐르는 영남의 젖줄 낙동강의 풍경이 무척 아름답다.
의상봉에서 약간 떨어진 전망대에서 바라본 노을 속의 낙동강이 그림같이 아름답다.

하산은 전망대에서 왼쪽으로 내려선다. 급경사길이다. 민가인 두들마까진 전망대에서 30분쯤 걸리고, 두들마에서 포장로를 따라 청량폭포 앞 폭포슈퍼까지는 10분이면 충분하다.

# 떠나기전에 

청량산은 경북 봉화군과 안동시의 경계에 낙동강을 끼고 솟아 있다. 맑아서 눈이 부실 것 같은 청량산은 12연봉을 두고 있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가’에 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탁립봉 금탑봉 축융봉을 청량산 육육봉으로 노래하여 애찬했다.

그리고 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 의상대는 청량산의 12대(臺)이며, 김생굴 금강굴 원효굴 치원굴 등 4굴에서는 당대 선각자들이 수도를 했다. 김생은 김생굴에서 9년을 서도에 전념하여 스스로를 명필이라 여기며 하산을 준비했다. 이때 9년 동안 길쌈을 했다는 여인이 나타나 솜씨를 겨루어 보자고 말하자 컴컴한 어둠속에서 솜씨를 겨뤄본 결과는 참패였다.다.

이때 김생은 자신의 솜씨가 그 여인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1년을 더 수학한 뒤 하산을 했다고 한다.

청량산은 고려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청량산으로 들어온 공민왕의 흔적이 남아있다. 산성을 쌓을 때 다섯 마리의 말이 수월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인 오마대와 군율을 어긴 군졸을 절벽에서 밀어 처형했다는 밀성대 등이 그것.  

# 교통편 - 안동행 시외버스 하루 5차례 운행

노포동종합터미널에서 안동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 9시 등 1일 5회 출발한다. 1만2천3백원. 3시간 걸린다. 안동시외버스터미널에서 청량산행 버스는 오전 5시50분, 8시50분, 10시, 11시50분에 출발한다. 1천5백40원. 청량산에서 안동행 버스는 오후 4시20분, 6시50분(막차)에 있다.

안동에서 부산행 시외버스는 오후 4시35분, 7시25분(막차)에 있다. 막차를 놓쳤다면 동대구로 가서 부산행 기차를 탄다. 안동에서 동대구행 버스는 2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막차 시간은 오후 9시20분.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남해고속도로~구마고속도로(대구 칠서 방향)~화원IC~서대구IC~(혹은 경부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서안동IC~34번 국도~35번 국도~청량산 도립공원 순으로 가면 된다.

# 청량산에서 이 사람 모르면 간첩-산꾼의 집 초막 이대실 씨.

"약차 한 잔 들고 쉬었다 가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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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봉화 청량산을 좀 안다는 사람이 ‘산꾼의 집'을 모르면 거짓말이고, 청량산을 산행한 사람이 ‘산꾼의 집'에서 약차 한 잔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 날 산행은 헛한 것이다. 바로 청량사 인근 ‘산꾼의 집'에서 2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등산객들에게 약차와 쉼터를 제공한 초막(草幕) 이대실(65) 씨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씨가 등산객들에게 공양을 하는 차는 구정차. 당귀 산수유 진피 오가피 계피 감초 등 9가지 약재가 들어간다. 단풍철의 경우 평일에는 2000잔, 주말에는 4000잔, 최고 절정기에는 1만 잔까지도 대접했단다.

‘산꾼의 집'은 청량사에서 응진전 가는 길에 있다. 걸어서 5분. 바로 옆이 오산당이다. 언제부터인가 청량산 도립공원에서 ‘산꾼의 집'이란 이정표를 달아줄 정도로 유명인사로 대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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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독특한 산꾼의 집 화장실 문(왼쪽)과 청량사에서 바라본 축융봉. 운치있는 소나무 아래 너른 터에선 매년 가을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이 씨가 청량산과 인연을 맺은 건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원효대사와 관련된 책을 읽었어요. 근데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를 원효대사가 창건했대요. 그래서 무작정 이곳을 찾았어요."
당시 청량사는 불당과 요사채만 달랑 있었고, 노비구니가 홀로 지키고 있더란다. 그냥 이유없이 청량사가 맘에 들어 그 비구니에게 “머리를 깎아달라"고 했다가 크게 호통만 듣고 발길을 돌렸다.

“그때 결심했지요. 비록 지금은 이렇게 떠나지만 언젠가는 이곳에서 살거라고."
고교 졸업 후 연극영화과를 다닌 그는 영화한다고 아버지 몰래 과수원을 팔아 영화를 제작했지만 투자비만 날렸다.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을 한 그는 경북 영양에서 사진관 조수로 취직,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이후 돈을 제법 모아 사진관에 이어 예식장도 인수했다.

산에도 열심히 다녀 전국의 산 2000곳을 오르내렸다. 해외원정도 다녀왔다. 이후 봉화 안동 영양 등을 아우르는 대한산악연맹 경북북부지역연맹을 만들었다. 그래도 뭔가 허전했다. 먹고 살만 하니까 다시 청량산이 생각난 것이다. 지난 91년 아내와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아내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아내는 고맙게도 날 이해해줘 붙잡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에게 평생 모아 이룩한 예식장 웨딩숍 미용실 뷔페를 각각 물려주고 맨 몸으로 이곳 청량산으로 들어와 줄곧 혼자 지내고 있다. 항상 머리엔 뚜껑없는 벙거지를 쓰고 개량한복을 입은 그를 두고 혹자들은 ‘이 시대의 기인'이라 부른다.

소리꾼이자 도공 산악인 시인 서예인이며 대금 가야금을 연주하고 장승도 깎는다. ‘산꾼의 집'에서 들려오는 대금 및 가야금 산조는 그가 연주한 곡이며 이곳에 전시된 도자기와 글씨 그림 시는 모두 그의 작품이다. 4년 전 대한민국종합미술대전 선서화 부문에선 대상을 받았으며 각종 소리마당이나 지자체 축제에 단골 게스트로 초청받는다. 청송교도소 정신교육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15년간 청량산에서 무려 100여 명의 목숨을 구해낸 전문 산악인이기도 하다. 6년전엔 200m 절벽에 메달린 초등학생을 119구조대원도 몸을 사리는 가운데 과감히 몸을 던져 구해내기도 했다.
그는 “산은 나를 물속에 달처럼 살다 가라한다"며 모든 것을 초연한 듯 말하면서도 "딴 그리움은 접을 수 있어도 손주에 대한 그리움은 접을 수가 없다"며 인간적인 고뇌도 비쳤다.

글·사진 = 이흥곤기자 hung@kookje.co.kr
문의 = 국제신문 산행팀 (051)500-5168
이창우 산행대장
 




 

 

산꾼의 집 초막 이대실 씨.

"약차 한 잔 들고 쉬었다 가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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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봉화 청량산을 좀 안다는 사람이 ‘산꾼의 집'을 모르면 거짓말이고, 청량산을 산행한 사람이 ‘산꾼의 집'에서 약차 한 잔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 날 산행은 헛한 것이다. 바로 청량사 인근 ‘산꾼의 집'에서 2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등산객들에게 약차와 쉼터를 제공한 초막(草幕) 이대실(65) 씨를 두고 한 말이다.

이 씨가 등산객들에게 공양을 하는 차는 구정차. 당귀 산수유 진피 오가피 계피 감초 등 9가지 약재가 들어간다. 단풍철의 경우 평일에는 2000잔, 주말에는 4000잔, 최고 절정기에는 1만 잔까지도 대접했단다.

‘산꾼의 집'은 청량사에서 응진전 가는 길에 있다. 걸어서 5분. 바로 옆이 오산당이다. 언제부터인가 청량산 도립공원에서 ‘산꾼의 집'이란 이정표를 달아줄 정도로 유명인사로 대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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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독특한 산꾼의 집 화장실 문(왼쪽)과 청량사에서 바라본 축융봉. 운치있는 소나무 아래 너른 터에선 매년 가을 산사음악회가 열린다.


이 씨가 청량산과 인연을 맺은 건 중학교 3학년 때. “우연히 원효대사와 관련된 책을 읽었어요. 근데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를 원효대사가 창건했대요. 그래서 무작정 이곳을 찾았어요."
당시 청량사는 불당과 요사채만 달랑 있었고, 노비구니가 홀로 지키고 있더란다. 그냥 이유없이 청량사가 맘에 들어 그 비구니에게 “머리를 깎아달라"고 했다가 크게 호통만 듣고 발길을 돌렸다.

“그때 결심했지요. 비록 지금은 이렇게 떠나지만 언젠가는 이곳에서 살거라고."
고교 졸업 후 연극영화과를 다닌 그는 영화한다고 아버지 몰래 과수원을 팔아 영화를 제작했지만 투자비만 날렸다. 고향으로 돌아와 결혼을 한 그는 경북 영양에서 사진관 조수로 취직,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이후 돈을 제법 모아 사진관에 이어 예식장도 인수했다.

산에도 열심히 다녀 전국의 산 2000곳을 오르내렸다. 해외원정도 다녀왔다. 이후 봉화 안동 영양 등을 아우르는 대한산악연맹 경북북부지역연맹을 만들었다. 그래도 뭔가 허전했다. 먹고 살만 하니까 다시 청량산이 생각난 것이다. 지난 91년 아내와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아내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다. 아내는 고맙게도 날 이해해줘 붙잡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에게 평생 모아 이룩한 예식장 웨딩숍 미용실 뷔페를 각각 물려주고 맨 몸으로 이곳 청량산으로 들어와 줄곧 혼자 지내고 있다. 항상 머리엔 뚜껑없는 벙거지를 쓰고 개량한복을 입은 그를 두고 혹자들은 ‘이 시대의 기인'이라 부른다.

소리꾼이자 도공 산악인 시인 서예인이며 대금 가야금을 연주하고 장승도 깎는다. ‘산꾼의 집'에서 들려오는 대금 및 가야금 산조는 그가 연주한 곡이며 이곳에 전시된 도자기와 글씨 그림 시는 모두 그의 작품이다. 4년 전 대한민국종합미술대전 선서화 부문에선 대상을 받았으며 각종 소리마당이나 지자체 축제에 단골 게스트로 초청받는다. 청송교도소 정신교육 강사로도 활약하고 있다.

15년간 청량산에서 무려 100여 명의 목숨을 구해낸 전문 산악인이기도 하다. 6년전엔 200m 절벽에 메달린 초등학생을 119구조대원도 몸을 사리는 가운데 과감히 몸을 던져 구해내기도 했다.
그는 “산은 나를 물속에 달처럼 살다 가라한다"며 모든 것을 초연한 듯 말하면서도 "딴 그리움은 접을 수 있어도 손주에 대한 그리움은 접을 수가 없다"며 인간적인 고뇌도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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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은 전형적인 가을산이다.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사. 부산에서 꽤 멀어도 발품을 팔아 찾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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