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란 때 살해된 황보인 손자 노비가 구해
후손들이 서원 세운 후 뒷마당 양지에 비 세워 

바깥에서 본 광남서원. 제법 규모가 크다.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이자 동시에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 중종 37년인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경북 순흥에서 고려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백운동서원이라 부른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다. 회재 이언재를 모신 경주 옥산서원, 퇴계 이황을 기리기 위한 안동 도산서원 등이 대표적인 예.

 하지만 양반과 상놈의 서열이 분명했던 조선시대 때 노비의 비(碑)가 존재하는 서원이 있어 눈길을 끈다. 과메기로 유명한 구룡포에 위치한 광남서원(廣南書院)이 바로 그것이다.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국내에서 유일하다"고 강조했다. 행정구역상으로 포항시 구룡포읍 성동3리.

 문무대왕 수중왕릉인 경주 양북면 용당리 앞바다에서 31번 해안국도를 따라 가다 구포휴게소를 지나자마자 도로 좌측에 '성동 메뚜기마을', '광남서원'이란 팻말이 서 있고 서원 앞 너른 주차장에는 포항 대형 지도가 눈에 띈다.
                 광남서원 입구의 대형 지도. 지도 아래 현위치라 적힌 표기된 글도 보인다. 

 광남서원은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충정공 지봉 황보인과 그 장자인 참판공 황보석, 그 차자인 직장공 황보흠을 기리기 위해 지방유림과 그 후손들이 세웠다.

 황보인(1387~1453)은 조선 태종 14년 1414년에 천시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18년 1436년 병조판서에 올랐다. 이후 1440년엔 평안 성길도 관찰사가 돼 약 10년간 김종서와 함께 6진을 개척했고 문종 2년 1451년 영의정이 되어 단종을 보좌하다 결국 1453년 수양대군에게 살해됐다.

 황보인을 기리기 위한 광남서원에 그렇다면 왜 노비의 비가 세워져 있단 말인가. 사연은 이랬다.

 원래 역적은 3대를 멸하지 않는가. 계유정란 때 역적으로 몰린 황보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들도 살해를 당했지만 손자가 충직한 노비 덕택에 살아났다.
 다름아닌 단량이라는 노비가 어린 손자를 물동이에 숨겨 일출 명소로 유명한 호미곶이 위치한 포항 대보면의 오지 중 오지인 집신골에 피난을 내려와 거주하다 이보다 남쪽인 지금의 구룡포읍 성동으로 이주하여 대를 이어가게 됐다.

 세월이 흘러흘러 황보인과 그의 아들도 복관되자 정조 15년 1791년에 후손들이 '세덕사'라는 서원을 지었고, 순조 31년 1831년 나라로부터 '광남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

 서원을 들어서면 좌측에 '영의정 충정공 지봉선생 신도비'라 새겨진 신도비가 있으며 강당인 숭의당과 제당인 충종묘와 사우삼간 등이 있다.

       서원 입구에 위치한 황보인의 신도비. '영의정 충정공 지봉선생 신도비'라 새겨져 있다.

광남서원의 본 건물.

'광남서원'이라 적혀 있다.



 충비(忠婢) 단량을 기리는 비(碑)인,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라고 적혀 있는 비가 경내 뒷쪽 한켠에 세워져 있다. 무심코 왔다간 놓치지 쉬운 곳에 있지만 서원에 노비의 비(碑)가 세워져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계급사회인 당시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이었다는 것이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의 설명이다.

         '충비단량지비(忠婢丹良之碑)'라' 적힌 노비 단량의 진짜 비석.
          단량의 비.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다. '진짜' 단량의 비는 담벼락 아래 양지바른 지점에 서 있지만 이후에 만든 '가짜' 단량의 비는 반듯한 전각 안에 소중히 모셔져 있다. 세월의 풍파를 겪고, 앞으로도 겪을 진짜 화강암 비는 여견히 바깥에 놓여 있고, 반들반들한 까만 대리석에 말끔하게 음각된 가짜 비는 전각 내에 서 있으니 정말 통탄할 노릇이다.

 어찌된 사연인지 서인만 부소장에게 물어보니 "이게 바로 우리 공무원의 수준이자 현실"이라고 자탄했다.

                
                진짜 단량의 비는 담벼락 아래 비바람 등 대자연에 노출돼 있고(사진 위) 바로 옆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가짜 비(사진 아래)는 보물단지마냥 전각 안에 고히 보관돼 있다. 이 어찌
                운명의 장난인가. 이게 바로 우리 공무원들의 현실이다.

 겨울 산사. 왠지 마음이 숙연해지고 그만큼 다가오는 느낌이 자뭇 엄숙하다. '느림과 비움'도 절로 떠오른다. 각박한 도시생활에 찌던 현대인들이 한 번쯤 자신을 되돌아 보기에 제격이다.
 기축년의 새해가 밝은 지 벌써 6일. 뭔가 새로운 기분으로 출발하는 계기를 만들어보자. 영남
알프스 산군 속의 사찰은 어떨까. 이곳에는 정감 넘치는 산사들이 모여 있다.
 재약산(수미봉) 기슭의 표충사, 가지산 아래 석남사, 운문산 품안의 운문사. 적막하고도 고요한 절집은 늘 있는 그대로 말없이 서있다.

‘집착을 떨쳐라’ ‘스스로 행하라’….

 지극히 당연한 경구이지만 실천은 쉽지 않다. 두툼한 방한복을 꼭 껴입고 겨울 산사를 찾아 올 한해 자신의 화두를 가슴속에 각인시켜 돌아보자.

#대덕스님 배출 산실 표충사

표충사 경내에서 바라 본 영남알프스전경. 왼쪽 처마 밑 천황산(사자봉)에서부터 천황재 재약산(수미봉) 문수봉이 잇따라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표충사 경내 영정약수.

매표소를 지나면 앙상한 가지를 고스란히 간직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하늘에 닿을 듯 쭉쭉 뻗어 있다. 경내는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된다.

표충사는 사명 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승병 3000여명을 이끌고 조국을 구한 구국성지. 때문에 표충사 내 유물전시관과 표충서원에는 사명 대사와 관련된 많은 유품이 보관돼 있다. 임란때 사명 대사가 입은 금란가사와 장삼, 임란 후 대사가 강화사절(講和使節)로 일본에 가서 조선 포로의 송환문제를 다룬 문서 등 16건 79점이 소장돼 있다. 또 임란때 승려로 큰 공을 세운 서산 사명 기허 등 세 대사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표충서원에는 그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역임했던 현대의 마지막 고승 효봉 스님이 말년을 보내고 열반한 곳도 이곳이며, 고려땐 일연 선사가 삼국유사를 탈고한 곳도 이 곳 표충사다. 당시 충렬왕은 이 곳을 찾아 동방제일의 선찰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온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 원효 대사가 창건한 이 절의 원래 이름은 죽림사(竹林寺). 재약산 기슭의 대밭 속에서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하산, 곧바로 절을 세운 후 죽림사라 불렀다. 그 후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요양을 와 이 곳의 신비스런 우물(靈井藥水)을 마시고 나아 영정사(靈井寺)로 바뀐 뒤 조선 헌종 5년(1839년) 표충서원이 자리를 잡으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로 고쳐졌다. 아직도 신비의 물인 영정약수가 경내에 있으니 꼭 맛을 보자. 절내 유일한 국보(75호)인 청동함은향완도 빠뜨리지 말자.

표충사에는 특히 등산객이 많이 보인다.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재약산(수미봉)과 천황산(사자봉)을 오르기 위해서다. 경내에서도 아름다운 산세가 한 눈에 보인다.

 절 못미처 오른쪽으로 난 옥류동천을 따라 흥룡폭포~층층폭포를 지나서 만나는 옛 고사리분교가 그 유명한 100만여평의 사자평 시점. 사명 대사가 임란때 승병을 훈련시킨 곳이기도 하다. 억새가 한창인 가을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다. 천황산(사자봉)에 오르려면 절 왼쪽 내원암 방향으로 출발, 한계암~시상암을 거쳐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종주는 6시간 걸리며 중간 천황재에서 내원암으로 내려오면 3시간 정도 소요된다.

#비구니 특별선원 석남사

석남사 일주문.

                   

보물인 석남사 부도.   

수십개의 공덕탑.

평온한 석남사엔 가지산에서 하산하는 등산객이 자주 눈에 띈다.



울산 울주군 언양에서 밀양으로 넘어가는 24번 국도 중간에 위치해 있는 통도사의 말사이자 조계종 종립 특별수련도량으로 가지산 기슭에 터를 잡고 있다. 가지산의 옛 이름인 석안산(石眼山)의 남쪽에 있다하여 석남사(石南寺)라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일주문에서 절집까지 오르는 숲길은 포근하기 그지없다. 주변엔 잘 생긴 홍송과 각종 활엽수가 적당한 간격으로 첩첩이 늘어섰다. 5~6분 거리인 이 숲길을 걷노라면 마치 도심 속 깔끔한 소공원을 옮겨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오가는 사람 중 절반은 등산객들. 숲길이 끝날 때 쯤이면 등산객들은 오른쪽 청운교를 건너 가지산으로 향하고, 나머지는 계곡을 따라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계곡 암반 위에는 수 십개의 작은 공덕탑(돌탑)이 정성스럽게 서있다. 비구니 참선수좌들의 기원인지 속인들의 바람인지 잘 모르겠지만.
 석남사는 신라 헌덕왕 16년(824년) 도의국사가 호국기도를 위해 창건한 이래 수 차례 부침을 거듭했다. 한국전쟁 땐 폐허가 되다시피하기도 했다. 이후 1957년 비구니 인홍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비로소 비구니 사찰로 일신했다. 대웅전 앞 삼층석가사리탑과 대웅전 뒤 대밭 주위에 도도히 선 석남사 부도가 볼만한 문화재다.

#언제나 포근하게 다가오는 운문사

어른 가슴 높이의 정갈한 운문사 돌담.
학인스님들의 책상과 물품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천연기념물인 처진소나무.

석남사가 비구니 특별선원이라면 운문산 기슭의 운문사는 비구니 교육도량. 김천 청암사, 대전 동학사, 수원 봉녕사에도 승가대학이 있지만 전통과 규모 면에서는 운문사가 국내 최고.

이 때문에 운문사를 구경하는 도중에는 흔히 머릿속에 그려지는 지엄한 스님보다는 20대 초반의 예비 비구니 스님들의 발빠른 움직임을 목격할 수 있는 점이 다른 절집과의 차이라면 차이.

가냘픈 이들 학인스님들이 조석으로 행하는 불전사물(佛典四物)은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유명 의식. 무엇보다 60여명의 동료 학인스님들도 장삼과 가사로 예를 갖추고 동참한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보통 절집은 산을 등지고 있는데 반해 운문사는 운문산과 마주앉은 형태다. 실제로 옛 비로전인 대웅보전 앞에 서면 운문산 정상이 올려다 보인다.

 뭐니뭐니해도 운문사의 자랑은 그 짜여진 정갈함에 있다. 절 입구까지 올라가는 1㎞ 남짓한 해묵은 노송의 푸름, 뒤꿈치만 살짝 들어도 안이 들여다 보이는 돌담, 천연기념물인 처진 소나무를 중심으로 마치 짜맞추듯 놓여진 당우. 500여년 성상의 처진 소나무는 푸름을 간직한 채 마치 세속의 짐을 내려놓으려는 듯 대부분의 가지를 내리고 있다.

 신라 진흥왕 21년(560년)에 창건된 운문사에는 문화유적들도 많다. 신라때의 삼층석탑과 금당 앞 석등, 가장 작은 당우인 작압전 내 석조여래좌상과 사천왕 석주 등 보물만 7점이 있다.
 
◇ 산사주변 가볼만한 곳

영남알프스 내 산사 주변에는 유명 온천과 자연휴양림, 예술촌, 눈썰매장 등이 곳곳에 있어 하루 내지 1박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특히 온천은 등산로 들머리나 날머리에 위치해 있어 천혜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우선 부산서 가장 가까운 등억온천단지. 경부고속도로 서울산(삼남)IC에서 나와 양산 방향 35번 국도를 타고 10분을 채 못가 작천정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입구에는 ‘작천정 1.2㎞, 등억온천단지 4㎞, 자수정 동굴나라 3.3㎞, 신불산 군립공원’ 이정표가 보인다.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신불산 중턱에 자리한 등억온천단지에는 현재 3개의 대중탕이 있다. 가장 먼저 생긴 언양온천과 신불산온천, 자수정온천 등이 있다.

 신불산 인근에 위치한 등억리는 예부터 ‘내를 뚫으면 불이 나온다’는 천화천(穿火川)이라는 이름이 전해내려오는 곳. 등억온천단지는 약알칼리성 온천수로 신경통 소화기질환 피부병에 탁월한 효험이 있다. 신불산온천은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는 옥을 10여t이나 사용해서 만들었다.

 등억온천단지 내 진입로에는 ‘도깨비 도로’가 있어 눈길을 모은다. 오르막길로 보이지만 착시로 인해 실제로는 내리막길인 도깨비 도로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어 찾기도 쉽다.

등억온천단지를 나오면 차로 2~3분 거리에 ‘자수정 동굴나라’가 있다. 원래는 자수정 광산이었지만 관광자원으로 개발했다. 놀이공원과 함께 지금은 눈썰매장이 개장돼 있어 어린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온천단지 내에는 간월사 터와 보물인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도 있으니 빠뜨리지 말자. 간월사지에서 보이는 눈덮인 신불, 간월능선은 이 곳이 왜 영남알프스라불리우는지 실감할 수 있다.

 등억온천단지 인근에는 간월자연휴양림이 있다. 겨울 산에 들어가 대자연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듯하다.

간월자연휴양림.

간월자연휴양림에서 본 눈덮인 간월산 공룡능선.

언양에서 24번 국도를 타고 석남사에 못미쳐 청도 방향 985번 지방도를 타면 곧 가지산탄산유황온천이 나온다. 탄산이 다량 함유된 탄산온천인 이 곳에는 수영장 시설까지 갖춰 특히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985번 지방도를 타고 운문령을 넘으면 운문산자연휴양림이 기다린다. 산림청이 운영하는 이 곳에서는 심산계곡의 고요한 자연미와 용미폭포의 빙벽을 감상할 수 있다.
운문사를 구경한 뒤에는 왔던 길을 되돌아와도 되고 청도에서 온천을 한 후 건천이나 경산IC를 거쳐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다.

운문사에서 청도방향으로 45㎞ 정도 달리면 용암온천이 나온다. 유황성분이 많고 특히 게르마늄은 일반 온천에 비해 30배 정도. 인근 삼신마을에 장수노인이 많은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고 한다. 남성과 여성용 노천탕이 별도로 있다.

운문사에서 경산 대구방향으로 35㎞ 지점에는 유화수소온천인 학일온천이 있지만 얼마전 문을 닫았다. 참고하길.

 표충사에서 언양 방향으로 가다 보면 가인예술촌이 나온다. 폐교된 가인초등학교를 지난 1997년 지역 화가들이 합심해 집단창작촌을 일군 곳이다.

또 24번 국도를 타고 석남사를 지나 밀양 방향으로 가다 좌회전해 69번 국도를 타면 배내골 방향. 배내재를 지나면 파래소폭포를 구경할 수 있고 폭포를 기준으로 위 아래에 각각 신불산자연휴양림 상단과 하단이 위치해 있다. 숲속 통나무집에서 온가족이 함께 겨울밤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이 땅에서 가장 예쁜 절집으로 손꼽히는 만추의 부석사. 단풍이 봉홧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는 가운데 범종루 안양루 무량수전에 이르는 선이 무척 아름답다.

 만추의 부석사는 뭇사람들의 이상향이다. 여느 가을 산사가 그렇지 않겠냐만 부석사가 이 가을 유독 두드러 지는 것은 그 만의 독특한 빛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석사로 향하는 길 주변은 온통 빠알간 늦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햇빛에 반사된 노오란 은행잎은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한동안 붙잡는다.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가을하늘에 빠알간 사과, 노오란 은행잎 그리고 간간히 모습을 드러내는 오색단풍의 강렬한 원색 대비는 과연 이 곳이 동화 속의 세상인지 엄숙함과 경건함을 요하는 절집가는 길인지 착각이 들 정도다.

조선땅 최고의 명상로로 칭송받는 아름다운 은행나무 숲길을 따라 바랑을 지고 만행을 떠나는 한 선승.
부석사 입구의 뜬바우골 사과농장에서 활짝 웃는 어린이들.

 경북 영주시 부석면에 위치한 부석사는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해 있지만 실은 백두대간인 태백산에서 남서쪽으로 살짝 뻗어나온 야트막한 봉황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일주문 현판에는 ‘태백산 부석사’라 적혀있다. 소백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것은 소백산 주변에는 눈에 띄는 사찰이 없어 구색맞추기로 포함됐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길 양편엔 노란 은행나무 가로수가 뭇사람들을 맞는다. 천왕문까지 1㎞도 채 안되는 부담없는 완경사의 흙길인데다 길 양편의 은행나무 가지가 서로 만나 하늘을 살짝 가릴 정도로 길 폭이 적당해 여유로움과 평화로움이 깃든다. ‘조선땅 최고의 명상로’라고 했던 유홍준 교수의 평도 과장은 아닌 듯하다.

한편으론 순례자를 맞이하는 부처의 자비로운 배려라는 생각이 들고, 극락으로 향하는 통과의례의 진입로 같은 착각도 든다. 하지만 관광객들은 이같은 깊은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저마다 사진을 찍으며 추억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처음 눈길을 끄는 유물은 천왕문 입구의 높이 4.3m의 당간지주(보물 255호). 곧게 뻗어오르면서 위쪽이 좁아져 선의 긴장과 멋이 살아있어 명작중의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천왕문을 통과하면 여기서부터 부석사 경내로 인도된다. 하지만 석축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어 이내 부처를 만날 수 없다. 공간이 협소하고 가팔라 높은 석축과 누각을 이용, 계단식으로 가람을 배치한 부석사의 독특한 건축양식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부석사는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지금까지 한국전통건축의 고전으로 꼽히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좌우에 요사채와 유물전시관이 서있고 그 위로 범종루 안양루 무량수전이 이어진다. 무량수전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아홉 단의 석축을 넘어야 하는데, 이는 극락세계에 이르는 9품 만다라의 이미지를 건축적 구조로 구현시킨 것이다. 석축을 오르는 계단도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108계단으로 이뤄졌고,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이는 안정감으로 인한 미적인 면을 고려한 것.

범종루를 지날 땐 계단 입구에서 반드시 멈춰 고개를 들어보자. 네모난 액자 속에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비스듬한 각도에서 우러러 보인다. 동행한 당시 도륜 총무스님(현 영주 유석사 주지)은 이 장면이 부석사 내에서 변치않는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강조한다.

극락이란 뜻이 담긴 안양루(安養樓) 밑 계단을 올라서면 무량수전에 앞서 정면에 아름다운 자태의 석등(국보 17호)과 마주한다. 현존하는 석등 중 가장 화려한 조각솜씨를 자랑한다.

석등에 이어 부석사의 절정인 무량수전(국보 18호). 고려 현종 7년(1043년) 원융국사가 부석사를 중창할 때 지은 집으로 극락세계인 서방정토를 주재하는 소조불인 아미타여래(국보 45호)를 모시고 있다. 때문에 정면이 아니라 왼쪽인 서쪽에 모셔져 있다.

일직선이 아닌 정사각 모양에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적힌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현존하는 최고의 목조건축물인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으로 늠름한 기품과 조용한 멋이 일품이다. 특히 34-49-44㎝의 배흘림기둥은 규모에 비해 훤칠한 느낌을 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무량수전의 아름다움은 외관 뿐만 아니라 내관에서도 뿜어져 나온다. 건물 안의 천장을 막지 않고 기둥 들보 등 모든 부재들을 노출시킴으로써 탁 트인 공간 속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범종루 계단 입구에서 바라본 안양루와 무량수전. 네모난 액자 속에 나타나는 한 폭의 그림같은 이 장면은 부석사 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평을 듣고 있다.
 

경북 영주 부석사의 노란 은행나무도 뭇사람들의 눈길을 끌지만 안양루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내려다보는 경관도 압권이다. 경내의 도열된 당우들도 그렇고 저 멀리 펼쳐지는 소백산줄기의 크고 작은 연봉들이 남쪽으로 치달리는 산세는 오랫동안 뇌리에서 잊히지 않을 것이다.

 부석사에서의 압권은 뭐니뭐니해도 무량수전과 안양루에서 내려다보는 경관. 바로 이 장쾌한 경관을 한 눈에 보기 위해 무량수전과 그 앞마당에 안양루를 다른 누각에 앞서 세웠다는 생각이 들 정도.

안양루와 무량수전 뜰에 서면 발아래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당우들의 지붕이 도열해 있는 듯 하고, 저 멀리 소백산맥의 크고 작은 연봉들이 남쪽으로 치달리는 산세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범종루에서 바라본 안양루와 무량수전의 모습이 가람 내의 최고 경관이라면, 안양루와 무량수전에서 펼쳐지는 소백산 연봉의 조망은 절에서 보이는 바깥풍경 중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시인 묵객들은 안양루에 오르면 끓어오르는 시심을 참지 못하고 적잖은 시문을 남겼다. 부석사에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나타나는 영월이 고향인 김삿갓도 말년에야 뒤늦게 이곳 안양루에 올라 읊은 시구가 지금도 누각 안에 걸려있다.

안양루에 기대서서 한동안 말없이 정면을 주시하던 도륜 스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부석사의 뛰어난 경관을 설명한다.

“노란 은행잎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부석사에 오면 세 개의 바다를 보고 가야 합니다. 무량수전 앞마당에서 연출되는 소백산 연봉의 산의 바다, 이른 아침이면 안양루에서 펼쳐지는 구름의 바다, 해질 무렵 소백산자락에 가라앉는 노을의 바다입니다.”

부석사라는 절 이름의 단초가 되는 부석.

글, 사진 일부=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사진 제공=도륜 스님(영주 유석사 주지)


 

 한겨울에도 피는 동백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봄꽃의 시기적 계보는 대략 이럴 게다. 매화 벚꽃 산수유 개나리 진달래 철쭉 영산홍 정도.
 요즘은 누가 뭐래도 배롱나무꽃이 가장 자주 눈에 띈다. 절집 묘소 재실 가로수 심지어 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서도 거의 우점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가히 배롱나무 천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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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 정씨 2세조 정문도 공 묘지 좌우에 위치한 800년된 천연기념물인 배롱나무. 부산진구
       양정동에 위치한 화지공원 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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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운데 하얀 아파트 좌측 뒤 회색빛 높은 서면 롯데호텔이다. 왼쪽 낮은 건물은 롯데백화점.


 주로 7~9월에 꽃이 피며, 100일 동안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목백일홍(木百日紅)이라 불리는 배롱나무. 국화과의 1년생 초(草)인 백일홍과 전혀 다른 식물이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최고령 배롱나무는 어디 있을까.
 부산시 부산진구 양정동 화지공원에 수령이 800년 된 배롱나무 노거수(老巨樹) 두 그루가 있다.
 정묘사라고도 불리는 화지공원은 동래 정씨 2세조(二世祖)로 고려 중기 안일호장(安逸戶長-동래군 향직의 우두머리)을 지낸 정문도 공의 묘지와 재실이 있는 곳. 해발 142m의 구릉지 수준에 불과한 화지산(華池山) 기슭에 위치한 이곳을 동래 정씨 후손들이 공원화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다.
 800년 된 두 그루의 배롱나무는 정묘사 내 정문도 공의 묘를 봉분할 때 묘 좌우에 심겨져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 배롱나무는 원 줄기는 죽고 주변의 가지들이 별개의 나무처럼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렀다고 전해온다. 한마디로 800년을 대이어 버텨온 묘지기 나무인 셈이다.
 배롱나무가 부귀영화를 안겨다주는 나무로 예부터 알려져 동래 정씨 후손들이 배롱나무를 자신들의 2세조(二世祖) 묘 옆에 각각 1그루씩 심었다고 한다.
 가까이 다가가 꼼꼼히 살펴보면 실제로 원 줄기는 죽고 그 주변에서 돋은 줄기가 자라 지금의 형태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 줄기도 방부처리돼 남아 있다.
 네 그루가 모여 있는 동쪽의 나무는 높이가 8.3m이며 세 그루의 모여 있는 서쪽의 나무의 높이는 동쪽의 그것보다 약간 커 8.6m이다. 모두 진분홍의 꽃을 피우고 있으나 수령이 오래돼 껍질이 벗겨지는 등 생장 상태는 그리 양호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 기품만은 고고하면서도 우아해 보는 이의 감동의 자아내기에 충분하고도 남는다. 두 그루 모두 지난 1965년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돼 있다.

 화지공원을 품은 화지산은 30분이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마을의 노인들이 즐겨 찾는다. 일반인들에겐 아침 산책로로 적합하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체육공원도 있다.
 화지산은 산세로도 의미있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비록 구릉지 수준의 야산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반대편 어린이대공원이 위치한 초읍 쪽으로 내려가 도로(초읍고개)를 건너면 쇠미산(금용산)으로 바로 이어져 한쪽으론 어린이대공원 만남의 광장과 백양산으로, 또 다른 방향으론 만덕고개를 지나 금정산으로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

 부산의 지도를 펴놓고 보면 한가운데 위치한 부산진구 양정동에 위치한 화지공원만큼 알토란같은 도심의 공원은 없을 것으로 확신한다.

 참고로 화지공원에서 50m 거리엔 부산광역시 교육청이, 차로 3분 거리엔 부산시청, 6분 거리엔 법원 및 검찰청이 위치해 있다. 공항은 20분, 해운대는 25분, 부산역은 20분, 남포동 및 자갈치도 25분 정도면 충분하다. 지하철 1호선 양정역에선 몇 번 출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교육청, 백조아파트' 쪽으로 걸어서 5분쯤 올라오면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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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 정씨 시조와 윗대 할아버지를 모시는 사당 추원사. 아래 사진은 추원사 입구 추원사기(追遠祠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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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원사 뒷쪽에는 동래 정씨 시조묘가 위치해 있다. 한창 벌초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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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지공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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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구에 들어서면 동래정씨회관 겸 화지문화회관을 만난다. 결혼식도 하고 문화강좌도 열린다. 문중에서
       정묘 관리를 위한 일종의 수익사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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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이면 주민들이 배드민턴을 한다. 아쉽게도 이들은 운동을 마치면 무심하게도 네트를 되가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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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경문. 정문인 이 문을 통과하면 경치가 보인다는 의미이다. 이름이 아주 운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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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경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우측으로 바로 등산로가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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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을 하지 않으려면 조경이 잘 된 길을 따라 직진하면 천연기념물인 배롱나무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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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는 특히 노인들이 많이 눈에 띈다. 여기서 좌측으로 조금만 가면 배롱나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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