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생 102주년 '청마 유치환'
               발자취를 더듬다

경남여고 교장 시절의 청마 유치환.

옛 모자상 앞에서 학생들과 함께 한 청마. 함께 사진을 찍은 학생들은 졸업후 모교 교장을 역임했던 백월아(왼쪽) 씨와 동기 김영화 씨다.


 
1963년 7월 4일 오전. 부산의 한 여자고등학교 전체가 술렁거렸다. 수업은 하지 않고 전교생이 교문 앞에서 학교 건물까지 두 줄로 도열한 채 누군가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입은 모두 귀에 걸려 있었다. 그야말로 '오매불망', '학수고대', '희불자승'이었다. 대체 누구기에 이 감수성 예민한 갈래머리 여학생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을까. 청마 유치환(1908~1967)이었다. 그 무대는 경남여고.

 그가 교장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이날 오전 입소문을 타면서 학교 수업은 순식간에 마비됐다. 당시 남용강(65) 학생회장의 회상 한 토막. "'깃발' '바위' 등의 시를 애송하며 마음속으로 연정을 품었던 청마 선생이 부임한다는 소식은 일순간 학교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기에 충분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학생으로서 뿌듯했고 동시에 대단한 행운이었죠."

 유난히 하늘이 파랬던 다음 날 상견례를 겸한 조회시간. 전교생과 교사들은 생명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노래한 당대 최고 시인이 어떤 화두를 던질지 궁금했다. 모든 시선은 그의 입에 모아졌다.  
  
"여자는 꽃으로도 때릴 수 없습니다. 하물며 여러분 같이 어여쁜 소녀들에게…." 뜨거운 환호성과 함께 박수 소리가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상상도 못했던 파격 그 자체였다. "과연 청마였다." 교무실과 교실의 반응은 그랬다.

경남여고 교장실에서의 청마 유치환.
1963년 경남여고 가을 소풍 때 금정산 산성 앞에서 포즈를 취한 청마. 사진은 경남여고 35기 앨범에서 발채.

 청마의 파격적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교훈도 바꿨다. 당시 교훈은 1958년 제정된 '근검하고 관대하라/봉공정신을 가져라/의뢰심을 갖지 말라'. 여자고등학교 교훈으로는 누가 봐도 좀 '거시기하지 않은가'.그가 내놓은 교훈은. '억세고 슬기로운 겨레는/오직 어엿한 모성에서 이루어지나니/이 커다란 자각과 자랑에서/우리는 스스로를 닦는다'. 독특하게 '겨레의 밭'이라는 제목도 있었다. 짤막한 한 편의 시 형식을 띤 것으로, 청마가 아니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청마다움'이 묻어난다.

 지금의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교훈은 여성을 한 인격체 대신 '모성'이나 '밭'을 너무 강조했다는 지적이 제기될 수 있다. 이웃 부산고 학생들이 "그럼 우린 '겨레의 씨'다"고 우겨댄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나 한 번 더 곱씹어 보면 겨레의 기틀로서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초석이 되자는 의미라는 것이 학교 측이나 졸업생들의 설명이다.
   
 이 교훈에 얽힌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하나. 참여정부 때인 지난 2000년 교육부는 남녀차별금지법에 의거해 전국 여자중·고교의 교훈을 조사해 '순결' '몸매' '부덕(婦德)' 등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줄 수 있는 단어가 들어 있는 교훈을 바꾸라는 지시를 일선 시교육청을 통해 하달했다. 경남여고도 그 유탄을 피하지 못했다.

 모교 출신 교사(교장까지 역임)로 당시 학생부장 겸 동창회 업무를 맡았던 백월아(65) 씨의 이에 대한 후일담. "교육부나 시교육청조차 청마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말초적 교훈을 지닌 학교와 함께 일괄적으로 공문을 보낸 사실에 대해 동창회를 비롯한 학교 전체가 분개했지요. 우여곡절 끝에 결국 시교육청을 설득시켜 지금까지 '겨레의 밭'이라는 교훈이 살아남게 됐지요."

지난 23일은 청마 탄생 102주년 기념일. 언론의 문화면조차 그 흔한 기사 한 꼭지 싣지 않았다. 씁쓸했다. 세월의 무상함인가.

 보다 못한 게으른 무지랭이 기자가 청마의 발자취를 뒤늦게 더듬었다.

 자료를 찾던 중 청마 제자 문덕수의 '청마 유치환 평전'에 언급된 글귀가 눈길을 확 끌었다. '1958년 가을 경주고 제자들과 술자리를 함께했다. 한 학생이 교장인 청마에게 당돌한 질문을 하나 했다. "선생님!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른 뒤 청마가 대답했다. "사랑이란 어처구니없는 것!"

탄생 102주년 청마의 발자취 후속편(탄생 102주년 청마의 발자취, 부산 통영 거제를 둘러보다)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hung.kookje.co.kr/496

 

 

 

 

 


 
경북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 주민들은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예상과 달리 처음에는 환영 일색이 아니었다. 절반 정도는 시큰둥했다. 사생활 피해가 우려된다는 것이 직접적인 이유. 회재 이언적 선생의 17대손이자 양동마을 문화유산해설사 이지휴 씨는 "관람객들이 빈집으로 착각하고 살림집으로 들어오는 것은 한 발 양보해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헛기침 한 번 없이 방문을 불쑥 여는 경우가 잦아 주민들이 질겁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관람객들이 주민들의 사생활 보호에 각별한 배려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이들 두 마을의 관람객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많이 알려진 하회마을의 경우 평소보다 1.5배 늘었지만, 대학생이나 전문가 중심의 답사객들이 주로 찾던 양동마을은 평소보다 주말은 10배, 평일은 5배 정도 급증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가급적 문화유산해설사와 함께 둘러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떠나기 전 아무리 예습을 해도 해당 지역의 '전문가들'만큼 꼼꼼하게 살펴볼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마을 입구에는 문화유산해설사 사무실과 부스가 각각 있다.

안동 하회마을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꼭 보고가요"

- 류성룡 등 풍산 류씨, 600여 년 역사의 집성촌
- 추석연휴·24일~10월3일,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벌
- 매주 수·토·일 오후 2~3시, 탈놀이 공연 꼭 챙겨볼 것
   
하회마을은 서애 류성룡으로 대표되는 풍산 류씨가 600여 년 전 새 정주지를 찾아 정착한 집성촌으로, 개척입향(開拓入鄕)의 대표적 사례. 지금도 125세대 주민 중 67%가 풍산 류씨다.

마을은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길지. 주산인 화산과 S자로 마을을 휘휘 돌며 굽이치는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그래서 명명된 이름이 글자 그대로 '하회'(河回). 이처럼 앉은 터가 절묘하다 보니 여태 외침 한 번 받지 않아 한옥들이 잘 보존돼 있다. 이를 한눈에 확인하려면 마을과 마주한 강 건너 병풍처럼 우뚝 선 전망대인 부용대에 오르면 된다.   

부용대엔 최근 안내판이 새로 생겼다.

하회마을 항공사진. 문화재청 제공.


 부산서 하회마을을 찾는다면 요일 선택과 시간 배정을 잘해야 한다. 매주 수, 토, 일요일 오후 2~3시 하회마을 탈춤 전수회관에서 열리는 하회별신굿 탈놀이 공연 때문이다.

하회마을을 찾아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보지 않았다면 이는 '팥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다. 하회마을 신영희 문화유산해설사도 "전국의 탈춤 중 가장 재밌는 공연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상민들이 지배계층을 비판하고…" 하는 내용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심심찮게 눈에 띄는 것도,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보지 못한 사람은 죽어서 좋은 데 못 간다'는 말이 이 지방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탈을 벗으니 부네(가운데 기생 역할)는 남자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이 사실을 알고 깜짝 놀아 혼비백산했다고 한다.


공연 도중 외국인을 불러내 어깨춤 한번 덩실. 관광공사 제공

이 공연은 시종일관 관람객과 함께 한다.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본래 무동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파계승마당 등 10개 마당으로 구성돼 있으나 상설공연은 5~6개 마당으로 축약해 보여준다. 처음부터 관객들의 혼을 쏙 빼놓고 웃음보를 자극한다. 공연 도중에는 내외국인을 자연스럽게 불러내 어깨춤을 추게 만들고 하회탈을 선물한다.

그런데 말도 안 통하면서도 입소문을 듣고 찾는 외국인을 위해 공연장 한 쪽에 대형 모니터를 설치해 재담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영어 일어 중국어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하회마을 관람은 크게 ▷부용대와 주변의 서원과 정사(精舍) ▷하회별신굿 탈놀이 공연 ▷병산서원 ▷낙동강변의 송림 만송정을 포함한 하회마을 그 자체로 이뤄진다. 3시간쯤 걸리는 부산서 출발할 경우 하회별신굿 탈놀이 공연이 시작되는 오후 2시까지 부용대와 병산서원 그리고 점심식사까지 마쳐야 하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한다. 마을 입구의 엘리자베스 여왕 방문 기념관, 세계탈박물관은 공연 관람 후 둘러봐도 늦지 않다. 이런 일정이라면 늦어도 오전 8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이번 추석 연휴와 오는 24일~10월 3일 열리는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벌 기간에도 예외없이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일정대로 진행된다. 축제 기간에는 수, 토, 일요일 이외 나머지 요일에도 하루 1회씩 하회별신굿 탈놀이 공연이 열린다. 공연 시간과 장소는 축제조직위의 결정에 따른다.

하회마을 충효당.

충효당 내부에서 본 모습. 관광공사 제공.


하회마을 양진당.

하회마을 화경당(북촌댁).


류시원의 안동 집 담연재 문틈 사이로 한 일본인이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류시원의 문패가 보인다.


마을에선 풍산 류씨의 대종택인 양진당과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 화경당이라 불리는 북촌댁 그리고 마을의 중심이자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600년 된 삼신당이라는 불리는 느티나무는 빠뜨리지 말자. 화경당은 얼마 전 '욘사마' 배용준이 하룻밤 묵어간 뒤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류시원의 집인 담연재는 현재 사람이 살지 않아 닫혀 있다. 대신 그의 문패가 형의 것과 함께 나란히 걸려 있다. 일본 사람들은 그래도 이곳에 오면 반드시 찾는다고 한다.

600년 된 삼신당이라 불리는 느티나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이곳은 소원을 적은 쪽지가 아주 많이 보인다.


마을과 부용대를 잇는 나룻배. 실은 모터로 움직이며 왕복 2000원을 받는다.

마을 옆 솔숲인 만송정.


주차장 앞 팻말.

주차장 앞 화천서원.


류성룡의 형 류운룡을 배향한 서원인 겸암정사.

옥서애 류성룡이 낙향해 기거하던 연정사.


병산서원 만대루. 기둥 사이로 보이는 풍광이 일품이다. 관광공사 제공.

병산서원 만대루.


부용대는 하회마을 만송정 강변에서 나룻배를 타고 다녀오거나 하회마을 입구에서 차로 '부용대·옥연정사·겸암정사'라 적힌 이정표를 보고 5분 정도를 달려야 한다. 주차장 앞 고건축물은 화천서원.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을 배향한 서원이다. 관람은 화천서원~서애가 낙향해 기거하던 옥연정사~ 부용대~ 서애의 형 겸암이 제자를 가르치던 겸암정사~부용대~주차장 순으로 걸으면 된다. 겸암정사는 부용대에서 7~8분 걸린다. 병산서원에선 초대형 누각인 만대루를 유심히 보자. 7칸이나 되는 만대루 기둥 사이로 보이는 병산과 낙동강 풍광은 마치 7폭의 동양화 병풍을 보는 듯하다.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로 나와 '풍산' '지보' 방향으로 가다 보면 '하회마을' 이정표를 만난다.


경주 양동마을

서백당의 마지막 현인 언제 태어날까

- 월성 손씨·여강 이씨 750여 년 된 처가입향
- '물(勿)'자형의 독특한 산골마을
- 취화선·혈의 누·음란서생 등 영화 속 숨은 촬영지로 유명
 
  
양동마을은 혼인을 통해 처가에 들어와 살면서 자리 잡은 처가입향(妻家入鄕)의 대표적 마을로 하회마을보다 150년 정도 앞선다. 조선 초 월성 손씨의 입향조인 손소가 장가왔다 재산을 물려받아 눌러앉고, 그 뒤 여강 이씨 이번이 손소의 딸에게 장가와 가문의 뿌리를 내렸다. 이 때문에 외손(外孫)이 복 받은 마을로 통한다. 이후 월성 손씨는 우재 손중돈이라는 청백리를 낳았고, 여강 이씨는 '동방 5현' 회재 이언적을 배출했다. 지금은 140여 세대 중 80가구가 여강 이씨, 18가구가 월성 손씨이며 나머지는 타성이다.

이곳 또한 하회마을과 함께 풍수에 따른 길지에 터를 잡았다. 실제로 두 마을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길지로 언급됐고, 일제시대 일본 학자인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풍수'에도 '삼남의 4대 길지'에 포함됐다.   
 
하회마을이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 강마을이라면 이곳 양동마을은 주산인 설창산 문장봉에서 네 줄기의 골짜기가 뻗어내린 '물(勿)'자형의 산골마을이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 특이한 지형인 것이다.

관가정을 찾은 어린이들.

양동마을 항공사진. 경주시 제공.


시 말해 마을 입구에서 보면 비교적 작은 마을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넓어지고 높아지는 전협후광(前狹後廣) 전저후고(前低後高) 형태의 지형임을 알 수 있다. 평지의 하회마을의 경우 강 건너 부용대(해발 64m)만 올라서면 훤히 볼 수 있지만 양동마을은 헬기를 타고 하늘에서 봐야 온전히 볼 수 있다.

임연주 문화유산해설사는 "입구에서 보이는 가옥들은 마을 전체의 4분의 1 정도에 불과하며, 마을 전체를 샅샅이 둘러보는 데는 골짜기와 산등성이를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에 최고 6시간까지 걸린다"고 설명했다. 골짜기 사이 경사진 곳에 가옥들이 보석처럼 띄엄띄엄 박혀 있어 전체 규모는 하회마을의 배쯤 된다고 보면 된다.

 양동마을은 예부터 유난히 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마을 동쪽의 안산인 성주봉이 뾰족한 문필봉을 닮은 때문이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월성 손씨, 여강 이씨 두 집안에서 낸 과거급제자가 116명이나 되며, 이 중 문과 급제자가 26명으로 경주 전체 지역 59명의 절반에 약간 못 미친다.

이 마을에서 눈여겨 봐야 될 가옥은 서백당(書百堂). 서백당은 하루에 참을 인(忍)자를 백 번 쓴다는 의미. 이 마을 입향조인 손소가 세조 2년에 지은 월성 손씨의 종택이다. 마당의 600년 된 향나무에서 바로 보이는 문필봉인 성주봉의 자태 또한 인상적이다.

이 서백당의 터가 마을 주산인 설창산의 혈맥이 집중된 곳이어서 예부터 3명의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다는 삼현지지(三賢之地)로 불렸다. 청백리 우재 손중돈과 그의 생질 회재 이언적 선생이 여기서 태어났으며, 나머지 한 명의 현인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손씨 문중에서는 나머지 한 명의 현인은 반드시 손씨여야 한다며 며느리 출산 때는 산실을 내줘도 딸에게는 허락치 않는다고 한다. 그 산실은 마당 내 조그만 담인 내외담 안쪽의 방이지만 아쉽게도 잠겨 있다.

서백당. 조그만 담인 내외담 안쪽의 방이 산실이다.

서백당 마당의 600년 된 향나무.


양동마을 무첨당.

양동마을 향단. 이 마을서 가장 규모가 크다.


누마루에 서면 안강들녘이 보이는, 우재 손중돈이 살던 관가정(觀稼亭), 여강 이씨의 종택인 무첨당(無添堂), 경상도관찰사였던 이언적의 모친 병간호를 위해 중종이 지어 준 향단(香壇)도 놓쳐선 안 될 이 마을의 자랑이다. 마을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향단은 한때 99칸이었지만 보수 때 줄여 지금은 56칸이다. 서백당과 무첨당은 골짜기 안쪽에 위치해 있어 발품을 약간 팔아야 한다.

양동마을은 알고 보니 숨은 영화 촬영지였다. '취화선' '혈의 누' '음란서생' '방자전' '가문의 영광' '내 마음의 풍경' 등이 주요 작품이다.

양동마을을 찾았다면 여기서 차로 10여 분 걸리는 안강읍의 옥산서원과 독락당도 찾아보자.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 선생을 봉향하는 곳이며, 독락당은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말년에 책을 벗 삼아 보낸 곳이다. 옥산서원은 아직 팻말이 없어 초행이라면 찾기에 유의해야 한다.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전편(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발 그리고 하회, 양동마을)을 보시려면 여기(http://hung.kookje.co.kr/500)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추석 연휴 하회·양동마을 가볼까

-마을 전체가 살아있는 문화재
-유유자적 거니니 선비가 따로 없네

-아는 만큼 보이는 '살아있는 문화유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1999년 4월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가장 한국적인 곳을 보고 싶다는 여왕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 여왕은 서애 류성룡의 13대손인 한류스타 류시원의 안동 하회마을 집 담연재에서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관람한 후 47가지의 궁중음식으로 장만된 73번째 생일상(아래 사진)을 받았다.

류시원의 안동 집 담연재에서 73번째 생일상을 받고 있다. 하회마을 입구 엘리자베스 여왕 방문 기념관에 있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맨 우측이 류시원인 것 같다. 근데 지금 류시원은 39세란다. 깜짝 놀랐다.

하회별신굿 관람 때 흥에 겨운 여왕의 발장단 맞추는 장면이 영국 BBC 카메라에 포착돼 전 세계에 방영됐다. 여왕은 류성룡의 종택 충효당에서 김치와 고추장 담그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본 후 안방으로 신을 벗고 들어섰다. 처음에는 신을 신고 마루에 올라섰다 누군가의 귀띔으로 신발을 벗었다고 한다. 여왕이 한국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영국 왕실에서는 맨발을 보이는 게 금기시돼 있어 공개석상에서 드러난 여왕의 첫 맨발은 앞서 장단 맞추던 신발 속의 발과 함께 대비되며 또다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덩달아 하회마을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후 2005년 아버지 부시, 지난해에는 아들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각각 이곳을 찾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일정상 여유가 있었다면 그 다음 방문지는 경북 경주 양동마을이었을 터. 양동마을도 하회마을 못지않게 한국의 전통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적 관람객이 경1000만 명을 넘어섰고, 입장료 주차비를 받아 이미 관광지화 돼 버린 하회마을보다 상대적으로 더 한적한 양동마을이 더 한국적이다." 양동마을도 수년 전부터 일본은 물론 중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 방송에서 영상 취재를 올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한국의 역사인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난 8월 1일 이 두 마을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수백 년 전부터 모여 사는 일종의 씨족마을. 각 성씨를 대표하는 서애 류성룡, 우재 손중돈, 회재 이언적 선생을 봉향하는 병산서원, 동강서원, 옥산서원(독락당 포함)도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항공사진으로 본 하회마을. 사진 중앙 가운데 약간 위 절벽이 부용대이며, 역S자 상단 뒷산 너머에 병산서원이 있다. 사진제공=문화재청

하늘에서 본 양동마을. 맨 우측 가운데 빨간색이 보이는 지점이 마을 입구이다. 마을 뒤 댐은 안계댐.
다른 각도에서 본 양동마을 항공사진사진. 우측 상단 쪽이 마을 입구. 사진제공=경주시

민족 최대의 명절인 한가위가 다가왔다. 올해는 사실상 17일 오후부터 연휴가 시작돼 길게는 9일까지 쉴 수 있다. 꿀맛 같은 여름 휴가를 한 번 더 보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차례와 성묘를 다녀온 후 '길고 긴' 이번 한가위 연휴에는 가족이나 친구들, 아니면 연인과 함께 유네스코가 인정한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을 다녀오는 것이 어떨까.

"한옥만 많이 있다고 해서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아닐 겁니다.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전통 관습이 살아 있고, 올곧은 유교 정신이 지금까지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지휴(62) 경주 양동마을 문화유산해설사의 이 말 속에는 전통마을을 찾아 무엇을 느끼고 배워야 하는지가 잘 함축돼 있다. 그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계문화유산이 일등 관광지로 가는 첩경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며 "이는 지금껏 지켜온 전통을 그대로 유지해 달라는 전 세계인의 공식적 부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후 주변에 흉물스러운 다리가 건설되면서 5년 만인 지난해 세계문화유산 목록에서 삭재된 독일 엘베계곡의 교훈이 떠오른다.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후속편(유유자적 거니니 선비가 따로 없네)을 보시려면 여기(http://hung.kookje.co.kr/501)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청마 유치환(1908~1967)은 부산과 적지 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우선 동래고보를 졸업했고, 22세 때 권재순 여사와의 결혼 후 1934년 부산으로 이주, 1년간 한 백화점에서 근무했다. 한국전쟁 땐 부산으로 피란, 경남문총구국대에 편입해 국군 제3사단 소속으로 종군했다.

 교편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에서 잡기 시작해 1952년 함양 안의중학교 때 처음 교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경주 대구 등지를 거쳐 1963년 7월 부산 경남여고 교장으로 부임하며 부산에 정착했다. 이듬해 부산문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1965년 영도 남여상(현 부산영상예술고)으로 옮긴 뒤 60세 때인 1967년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죽기 한 달 전 부산문인협회 회장에 재선됐고, 예총 부산지부장까지 맡았다.

 살아 생전 청마는 교가도 많이 지었다. 통영초등 통영고 통영여고 둔덕중 대구여고와 부산고 동래고 등등. 시비는 국내 시인 중 가장 많다. 만인의 연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부산에도 5개의 시비가 있다. 에덴공원과 동래고의 '깃발', 남여상과 부산진역 앞 수정가로공원의 '바위', 용두산공원의 '그리움' 시비가 바로 그것이다.

동래고 '깃발'

에덴공원 '깃발'



용두산공원 '그리움'

부산영상예술고(옛 남여상) '바위'



■"교장선생님이 아닌 시인으로 대했다"

청마를 교장으로 모신, 그래서 청마를 잊지 못하는 경남여고 35기 동기생들이 강갑회 교감과 함께 모자상 앞에서 청마를 떠올리고 있다. 왼쪽부터 허정임, 백월아, 남용강 씨.

지난 20일 오후 동구 수정동 경남여고 역사관. 머리 희끗희끗한 초로의 여성들이 모처럼 자리를 함께했다. 남용강 백월아 허정임. 올해 65세인 이들은 경남여고 35기 동기생으로, 청마 유치환이 교장으로 부임할 때 3학년이었다. 남 씨는 당시 학생회장이었고, 백 씨는 교장과 평교사로 13년간 모교에 근무했다. '문학소녀'였던 국어교사 출신인 허 씨는 청마를 가장 잘 기억했다. 그들은 "청마로부터 졸업장을 받은 두 기수 중 처음이었다는 사실이 우리 생애에 큰 행운이었다"며 소녀처럼 자랑했다.

 "여름에는 노타이로, 평소에는 베레모 비슷한 모자를 자주 쓰셨던 청마 선생님은 저희에게 '공부하라' 대신 '책을 많이 읽어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노벨문학상이 발표된 후 열린 어느 조회시간에선 수상자의 시를 낭송한 후 해설까지 해주신 로맨티스트였기도 했어요."

 허 씨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청마를 교장선생님이라기 보다 흠모의 대상으로 여겼다"며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교장실을 찾았다"고 기억했다.

 부임한 그해 겨울 청마는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를 발간했다. 책을 구입한 몇몇 학생이 교장실을 찾아 사인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후 교장실 앞은 한동안 쉬는 시간이면 길게 줄이 이어지는 진풍경이 일기도 했다.

 청마와 함께 찍은 사진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나무와 꽃을 관찰하며 유난히 교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청마는 학생들과 사진을 찍는 전속 모델이었다. 이날 허 씨와 백 씨는 오랫동안 고이 간직한 빛바랜 흑백 사진을 갖고 왔다. 백 씨는 "경여고 학생이라면 대부분 모자상 등 교내에서 청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갖고 있다"며 "그때 왜 팔짱을 못 끼고 찍었는지 아쉽다"며 활짝 웃었다.

 청마 선생을 두고 당시 조순(시인) 국어선생은 수업시간에 농담으로 이런 말씀을 자주 했다 한다. "저렇게 멋있는 분을 두고 연애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공부만 하는 이 둔한 녀석들아!" 47년이 지난 지금도 청마는 여전히 그들에겐 영원한 노스텔지어였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는 말년 객지 생활 10여 년을 빼놓고 대부분을 고향인 통영에서 보냈다. 물론 젊은 시절이었던 일제강점기 때 평양 만주 부산 등을 잠시 전전하기도 했지만 그의 삶의 뼈대는 누가 뭐라해도 통영이었다.

 통영에서 청마의 발자취는 통영중앙우체국에서 가장 많이 묻어난다. 마흔을 바라보던 청마는 아홉 살 연하의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1916~1976)에게 20여 년간 5000여 통의 연서를 보냈는데 5년여 이 우체국을 이용했다. 청마는 잘 나가는 시인 겸 통영여중 교사였으며, 경북 청도가 고향인 문재와 미모를 갖춘 정운은 남편과 사별 후 딸 하나를 둔 과부였다. 통영으로 시집 온 그의 언니집에 머물렀던 것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였다.

청마거리에 위치한 통영중앙우체국.

우체국 앞 우체통 옆엔 '행복' 시가 눈길을 끈다.


우체통 앞에서 보면 '시선집중'이라 적힌 옷집이 보인다.

길 끝나는 곳을 자세히 보면 초록색으로 적힌 '충무교회' 간판이 보인다.


 정운은 처음 수예점을 운영하다 이후 청마가 근무하던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다. 퇴근 후에도 수예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정운을 보기 위해 청마는 수예점이 훤히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 연서를 쓰고 또 썼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는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정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복)
 
'파도여 어쩌란 말이냐/파도여 어쩌란 말이냐/님은 뭍 같이 까딱 않는데/파도여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그리움)

 청마 사후 정운은 '탑'이란 시를 통해 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너는 저마치 가고/나는 여기 섰는데/손한번 흔들지 못하고/돌아선 하늘과 땅/애모는 사리로 맺어/푸른 돌로 굳어라'

 지금 청마거리엔 정운도 청마도 없지만 당시 그들이 머물렀던 흔적은 남아 있다. 정운이 운영한 수예점과 그의 언니가 운영하던 약방 '박애당'은 우체국에서 바로 보이는 옷가게 '시선집중'터다.

 또 청마의 집필장인 영산장과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가 운영하던 문화유치원(2000년 폐원)이 있던 충무교회는 우체국에서 세병관 방향으로 불과 50m 거리에 위 치해 있다. 도중 만나는 공영주차장은 두 사람이 가끔씩 찾던 옛 봉래극장 터다. 청마와 정운이 함께 근무한 통영여중은 충무교회에서 서문고개 방향으로 200m쯤 떨어진 붉은색 벽돌건물이다.

청마와 정운이 함께 근무했던 옛 통영여중 건물. 지금은 통영문화원이다.

청마거리 입구.


충무교회 내 옛 문화유치원.

충무교회 내 청마집필장인 영산장.

지금의 충무교회.


 통영시 문화예술과 김순철 문화예술담당은 "통영을 찾은 관광객 중 어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청마거리라고 답한다"고 말해 통영에서의 청마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청마문학관은 청마거리에서 차로 10분 거리. 이곳에서는 청마의 유품과 각종 문헌자료 3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정운이 펴낸 서간시집 '사랑하였으므로…'와 '이영도 평전' 등 정운에 관한 자료와 사진도 보인다.

청마문학관 내부.

청마문학관 외형.

청마문학관 내 청마 흉상.


'멀지 않아 저 또한 당신 곁에 당신 모셔…'

'거제도 둔덕골은/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조(父祖) 살으신 곳/적은 골안 다가 솟은 산방산 비탈 알로/몇 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거제시비공원 '바위'

거제시비공원 '낮달'

거제시비공원 내 청마흉상.


거제시비공원 '춘신(春信)'

거제시비공원 '동백꽃'


청마시비공원 시비와 흉상.

청마시비공원


 청마의 묘는 그의 시 '거제도 둔덕골'에서 밝힌 것처럼 선산인 거제 둔덕면 방하리 산방산 지전당골 산록에 위치해 있다. 묘지 입구 너른 터에는 청마 탄생 100주년 때인 지난 2008년 청마의 흉상과 함께 그의 역작 '행복' '깃발' '춘신(春信)' '행복' '바위' '낮달' '울릉도' '동백꽃' 시비가 너른 터를 동그랗게 에워싸고 있다.

 청마의 묘에 서면 남으로 둔덕만과 한산섬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묘를 감싸고 있는 송림 뒤로는 산방산이 솟아 있다. 지관이 아닐지라도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가까이로는 둔덕면 어귀 방조제 둑과 마을을 연결하는 청마교와 청마 고향시비동산이 보인다.

청마 부부묘. 승학산과 백운공원묘지 때의 묘비도 함께 모셔 놓았다.
청마 부모 합장묘.

청마 부친 유준수는 천주교 신자였다.

청마가 모친에게 바친 사모곡.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청마는 원래 부산 승학산 기슭에 묻힌 후 동아대 하단캠퍼스 확장공사 때인 1981년 경남 양산 백운공원묘지로 이장됐다. 이후 그가 쓴 '멀지 않아 저 또한 당신 곁에 당신 모셔…"라는 '사모곡'의 바람대로 지난 1997년 이곳으로 옮겨 모셔져 있다. "그토록 목숨같은 사랑인데 어찌하겠어요"라고 살아 생전 대범하게 청마와 정운의 관계를 인정한 조강지처 권재순 여사의 묘와 함께. 청마의 부모 묘는 바로 옆에 합장돼 있다. 그 앞에는 청마가 쓴 '사모곡'이 오석에 음각돼 있다.
경남 양산 백운공원묘지를 찾은 청마의 조강지처 권재순 여사와 청마의 벗 박노석 시인.
정운 이영도의 오빠인 시조시인 이호우의 경북 청도 시비를 찾은 문인들. 우측이 청마, 앞줄 가운데가 정운.

 청마 탄생 100주년에 맞춰 개관한 2층 규모의 청마기념관에는 청마의 사진, 지인들과 주고받았던 서신, 교원 발령증 등 250여 점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거제청마기념관

거제청마기념관 외형

거제청마기념관 앞 청마시비와 청마.


출생지와 친일 논란…그를 위한 변명
언제부턴가 친일문제와 출생지를 논하지 않고선 청마를 제대로 다룰 수 없게 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취재 도중에도 이를 여실히 느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청마와 관련,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 결과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어 팩트만을 간략하게 전한다.

 우선 친일 문제. 지난해 11월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홍난파 안익태 박정희 등 4389명을 친일 인물로 발표했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청마와 관련해선 공청회까지 열어 갑론을박 했지만 결국 청마는 친일 논란에서 빠졌다.

 다음은 출생지 문제. 지난 2004년 대법원 민사소송 상고심 재판부는 "청마의 출생지는 거제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사실상 통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청마의 세 딸이 거제 측 원고였으며, 피고는 통영시장이었다. 이와 관련, 남송우 부경대 국문과 교수는 "이 재판에서 원고는 '청마의 출생지가 통영시 태평동'이라고 적힌 통영 청마문학관의 청마 연보를 삭제해달라는 것이었다"며 "출생지 자체에 대한 재판은 아니었으며, 이는 법원에서 판결할 문제가 아니다"고 견해를 밝혔다.

탄생 102주년 청마의 발자취 상편(교장선생님 청마는 당시 여고생들의 '영원한 노스탤지어')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hung.kookje.co.kr/497


좌절의 길, 고민의 길, 사명의 길

엄밀히 말하면 이순신의 백의종군로는 크게 세 군데로 나뉜다.
우선 ▷경남 하동에서 권율 도원수부가 위치한 합천 초계(지금의 율곡면)까지는 좌절의 의미가 짙은 순수한 의미의 백의종군로가 되겠고 ▷칠전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초계에서 권율 도원수의 재가를 받아 정세를 살피기 위해 연안답사를 떠나는 길은 고민의 길 ▷연안답사 도중 진주 손경례 집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후 막중한 책임을 갖고 사천을 거쳐 전장으로 떠나는 길이 사명의 길이다. 산청~합천 구간은 갔던 길을 되돌아오기 때문에 중복되는 셈이다.

 
 백의종군로는 경남도와 (사)한국역사문화관광개발원이 고증을 통해 정비 중이지만 아직 미완성이다. 현재 산청 하동 진주 지역의 10㎞ 구간 정도가 도보로 탐방 가능하다. 해서, 현시점에서 백의종군로 답사의 들머리는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으로 불리는 남사마을.

 난중일기에 따르면 하동읍성에서 몸을 추스른 이순신 일행은 하동 옥종면 청수역을 거쳐 남사마을에 도착, 박호원의 집에 묵었다. 전통 한옥 30여 가구와 아름다운 돌담길이 인상적인 남사마을에서 박호원의 집은 걸어서 3분 거리. 조선시대 대사헌과 호조참판을 지낸 박호원의 집 입구엔 그의 재실인 '이사재'를 알리는 안내판과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지'라 새겨진 안내석과 나란히 서 있다. 지금이야 이곳은 남사 고가와 남사천이 내려다보이는 평화스러운 곳이지만 노모를 잃고 왜구에게 짓밟혀 황폐한 들녘을 바라보며 걷던 이순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늘도 이순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난중일기에는 이곳에 도착한 음력 6월 초하룻날은 비가 구슬프게 내렸다고 한다.

박호원 집에서 본 남사마을과 남사천.

박호원 집.


박호원의 집에서 하동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넘어 4㎞ 정도를 걸으면 하동과 진주의 경계에 인접한 산청의 금만마을에 닿는다. 논길과 밭둑을 번갈아 걷고, 완만한 경사를 오르며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이 구간은 대자연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걷기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금만마을에서 1005번 지방로를 따라 덕천강을 끼고 5㎞ 정도를 걸으면 진주의 가장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수곡면 원계마을 손경례의 집에 닿는다. 이곳은 이순신에게 있어 가장 드라마틱한 역사의 현장이다.

손경례 집 앞마당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 사적비'.

손경례 집.


 잠시 여기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자. 이 즈음은 원균의 수군이 칠전량에서 대패, 조선 수군의 존립마저 무너진 상태였다. 이로 인해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유린했고, 이 땅은 또다시 아비규환의 공포에 빠졌다. 선조는 그제야 이순신을 다시 찾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손경례의 집은 이순신이 선조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 교지를 받은 장소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백의종군이 끝나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 집 앞마당 한가운데에는 이를 알려주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 사적비'가 서 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이순신은 이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으니…'로 시작하는 장계를 선조에게 올리며 전의를 다지게 된다.


 이순신은 손경례의 집에서 음력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8일을 머무는 동안 집 앞 '진배미'라 불리는 너른 들판에서 비록 군장을 전혀 갖추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휘하 장병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결국 백의종군로의 여정은 이순신이 들렀던 시기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경남도에서 현재 일반인을 대상으로 소개하고 있는 백의종군로는 여기까지이다.

 경남도 김종임 관광진흥과 역사문화담당은 "앞으로 백의종군로는 손경례의 집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이순신이 주변 정세를 살피기 위해 오르내린 봉우리인 정개산성을 다녀온 후 덕천강을 가로질러 하동군 옥종면 문암리의 문암정(강정)으로 이을 것이며 이럴 경우 거리상으로는 4㎞ 정도가 더 추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문암정에서 이순신 장군의 유숙지였던 곤양읍성의 객사 문루였던 사천 응취루(14㎞)와 하동읍성(8㎞) 방향으로 백의종군로가 각각 정비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이러한 계획은 경남도가 이미 도로변 갈림길에 만들어놓은 백의종군로 안내석(아래 사진)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백의종군로는 아직 정비 중이라 나 홀로  걷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20명 이상 40명 단체일 경우 다음카페 '백의종군길'(http://cafe.daum.net/wgill)에 신청하면 (사)한국역사문화관광개발원(055-251-4517)이 차량 제공과 해설을 무료로 해준다. 오는 9월 5일에는 선착순 500명을 대상으로 진주 진성중학교에서 집결, 백의종군로 탐방을 실시한다.
 
■ 한산섬 수루 위에서 떠올린 충무공

경남 통영은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은 곳이다. 이 중 한산도는 섬 전체가 충무공의 유적지처럼 여겨지는 성지. 섬 바깥에서는 안쪽이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선 바깥 해안의 동태를 감시하기 쉽고 배를 숨기기에 용이한 천혜의 요새여서 충무공은 여수에 있던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겨와 3년8개월 동안 머물면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한산대첩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난중일기의 70% 정도가 이곳에서 쓰여졌다.

 흔히 장삼이사들은 "뭐 특별히 볼 게 있나"라고 하겠지만 하은주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꼼꼼히 살펴보면 작은 감동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새 단장도 해놓았다. 지난해 제승당으로 가는 1㎞쯤 되는 해안산책로는 걷기 편한 황톳길로 바뀌었고, 대첩문 입구엔 2명의 수군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어정쩡한 미색으로 덧칠해놓은 제승당 건물도 전통 단청으로 깔끔하게 해놓았다. 경내에는 제승당 한산정 충무사 수루 등 여러 건물이 있으며 모두 통틀어 제승당으로 불린다.

대첩문 입구의 수군 조형물.

제승당 가는 해안산책로.


제승당 활터.

제승당. 난중일기의 70%가 여기서 쓰여졌다.


수루.

한산도 앞바다 거북선 등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에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끓나니'.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읊조려 보았을 그 유명한 우국충정의 '한산도가'의 배경인 수루(戍樓)에서 바라보는 한산도 앞바다는 410여 년 전 붉은 피로 물든 전장이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평화롭고 잔잔하다.

 제승당 옆으로 내려서면 조선 수군이 활쏘기를 연마했던 활터가 나온다. 전시에도 특별 무과시험이 치러졌던 곳이다. 사대가 바다 건너 145m 지점에 있다. 실제 해전에서 적선과의 사정거리를 측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전해온다.

 통영에 오면 놓쳐선 안 될 곳이 한 곳 있다. 지난 2008년 문을 연 거북선 문화재 연구소(055-648-7977)이다. 일몰이 아름다운 산양해안도로 입구, 폐교가 돼 버린 산양초등학교 회양분교를 리모델링했다.

거북선 문화재연구소 안광일 소장

김종임 경남도 관광진흥과 역사문화담당 사무관

거북선 문화재 연구소 전경


 한마디로 거북선 복원 작업의 산실이자 거북선에 대한 모든 것을 보고, 만들며 체험하는 곳이다. 체험관에선 안광일 소장과 전문강사의 도움으로 거북선 모형을 만들어볼 수 있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상설문화마당 프로그램' 지원금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무료로 참가할 수 있다. 문의 통영시 관광진흥과(055-650-4532)
 한편 오는 11~15일 통영 일원에선 충무공의 구국정신을 기리는 한산대첩축제가 열린다.

남해서 노량해전 입체영상물 감상

이순신 영상관


돔형 입체영상관 내부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읍 방향으로 가다 보면 도로 우측에 노량해전에서 도망가던 적선을 추격하다 적의 총탄을 맞고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국한 충무공을 임시로 모셔놓은 이락사(李落祠)가 있다. 글자 그대로 '이 충무공의 목숨이 떨어진 곳'이다. '관음포 이 충무공 전몰유허'로 불리는 이곳은 그 동안 십중팔구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락사 바로 옆에 거북선 모양의 제법 큰 목조 건물인 '이순신 영상관'이 지난 2008년 개관했기 때문이다. 150억 원을 투입해 최첨단 영상관과 전시관을 꾸며 놓았다.

 138석의 관람석을 갖춘 돔형 입체영상관은 벽면과 지붕 전체가 스크린이어서 기존의 평면 스크린에서의 입체 영상보다 훨씬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상영작은 1598년 11월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의 격전을 보여준다. 러닝타임 20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어른이 봐도 재밌다. 서울 곳곳에서 대여 문의가 왔지만 경남도와 남해군이 "직접 와서 봐라"고 큰소리를 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 이순신 장군이 탄 배의 깃발에 '충무공'이라는 문구가 보인 것이 옥에 티였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이락사 뒤 송림길을 500m쯤 걸으면 바다가 시원하게 열리는 2층 누각인 첨망대가 언덕 끝자락에 서 있다.

 눈앞에 보이는 지금의 관음포 앞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해 치열했던 노량해전의 격전지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렵다.

첨망대에서 본 관암포 앞바다.


이락사 첨망대.

이락사로 안내하는 송림길.


 
충무공의 발자취 좇아 구국의 길을 떠나다(1)편은 여길(http://hung.kookje.co.kr/491)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사)한국역사문화관광개발원과 경남도가 함께 주관한 이순신 백의종군로 탐방에 참여한 시민들.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한산도 제승당 그리고 남해 이순신 영상관

 
 전란 중인 정유년 1597년 음력 4월 초하룻날 투옥 중 고문을 견디고 의금부 문을 절뚝거리며 나선 한 초로의 늙은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순신. 나이는 53세였다.

 한산대첩을 비롯해 출정하는 전투마다 왜군을 초토화한 전직 삼도수군통제사였지만 그는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명으로 투옥된 지 28일 만에 경남 합천 권율 장군의 도원수부에서 백의종군할 것을 명받고 풀려난 것이다.

 많은 전공(戰功) 덕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에게는 치욕이었다. 상한 육신과 땅에 떨어진 명예 그리고 좌절감.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옥문을 나서며 다시 쓰기 시작한 난중일기엔 당시 그날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정으로 권하는 여러 지인들의 위로주를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해 밤새 땀이 몸을 적셨다."

 백의종군할 합천으로의 길고 긴 고된 여정 중 이순신은 노모의 부고를 접하고 잠시 고향 땅 아산에 들르지만 전시 중인 데다 죄인이라는 이유로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황망히 길을 재촉해야 했다.

 이순신이 걸은 백의종군로를 당시의 것으로 완벽하게 고증할 수 없지만 난중일기나 고문헌 등을 종합해볼 때 한양~수원~천안~공주~논산~여산~전주~남원~구례~하동~산청을 거쳐 지금의 합천 율곡면인 초계 땅에 다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초계에서 40여 일 백의종군하며 머물던 이순신은 원균의 칠천량해전 대패 소식을 듣고 권율 도원수의 재가를 받아 왔던 길인 산청 하동 사천으로 정세를 살펴보기 위해 연안 답사를 나선다. 도중 그는 진주에 이르러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돼 4개월여에 걸친 백의종군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의 발길이 스쳐 지나갔던 백의종군로는 410여 년의 긴 세월 탓에 속절없이 변했다. 그러나 그가 잠시 머문 초가나 돌담, 나룻배를 타고 건넜던 강, 후일을 도모하며 형세를 살폈던 산성 등이 걷기 열풍에 힘입어 이순신의 자취를 좇는 역사의 길로 거듭나고 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로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10곳 중 역사적인 상징성이 높은 역사의 길에 선정됐기 때문이다.
 경남도 관광진흥과 김종임 역사문화담당은 "백의종군로의 경남 구간인 하동~합천 161㎞ 중 우선 산청 단성면에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진주 손경례 집까지 도보로 탐방 가능한 10㎞ 정도를 올 상반기 마무리했으며, 손경례 집에서 하동읍성까지의 나머지 10㎞ 구간은 올 연말까지 고증을 거쳐 끝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 여행은 이순신 장군과 백의종군로를 테마로 잡았다. 백의종군로가 내륙인 데다 지금 휴가철이 절정에 이르고 있는 점을 감안,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을 한산대첩 당시의 본영인 통영 한산도와 그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이 펼쳐졌던 남해 관음포 앞바다와 이락사(李落祠)도 함께 찾았다.

경남 통영 한산도 제승당의 수루에서 바라본 한산도 앞바다는 평온하기 그지 없다. 410여 년전 누가 이곳이 피로 물든 전장이라 생각하겠는가.

이락사는 이제 남해대교를 건너 잠시 스쳐가는 곳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는 거북선 모양의 복합미디어 전시관인 '이순신 영상관'이 새로 생겨  노량해전을 주제로 한 입체영상물을 볼 수 있다. 학익진 전법으로 왜군을 수장한 한산도 앞바다에는 요트와 여객선이 평화롭게 푸른 바다를 가르고 있다.

 통영에는 '이순신 밥상'이란 게 있다. 경남도가 이순신 장군과 우리 수군이 먹었던 77가지 음식을 난중일기와 고문헌 등을 통해 복원한 음식이다. 일본 시마네현에 가면 400년 전 사무라이들이 먹던 '타이메시'보다 훨씬 운치가 있다. 음식 또한 경쟁력 있는 관광상품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충무공의 발자취 좇아 구국의 길을 떠나다(2)편은 여길(http://hung.kookje.co.kr/492)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남해 금산과 은모래비치(옛 상주해수욕장)의 하모니
은모래비치(옛 상주해수욕장)와 금산 들머리 불과 2㎞ 거리
기암괴석 전시장 금산서 본 초승달 모양의 은모래비치 환상적
실안해안도로, 물미해안도로 가는 길도 멋진 드라이브 코스
국내 4대 관음기도 도량 중 하나 보리암, 기도발 잘 받아
미조항 30년 전통의 삼현식당 멸치회, 밥 비벼 먹으면 일품


기암괴석의 전시장인 금산에서 내려다보면 초승달 모양의 본 은모래비치(옛 상주해수욕장)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산에도 가고 싶고 바다도 가고 싶다. 아쉽게도 휴가는 길지 않다.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못 하다. 아! 올해도 그냥 평범하게 여름휴가를 보내야 하는가.

 산행 후 뒤풀이로 온몸을 바다에 풍덩 던져버릴 수 있는 멋진 곳이 없을까.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과 장산, 광안리 해수욕장과 황령산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워낙 인파가 몰려 엄두가 안 난다. 이들 장소를 선택해도 한 번 움직이는 데 사실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불가.

 경남 남해에 가면 그런 코스가 하나 있다. 한려해상 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금산과 은모래비치(옛 상주해수욕장). 장삼이사들은 금산과 은모래비치는 각각 알고 있지만 이를 결부시켜 원스톱 휴가지로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 은모래비치에서 금산 들머리까지는 불과 2㎞. 백사장에서 고개를 돌리면 금산의 기암괴석이 병품처럼 감싸고 있고, 금산 보리암에서 내려다보면 초승달 모양의 은모래비치가 펼쳐진다.

 부산에서 가는 길도 즐겁다. 내로라하는 해안 드라이브 코스가 기다린다. 각각 남해대교와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야 하지만 후자를 권하고 싶다. 가까운 데다 풍광이 훨씬 아름답기 때문이다.

 남해고속도로 사천IC로 나와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기 전 통과하는 1003번 지방도인 실안해안도로는 알려지지 않은 멋진 드라이브 코스다. 전국의 이름 있는 유명 드라이브 코스에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다.

 창선·삼천포대교를 지나면 물미해안도로라 불리는 3번 국도가 기다린다. 눈 호사의 연속이다.

 전통 멸치어업법인 죽방렴에 이어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고 고기떼를 유인하는 300년 된 천연기념물인 방조어부림, 이를 멀리서 확인할 수 있는 독일마을, 그리고 폐교를 리모델링한 이국적 외관의 해오름예술촌을 연이어 만난다. 예술촌에는 1만5000점에 달하는 민속품과 골동품을 선보이는 전시장과 미술창작실 목공예실, 갤러리 등이 있다. 입장료는 없고 개별 프로그램 참가비를 받는다.

 물미해안도로의 종점은 남해 최대 어항이자 미항인 미조항.

 미조도와 범섬 죽암도 쌀섬 등 조그만 섬이 점점이 떠있으며 등대 사이로 오가는 조그만 어선들이 평화롭다. 어항 주변에 식당과 숙박시설이 많아 나그네들은 흔히 이곳에서 1박을 한다.
 미조에선 멸치회를 빠뜨리지 말자. 남해수협 공판장 인근 30년 전통의 삼현식당(055-867-6498)이 특히 잘한다고 소문났다. 큰 대접에 밥과 막걸리식초로 담근 초장을 넣고 쓱쓱 비벼 간장게장과 함께 먹으면 별미다. 멸치회(소) 멸치쌈밥 각 2만 원. 성게국 8000원.

삼현식당 '멸치회'.


 미조에서 남해안 최대 해수욕장인 은모래비치까지는 5㎞ 거리.
 눈앞에는 거친 파도를 막아줄 듯한 승치도와 삼여도 목섬이 해수욕장을 감싸고 있으며, 해안에는 은빛 백사장과 울창한 송림이 한데 어울려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킨다. 은모래비치는 특히 파도가 거의 없고 수심이 아주 얕아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찾으면 안성맞춤이다.

때이른 해수욕을 즐기는 연인의 모습.

이동 중 도로변에서 바라본 은모래비치.


에메랄드 물빛이 무척 아름다운 은모래비치. 뒤로 보이는 산이 금산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장군이 명명한 금산(705m)은 '금산 38경'이 있을 정도로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8부 능선부터 절경을 이루고 있는 데다 은모래비치와 한려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산이다.

 정문영(44) 남해문화유산해설사는 "예부터 남해안에 네 명의 해상 신선(해상사호·海上四晧)가 있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금산일 가능성이 크다"며 "그 증거가 바로 금산 보리암 인근에 위치한 사선대"라고 말했다.

 금산의 들머리는 금산매표소. 보리암 가는 길 도로변 우측에 넓은 주차장이 있어 찾기는 아주 쉽다. 여기서 거대한 자연조각품인 쌍홍문까지는 넉넉잡아 1시간. 쌍홍문 입구 왼쪽에는 늘 푸른 덩굴식물인 이끼 낀 송악의 자태가 장관인 장군암이 보초를 서고 있다. 사바세계를 벗어난다는 의미의 해탈문인 쌍홍문을 통과하면 보리암으로 이어진다. 보리암에선 은모래비치의 장관을 빠뜨리지 말자. 극락전 앞이 최고의 조망 포인트다. 자신하건데 근래에 본 조망 중 최고일 것임을 확신한다.

 보리암은 낙산사 홍련암, 강화도 보문사, 여수 향일암과 함께 국내 4대 기도도량. 기도발이 잘 받는다고 알려져 있어 사시사철 신도들이 찾는다. 또 금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금산산장(055-862-6060)이 있어 하루쯤 묶으며 신선놀음을 할 수도 있다. 3만 원.

 등산이 힘들다면 은모래비치에서 차로 보리암 제2주차장까지 가서 산책로를 15분쯤 걸으면 보리암에 다다를 수 있다.

-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 날 맞아 창녕 불교문화재 순례

창녕 관룡사 용선대는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 반야용선을 의미해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전국에서 수많은 불자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유홍준 교수는 문화재와 자연경관이 어우러지는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라고 치켜 세웠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는 말이 있지요. 의역하자면 '진리를 깨닫는 지혜(반야)의 세계로 향하는, 용이 이끄는 배(용선)'쯤 되겠지요. 불가에서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의미하지요.

절집 법당은 사부대중이 부처님과 함께 타고 가는 배의 선실과 같은 곳이지요. 법당 건물이나 축대 및 계단 등에 조각해 놓은 용머리와 용꼬리, 거북 게 등은 이 법당이 반야용선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법당에서의 여러 행위들은 바로 피안의 극락정토에 다다르기 위한 작은 정성인 셈이죠.

우리나라 절집은 표현 양식은 다르지만 피안의 세계를 향하는 반야용선의 형상을 한 곳이 상당수 있습니다.   
 
영축산 통도사나 월악산 신륵사 극락전에는 중생의 간절한 염원을 그린 반야용선 벽화가 있고,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천장에는 용모양의 나무 배에 인형 하나가 줄에 의지해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요. 반야용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린 이 동자를 악착동자라고 부르지요. 혼자 도 닦아선 극락정토로 갈 능력은 안 되고, 하지만 가고는 싶은 동자의 갸륵하고도 솔직한 노력의 외적 표현이라 보는 이의 마음을 새삼 다잡게 해주고 있지요.

경남 청도 와인터널 바로 위에 위치한 조그만 천년고찰 대적사 극락전 화강암 기단부에는 거북과 게 문양이 돋을새김돼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거북 한 마리가 있는 힘을 다해 기둥의 모서리를 꽉 잡고 법당을 향해 기어오르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이는 기단부가 바다를, 법당이 중생을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지혜의 반야용선임을 의미하고 있지요.

전남 해남 달마산 미황사 대웅전은 그 자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반야용선으로 알려져 있지요. 대웅전을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에는 고해를 헤치고 나아가는 반야용선이란 의미로 게와 거북이 새겨져 있지요. 인도에서 경전과 부처상을 실은 배 한 척이 달마산 포구 아래 닿았다는 창건 설화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합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땅에서 반야용선의 백미는 창녕 화왕산 관룡사 용선대를 으뜸으로 치지요. 용선대는 용의 등줄기 같은 관룡산의 화강암 줄기가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다 문득 멈춘 절벽으로, 멀리서 보면 마치 용 모양의 뱃머리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지요. 이 용선대의 펑퍼짐한 자리에 3m 높이의 석조여래좌상이 사바세계를 굽어보며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지요. 벼랑 끝에 세워진 불상과 그 앞에서 예불을 드리는 한 부부의 간절한 기도 모습을 바라보면 큰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는 불가의 반야용선에 다름 아님을 확인할 수 있지요. 1300년 전 용선대의 이 돌부처를 조각한 불심 가득한 이름 없는 석공의 안목에 경의감마저 들더군요.

용선대와 관련, 우스갯소리 하나 할까요. 용선대가 극락 가는 배, 다시 말해 반야용선의 형상이라는 말을 들은 한 학생이 용선대 난간 앞에서 영화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가 뱃머리에서 두 팔을 벌리는 장면을 따라하면서 용선대 돌부처는 졸지에 새로운 별명을 하나 얻었다네요. '타이타닉 부처님'으로.

오늘은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산서 차로 80분가량 걸리는 관룡사를 찾아보면 어떨는지요. 용선대는 절에서 불과 480m, 20분 정도 걸려 노인뿐 아니라 아이들도 쉽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용선대 한 번 오르고 극락정토행 '입장권'을 마음속으로 예약할 수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성불하십시요.

경남 창원서 온 불자들이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있다.

- 불심 넘치는 자비의 땅 '경남의 경주'

시대별로 다양한 불교문화재 산재
생태 보고 우포늪과 함께 수만 년 공존한 역사의 땅
천년고찰 관룡사 소박하지만 독특한 기품
용선대 돌부처 사바세계 굽어보며 중생들 인도
비구니승의 집념으로 국보로 빛 본 술정리 동삼층석탑
매일 오후 7시 지역 주민들과 매일 밤 탑돌이



우포늪과 화왕산 그리고 부곡온천이 우선 떠오르는 경남 창녕은 흔히 '제2의 경주'라 불린다. 문화재와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역사의 땅'이기 때문이다.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신라 진흥왕 척경비 등 국보 2점,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등 보물 9점 등 국가지정문화재 21점과 도지정문화재 53점, 향토문화재 32점에 천연기념물 5점까지 포함하면 전국 230개 지방자치단체 중 '톱10'에 들 만큼 '문화재의 보고'이다.
창녕향토사연구회 김량한 부회장은 시대적 스펙트럼의 다양성을 예로 들며 창녕이 '제2의 경주'에 비유된다는 사실에 손사래를 쳤다. 신라에 거의 한정된 경주보다 낙동강이 굽이쳐 기름진 평화를 자양분으로 선사시대부터 가야 신라 고려 조선 근세에 이르기까지 독창적인 문화재와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창녕이 오히려 흥미롭고 역사적으로 가치가 더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남의 경주'라는 표현이 잘 어울릴 듯하다는 것이 김 부회장의 주장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창녕의 수많은 문화재 중 놓쳐서는 안 될 불교문화재를 둘러봤다.

동쪽으로 돌아앉은 관룡사 용선대 돌부처

관룡사 석장승. 창녕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천년고찰 관룡사 탐방은 명물 석장승부터 시작된다. 이웃한 화왕산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광경을 보고 원효대사가 명명한 관룡사 어귀에는 2m쯤 되는 석장승 2기가 서 있다. 조선의 대표적 석장승으로 지금은 창녕의 아이콘 역할을 하고 있다. 왕방울 눈, 주먹 코, 튀어나온 송곳니 등 그 표정이 우스꽝스럽지만 성스러운 공간임을 일러주는 절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지난 2003년 태풍 '매미' 때 유실 후 도난당했지만 한 달 만에 충남 홍성에서 발견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돌문(바로 아래 사진)도 놓치지 말자. 돌을 쌓아 기둥으로 삼고 그 위에 장대석 두 장을 얹은 뒤 기와를 올린사람 하나 드나들 수 있는 조그만 문이다.

관룡사만의 독특한 산문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노란 염주괴불주머니와 스님의 머리를 빼닮은 불두화라 불리는 수국이 반긴다.
 절집은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팔작지붕 대웅전과 그 너머로 보이는 병풍바위 구룡산의 조화는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그 기품은 반야용선의 전형 미황사 대웅전을 품은 해남 달마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반면 처마가 낮은 약사전 안의 석불은 눈높이가 탐방객과 맞다. 약사전 앞마당의 삼층석탑도 손을 뻗으면 탑 머리를 만질 수 있을 만큼 앙증맞다. 그래서 정감이 더 간다. 약사전은 임진왜란 때도 소실되지 않아 이 절에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를 간직한 전각이다. 관룡사를 품은 관룡산의 참혈이 이곳에 수렴됐기 때문이란다. 그만큼 앉은 터가 좋다는 의미이다.
 관룡사를 찾으면 빠뜨려선 안 될 곳이 바로 용선대다. 사진으로 보면 까마득한 절벽 위에 부처님이 앉아 있어 꽤 멀 것 같지만 절에서 480m만 걸으면 만날 수 있다.
 용선대가 반야용선의 형상임을 확인하려면 용선대 바로 위 바위에 오르자. 암반 전체가 하나의 배로 보인다. 용선대가 불국토로 향하는 배이고, 벼랑 끝에서 사바세계를 굽어보는 석조여래좌상이 선장인 셈이다. 유홍준(명지대) 교수는 구룡산 병풍바위를 광배로 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의 모습을 두고 황매산을 배경으로 한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과 함께 문화재와 자연경관이 어우러지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치켜세웠다.

관룡산 용선대 전경. 건너편에 보이는 산이 영취산이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될 한 가지. 석조여래좌상은 관룡사 방향, 다시 말해 동쪽으로 돌아앉아 있다. 창녕향토사연구회 김량한 부회장은 "중생을 위한다는 의미의 반야용선의 돌부처는 (옥천리) 마을이 위치한 남쪽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는 배산임수의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것.
 이를 설명하기 위해 김 부회장은 현재 석불의 좌대와 좌대를 놓기 위해 깎은 바닥의 길이가 일치하지 않는다며(우측 사진), 석불의 좌대를 남쪽으로 90도 돌리면

 석불의 좌대와 깎인 부분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돌부처 목 부분의 시멘트로 덧씌운 흔적도 결국 불두를 돌리는 과정에서 야기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럼 누가 돌부처를 동쪽으로 돌려 놓았을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소행이란 설도 있고, 오래전 관룡사에서 절쪽으로 돌려놓았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하나 아직 확인된 것이 없다고 김 부회장은 말했다.
 중요한 것은 용선대에 오르면 극락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에 승선하는 의미이고, 또 용선대에서 기도하면 반드시 한 가지의 소원은 들어준다는 데 있지 않을까.

용선대로 가는 산길에서 올려다본 석조여래좌상.

관룡산 사천왕문 옆에서 본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용선대에서 본 병풍바위라 불리는 구룡산 전경.

용선대에서 본 화왕산 배바위(왼쪽)과 화왕산(정상은 아니다).



국보 34호 술정리 동삼층석탑 지킴이 일선 혜일 스님
국보 제34호 술정리 동삼층석탑 지킴이 일선 혜일 스님(맨 앞)이 지난해 부처님 오신 날 때 전국의 불자들과 함께 탑돌이를 하고 있다. 스님은 또 지역 주민들과 매일 오후 7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탑돌이를 한다.

불국사 석가탑과 비교될 만큼 아름다운 국보 34호 술정리 동삼층석탑(이하 동탑)은 오래전 국보로 지정됐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 담요와 시레기 등이 널려 있었고 주변에는 개똥과 술병 담배꽁초 등이 쌓인 방치된 탑이었다. 국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 비구니 스님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이제 창녕을 넘어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탑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사연은 이랬다. 제주에서 출가한 일선 스님(아래 사진)은 요양차 창녕으로 와 수행하던 중 지난 1998년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스님에게 법명을 혜일로 바꾸라 명하고 인도한 곳이 동탑이었다. 새벽에 잠을 깬 스님이 꿈에서 부처님이 인도한 곳으로 찾아가보니 실제로 동탑이 있었다.

 그때부터 스님은 동탑 앞의 조그만 임시거처인 '국제 제34호 동탑관리소'(055-533-9921)에 머물면서 방치된 탑을 관리하며 주민들을 설득하는 등 동탑 지킴이를 자임했다. 주민들로부터 '이상한 스님'이란 말을 들으며 2년 정도 묵묵히 동탑을 관리하던 스님은 2001년 우연히 동탑 옆 비석에 새겨진 희미한 '국보'라는 한자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후 스님은 창녕문화원과 군청 등에서 동탑에 대한 문헌을 수집하던 중 동탑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용구가 발견됐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문의했지만 '발견 기록은 있지만 보관 기록은 없다'는 성의없는 답변만 받았다. 참다 못한 스님은 발로 뛰었다. 문화재청의 문화재지킴이 교육에 참여, 국보인 동탑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며 열변을 토하는 한편 청와대에 민원을 넣고, 국립박물관을 찾아 10일간 아예 박물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자료를 뒤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박물관과 문화재청이 본격 수소문했고, 그 결과 박물관 수장고에서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사리용구가 발견됐다. 1965년 동탑을 해체 복원한 후 38년 만인 2003년 불사리장엄구(부처님 사리를 넣은 함) 등 탑 안의 유물이 비로소 햇빛을 본 것이다.
 이때부터 동탑 보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문화재 보호비로 6억8000만 원이 내려오고 예산 타령만 하던 군도 뒤늦게 발벗고 나섰다. 주변 부지도 매입, 지금까지 탑 주변의 100여 가구를 이주시켰다. 차량 통행을 우회시키고 탑 주변의 보기 흉한 전깃줄도 말끔하게 정리했다. 1300년간 방치됐던 동탑이 한 스님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엄청난 성과를 일궈낸 것이다.
 혜일 스님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고 했다. 석가탑에서 발견된 사리함 등이 석가탑과 함께 진작 국보로 지정됐지만 동탑에서 뒤늦게 햇빛을 본 사리병 등 유물의 문화재 지정에는 문화재청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이를 위해 창녕향토사연구회 측과 함께 지금도 문화재 지정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편조대사 신돈의 발자취와 삼성암 보광전 내 석간수샘

관룡사 팻말 건너편이 옥천사진 입구다.

깨진 흔적을 보면 인위적으로 훼손했음을 알 수 있다.


창녕은 고려 공민왕 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개혁에 앞장섰던 편조대사 신돈이 태어나 출가한 곳. 관룡사 입구 도로 우측 편에 출가한 곳인 옥천사지가 있다. 절 입구 간이매점 옆 '관룡사 1.2㎞' 팻말 우측 숲 속으로 들어서면 절 기초석과 탑의 면석, 부도 하대석 등이 널브러져 있어 신돈의 실각과 함께 인위적으로 훼손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돈이 태어난 일미사지는 옥천저수지 아래 일매교를 건너 배롱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문암정을 지나 구현산 기슭 죽림에 둘러싸여 있다. 일미사지 아래에는 펜션이 한창 공사 중이다. 이곳 대나무 숲 주변에는 석축과 두터운 기와편들이 발견된다. 또 커다란 석조와 멧돌이 있었지만 3개월 전 창녕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일미사지 기와 파편.

일미사지서 발견된 석조(왼쪽)와 멧돌(오른쪽). 창녕박물관에 있다.

일미사지.


통도사의 말사로서, 울산의 문수암 미타암과 함께 기도 효험이 빼어난 도량으로 알려져 있는 삼성암은 법당인 보광전 아래 특이하게 석간수샘이 있다. 가뭄 때도 절대 마르지 않는 이 샘은 실제 바닥 일부를 걷으면 3m쯤 아래 있다. 절에선 샘을 깨끗이 청소한 후 대리석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보광전 앞 수도꼭지는 이 물을 빼올린 것으로 신비의 석간수로 알려져 탐방객들은 빠뜨리지 않고 찾는다.

삼성암 보광전 내 석간수샘. 마루바닥 일부를 걷으면 볼 수 있다.

석간수샘을 빼올린 수도꼭지.


이 밖에 송현동 고분군 옆에 위치한 송현동 석불좌상과 고암면 창녕자연휴양림 내 감리 마애여래입상 또한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다.


창녕 맛집 둘

'화왕산 된장 청국장마을'-각종 나물에 된장 넣은 비빔밥 일품
'가현한우생고기'- 우포늪 인동초 먹인 한우 가격도 맛도 그저그만

'금강산도 식후경'. 창녕만의 맛은 창녕 불교문화재 순례의 화룡점정이다. 관룡사 입구 옥천저수지 인근에 위치한 '화왕산 된장·청국장마을'(055-521-3337)은 직접 메주를 띄워 담근 청국장과 된장 등을 맛볼 수 있다. 주변의 많은 청국장집 중 원조가 바로 이 집이다. 보글보글 뚝배기에 끓여내온 청국장과 고사리 취나무 시레기 등을 넣고 밥을 비벼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가격은 5000원. 정구지와 팽이버섯을 곁들인 오리불고기 또한 별미 중 별미이다. 2만~3만 원.

창녕읍에서는 또 우포 인동초를 먹인 한우가 유명하다. '가현한우생고기(055-532-9259)는 창녕지역 도축장((주)영남엘피시)과 함께 있어 싱싱한 1등급 한우를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양 많고 싸고 맛있는' 집이다. 한우 모둠(600g)이 3만5000원. 10명이 찾아 고기와 함께 식사를 해도 13만 원 안팎으로 부담없이 한우를 즐길 수 있다.



    함양 지리산 조망공원에 서면 지리산 주능선이 일렬 횡대로 시원하게 펼쳐진다. 왼쪽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에서 오른쪽 반야봉까지 확인된다.


C 형!
얼마 전 '세상사가 왜 이리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을까'라는 저의 신세타령에 형은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렇게 말씀하셨죠. "지리산엘 한 번 다녀와 봐. 달포 전 잠시 다녀왔는데 한결 나아졌어. 옛말 틀린 게 없더라고. 좋은 약, 좋은 음식 다 필요없어." 그러면서 형은 이렇게 덧붙였죠. "웬만하면 단풍철은 피해. 만산홍엽의 열병을 앓고 있는 지리의 풍광은 천하일색이지만 단풍철 행락객들의 분별없는 행동이 더 스트레스를 받게 하지."

지난 9월 말부터 설악을 한껏 물들이고 하루 25㎞의 속도로 숨 가쁘게 남하한 단풍이 이제 지리에서 종말을 고하고 남쪽 바다를 향해 치닫고 있더군요. 단풍이 끝난 지리는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참 잘 왔다는 생각이, 아니 형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잘 따랐다는 생각이 뼈에 사무치도록 느껴지더군요. 아마도 눈꽃 산행이 본격 시작되는 내달 초순까지는 이런 분위기가 지속될 것 같습니다.

 지리산은 과연 크고 깊고 넓고 길었습니다. 장중하며 초연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늘이 울어도 천왕봉은 울지 않는다'라는 남명 선생의 시구가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시인 정호승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조계산) 선암사로 가라'고 했지만 저는 지리산으로 가보라고 감히 권하고 싶습니다.

C 형! 
저는 이번에 함양 땅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아시다시피 백두대간의 남쪽 관문인 지리산은 경남 함양 산청 하동, 전북 남원, 전남 구례 등 3도 5개 시·군에 걸쳐 있습니다. 5개 지자체 중 굳이 함양을 택한 이유는 지리산을 가장 잘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25.5㎞의 유장한 흐름의 주능선이 '한 일(一)' 자로 한눈에 펼쳐지는 곳이 바로 이곳뿐이기 때문입니다. 곁들여 함양(咸陽)은 글자 그대로 볕을 머금은 듯 포근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초겨울이라 시기적으로 딱 맞지 않습니까.

우선 금대산 금대암과 삼정산 상무주암을 찾았습니다. 서쪽으론 백두대간 마루금이 긴 병풍을 치고 있고, 남북으로 각각 지리와 덕유가 첩첩이 벽을 두르고 있는 함양 땅에서 사실 금대산과 삼정산은 명함 내놓기가 좀 쑥스럽지요. 하지만 지리산 조망과 관련해선 최고의 '지리산 전망대'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흔히 하늘이 열리는 전망대로 불리지요. 1시간 채 안 되는 산행으로 암자를 찾아 사색에 잠기면서 지리를 품 안에 넣을 수 있는 이 기분, 안 가본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희열이지요. 이동 중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역시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는 벽송사와 서암정사도 들렀습니다. 두 암자만큼은 못 하지만 역시 지리의 넓은 품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성과도 있었습니다. 최치원의 애민사상이 담긴 함양의 대표적 숲인 상림과 함양군청에서도 뜻밖에 지리 주능선이 보였습니다. 결국 함양은 발길 닿는 곳이 대부분 지리산 전망대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리산보다 함양 땅에 대해 엉뚱한 이야기만 지껄였네요.
때마침 얼마 전 겨울을 재촉하는 단비가 내려 이번 주말이면 낙엽융단길을 밟고 지리산 언저리를 걸으며 지리를 맘껏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앙상한 가지는 너무 을씨년스럽지 않을까요. 약간의 낙엽비는 한 번 맞아봐야 하는데 걱정입니다.

C 형!
내년에는 부디 이 길을 함께 걸으며 예전의 그 기분을 다시 느끼도록 해봅시다. 그땐 흑돼지와 소주도 꼭 함께 합시다.

지리산 굽어보던 수도승의 깨달음 "산이 곧 부처로다"

예부터 지리산 천왕봉은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라 불렸다.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25.5㎞의 주능선에는 해발 1500m 이상의 고봉만 10개나 되고 1000m 이상급은 20여 개 그리고 85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어깨를 견주며 하늘금을 가르고 있다. 그 모습은 과히 상상을 초월한다.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히말라야 칼라파트라에서 바라보는 에베레스트나 카라코람 히말라야 콩코르디아에서 조망되는 K2의 그것과 감흥은 별 차이가 없다. 오히려 손에 잡힐 듯 일렬횡대로 펼쳐지는 지리의 모습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따사롭다.

지리산이 앞마당, 삼정산 상무주암



  상무주암까지는 차가 들어가지 못한다. 넉넉잡아 40, 50분 정도는 걸어야 한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이다.

들머리는 영원사 인근. 함양 땅 최남단 마천면에서 백무동 방향으로 가다 보면 지리산 자연휴양림 또는 영원사로 가는 길이 도중에 열려 있다. 삼정산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됐다는 산 아래 양정, 음정, 하정마을 사이로 울퉁불퉁한 급경사 포장로를 힘겹게 오르면 곡각 지점에 샘터가 눈에 띈다. 장터목에서 천왕봉까지 보이는 자리다.

영원사는 여기서 1.5㎞ 정도 더 가야 된다. 방법은 두 가지. 영원사까지 가서 해우소 뒤로 능선을 타고 상무주로 가는 방법이 하나요, 샘터 우측 전봇대 옆으로 열린 지름길로 치고 오르는 방법이 다른 하나다. 후자는 약간 경사가 심해 땀깨나 흘려야 된다. 그렇다고 악명 높은 된비알은 결코 아니다.

초겨울 암자를 향해 나홀로 걷는 산길은 사바세계에서 느껴보지 못한 묘한 매력이 있다. 타인을 배려할 필요도 없고, 기댈 언덕도 없기 때문에 가식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저 벅찬 호흡과 흘리는 땀 그리고 물 한 모금이면 족하다. 무엇보다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 무한대로 열려 있어 자유롭다.

물 마른 샘터도 지나고 지그재그 흙길도 요리조리 오른다. 간혹 나무에 걸려 있는 앙증맞은 '상무주길' 안내판은 무작정 오르는 나그네를 안심시켜 준다.   
 
해발 1100m쯤에 위치한 상무주는 고려 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창건해 애오라지 공부에만 매진해 대오한 곳이다. 경치가 그윽하고 조용하기가 천하제일이라 참선하기 좋은 곳이다

전각 하나 딸랑 있는 상무주는 저 멀리 지리산 주능선을 품고 있다. 지리산을 앞마당으로 가진 몇 안 되는 암자일 듯싶다. 독특한 이름의 상무주(上無住). 상(上)은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이고, 무주(無住)는 머무름이 없다는 뜻이란다.

하지만 지금 산속의 상무주는 산문을 닫고 있다. 입구에는 '사진 촬영금지' 안내판도 보인다. 우연히 만난 노보살은 "등산객들이 너무 많은 민폐를 끼쳐 이럴 수밖에 없었다"며 이해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씁쓸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래도 지리산 조망은 놓칠 수 없는 화두가 아닌가. 영원사 방향으로 약간 가다 보면 소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있는 전망대가 기다린다. 하늘이 열리며 지리산 주능이 끝 간데 없이 뻗어 있다. 아뿔싸! 주봉인 천왕봉만 잿빛 구름을 두르고 있다. 기다리다 지쳐 삼정산으로 오른다. 더 넓게 보기 위해서다. 삼정산은 여기서 300m. 10여 분이면 올라선다. 정상 옆 전망대에서도 하봉 중봉에서 반야봉 노고단까지 시원하게 펼쳐지지만 유독 천왕봉만 구름에 가려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천왕봉은 이후 하산하면서 결국 봤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상무주암의 들머리가 되는 샘터에서 바라본 지리산. 왼쪽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 그리고 푹 꺼진 장터목이 확인된다.

샘터. 곡각지점에 위치해 있어 찾기는 어렵지 않다.

상무주암 가는 들머리.


상무주암을 알리는 조그만 이정표가 걸려 있다.

산죽과 낙엽이 깔린 오르막길도 오르고.


상무주암 인근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상무주암 돌담길.

상무주암.


삼정산 상무주암 인근 소나무 고사목 한 그루가 쓰러져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삼정산 정상. 정상석 뒤로 지리산 주능선이 보인다. 상무주암에서 15분이면 올라선다. 
상무주암. 수행도량으로 최고인 듯싶다.
상무주암에서 하산 도중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지리산 최고의 전망대, 금대산 금대암  

금대암 입구 주차장 한 켠에는 지리산 조망 안내판이 서 있다. 실제 모습과 안내판의 산을 맞춰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부처님에게도 지리산을 보여드리기 위해 법당문을 살짝 열어보았다. 실제로 부처님도 보고 계실까.
법당 앞에서 본 지리산 주능선. 키 큰 전나무는 500년 된 천년기념물이 아니다. 
금대산 정상에서 본 지리산 주능선. 너무 가까워 산사태 흔적까지 보인다. 금대암에서 30~40분이면 올라선다.
   
마천면에서 남원 실상사 방면으로 60번 지방도를 타고 2㎞ 남짓 가다 보면 우측으로 금대암을 알리는 커다란 표지석이 서 있다. '지리방장 제일금대(智異方丈 第一金臺)'. 천하제일의 명당임을 알리는 표시이다. 이곳에서 금대암까지는 2.5㎞. 가파르지만 포장로라 차로 이동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구도자들에겐 최고의 수행처지만 산꾼들에게 금대산 금대암은 오도재 '지리산 제일문' 옆 산신각에서 출발, 삼봉산 백운산을 거쳐 도달하는 등산코스의 날머리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대암으로 가는 도중 놓쳐선 안 될 볼거리가 하나 있다. 안국사 못 미쳐 산모롱이를 돌면 좌측으로 보이는 일명 다랭이논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마천면 일대는 가파른 지형으로 인해 다랭이논이 곳곳에 펼쳐져 있지만 이곳에서 보는 군자리 도마마을의 다랭이논이 가장 아름답다. 매년 가을 황금들녘으로 변할 때면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몰려드는 대표적 출사지이기도 하다. 다랭이논 뒤로 보이는 세 개의 봉우리가 보이는 산은 상무주암을 품은 삼정산이다. 

군자리 다랭이논과 그 뒤로 상무주암을 품은 삼정산이 보인다.
 
흔히 다랭이논 하면 혹자들은 남해 가천마을을 떠올리지만 도마마을의 다랭이논 또한 이에 버금간다. 몇 해 전 이곳 군자리 도마마을 다랭이논도 가천마을의 그것과 함께 국가지정 명승지 후보로 올랐지만, 만일 지정되면 건축행위 등이 제한된다며 주민들이 극구 반대해 제외됐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다.

신라 태종무열왕 3년인 656년 행우조사가 창건한 금대암은 이후 고려 때는 보조국사 지눌,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가 정진했다고 전해온다. 지금은 해인사의 말사이며 금대선원이 있다. 조선 성종 20년(1489년)에는 선비 정여창과 김일손도 지리산으로 유람을 떠나기 전 이곳 금대암에 들렀다고 전해온다.

금대암의 백미는 지리산 최고의 전망대라는 점. 이를 입증해 보이기라도 하듯 주차장 입구 지리산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에는 사진과 함께 '금대암 조망안내판'이 서 있다. 좌측 하봉에서 우측으로 중봉 천왕봉 제석봉 연하봉 촛대봉 영신봉 칠선봉 덕평봉 형제봉까지 확인된다. 너무나 가깝다 보니 큰 소리를 지르면 곧장 메아리로 되돌아올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내친 김에 금대산까지 갈 수도 있다. 0.6㎞로 30~40분이면 충분하다. 감동이 두 배로 다가온다.

흔히 금대암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경남기념물로 지정된 금대암 전나무다. 안내판도 있어 장삼이사들은 법당 앞 키 큰 전나무를 그 나무로 알고 있다. 안내판에는 500년 된 전나무로 현존하는 전나무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으로 적혀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그 나무는 없다. 10년 전 낙뢰를 맞아 쓰러져 지금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키 큰 전나무 아래 그대로 방치돼 있다.

그 밖의 지리산 전망대-벽송사와 서암정사

벽송사 미인송(키 큰 소나무)과 도인송(미인송 뒤) 그리고 삼층석탑.
미인송과 도인송 사이 저 멀리 지리산 주능선이 보인다.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으로 바로 이어지는 칠선계곡 초입의 산 중턱에는 벽송사와 서암정사가 마주 보고 있다. 두 사찰은 상무주암이나 금대암처럼 지리 주능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지는 않지만 지리산 천왕봉을 조망할 수 있다.

한때는 '선방 문고리만 잡아도 성불한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국내 선불교의 최고 종가의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사찰이 불타 사세가 기울었지만 최근 월암스님을 주지 겸 선원장으로 맞이해 전통을 되살리고 있다.

천왕봉과 중봉이 보이는 법당인 보광전 뒤편에는 도인송과 미인송이 천 년의 세월 동안 묵묵히 서 있다. 도인송에 빌면 소원이 이뤄지고, 미인송에 기도하면 미인이 된다는 전설이 내려와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목장승과 함께 방문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서 죽어간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지난 1989년 원응스님이 창건한 서암정사는 기존의 절에 대한 생각을 일시에 바꿔버릴 만큼 소공원처럼 아름답다. 한국 현대 불교의 결정판이라 불릴 만큼 빼어난 석굴법당이 눈길을 끈다. 법당 맞은편 너른 터인 망월대에선 천왕봉을 정점으로 중봉 하봉 두류봉 제석봉이 좌우로 펼쳐진다.

서암정사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서암정사는 마치 소공원에 온 듯 아름답기 그지없다.

지리산 조망공원도 빼놓을 수 없는 지리산 전망대. 하봉에서 여자의 엉덩이를 닮았다는 반야봉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팔각정자인 지득정(智得亭)에는 망원경까지 설치돼 산사면의 사태 등 봉우리의 면면을 죄다 확인 가능하다.

지리산 조망공원의 정자 지득정(智得亭)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지리산 조망공원에 최근 설치된 천왕봉 마고할미상. 그 뒤로 지리산 주능선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지리산 제일문이 서 있는 오도재(오도령).

함양읍과 휴천면 월평리를 잇는 지안재. 흔히 오도재와 혼용되지만 엄연히 지안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또 한 가지. 함양 상림에서도 천왕봉이 보인다. 흔히 단풍과 낙엽으로만 기억되는 상림에선 연꽃밭 쪽으로 나오면 천왕봉과 중봉 및 하봉이 겹쳐져 시야에 들어온다. 이 같은 모습은 함양군청 옥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발견이다.

상림에서 본 지리산. 가운데 맨 뒤 두 개의 봉우리 중 우측이 천왕봉이고, 좌측은 하봉과 중봉이 겹쳐져 있기 때문에 하나로 보일 뿐이다.
위 사진을 줌으로 당겨 본 모습.
함양군청 옥상에서 본 지리산. 역시 상림에서 본 모습과 동일하다.
위 사진을 줌으로 당겨 본 모습.



 


 더우시죠. 인파로 몸살을 앓는 유명 해수욕장 대신 한적한 계곡으로 떠나보시는 것은 어떨런지요.

 
현기증이 일 정도로 쏟아지는 폭포수와 허리춤까지 푸욱 빠지는 소와 담은 사실 작열하는 태양이 부담스러운 해변이나 강변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청량감을 안겨주지 않습니까.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智者樂水)'란 말도 있듯 여름 휴가만은 고전적인 우리 조상들의 방법이 정답인가 싶기도 합니다.

 가볼 만한 부산 경남 울산 지역 계곡을 꼽아 보니 대략 30여 개나 됐습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폭포 하나 달랑 있는 곳도 있고, 지명도는 낮지만 우리땅 어느 계곡보다 알찬 곳도 있습니다.

 미답의 골짝도 있고, 아이들과 맘껏 수영할 수 있는 너른 소와 폭포를 품은 계곡도 찾아보면 숨어 있습니다. 암반 사이로 계류가 포말을 일으켜 마치 놀이공원의 미끄럼틀을 떠오르게 하는 곳도 있답니다. 손이 시려울 정도의 얼음골도 빼놓을 수 없지요.

 혹 이런 분들도 계실줄 압니다. 여름에는 계곡 또한 바닷가와 마찬가지로 인파로 몸살을 앓는다고.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실.
 계곡 하류에서 적어도 30분 정도 발품을 팔면 아무도 없는 한적한 나만의 공간이 기다립니다.

계곡을 테마 별로 한번 분류해 봤습니다. 딱히 무 자르듯 구분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편의상  나눠봤으니 생각이 다르더라도 비난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평온하고 한적한 계곡

 가인계곡. 이 계곡과 만나는 곳이 봉의저수지이다.

봉의저수지와 구만산.

가인계곡에서 만난 무당개구리.


  
최근 수몰 위기에 처한 밀양 산내면 가인리 인곡마을 뒤 가인계곡이 우선 떠오른다. 봉의저수지 옆으로 난 길로 10분 정도만 발품을 팔면 만난다. 산꾼들은 흔히 구만산장에서 출발, 구만폭포를 거쳐 구만산을 찍고 가인계곡으로 하산한다. 계곡에 박힌 바위들은 오랜 세월 동안 물에 패인 흔적이 역력하고 계곡을 감싸고 있는 주변 숲은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성인 가슴까지 찰 정도의 깊은 소와 담이 널려 있다. 층층이 이어지는 계곡 라인은 휘어져 있어 잠시 벗고 들어가도 서로를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연 은신처가 된다. 


     인골산장 오리고이. 스테인리스판을 중심으로 목욕탕 플라스틱 의자에 빙 둘러앉아 먹는다. 주말엔 예약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가인계곡의 물이 유입되는 봉의저수지 바로 아래 인골산장(055-353-6531)은 산꾼들에게 아주 유명한 집이다. 스테인리스판에 구워먹는 오리고기는 일품이다. 주말엔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지산 쇠점골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적한 계곡. 필부들은 그 유명한 호박소와 다리 건너 1㎞ 지점에 위치한 오천평반석 정도까지만 오르지만 여기서 30~40분 정도 발품을 더 팔면 형제폭포와 호박소의 축소판쯤으로 보이는 애기호박소 등 수영도 가능한 넓고 깊은 소를 여럿 만난다.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어 신선놀음을 즐길 수 있다.
발품이 부담스러우면 석남터널 인근 옛 24번 국도 곡각 지점에 위치한 포장마차 '이모집' 앞에서 10분 정도 내려가면 만난다. 최근 밀양시에서 덱을 조성해 놓았다.

가지산 쇠점골.
호박소.

오천평반석 인근에서 만난 두꺼비.

오천평반석. 넓긴 넓지만 오천평이라 명명될 만큼 어마어마하진 않다.


9개의 영남알프스 산군 중 지명도가 가장 낮아 상대적으로 한산한 문복산 계살피계곡 조용한 한때를 보낼 수 있는 명당. 청도 운문면 삼계리에서 출발하는 계살피계곡의 하류는 상수도 보호구역이라 접근할 수 없지만 넉넉잡아 40~50분 정도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와 담 그리고 앙증맞은 폭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문복산 계살피계곡.

폭포 하나는 끝내줘요
 
신불산과 간월산 사이의 간월재 기슭에서 발원한 파래소폭포는 폭포만으로 볼 때 영남권 최고로 꼽힐 정도로 그 자태가 빼어나다.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 내 위치한 이 폭포는 넓고 웅장한 암벽을 타고 쏟아지는 자태가 신비롭고 황홀할 정도. 원래 이곳은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바라던 대로 이뤄진다고 하여 바래소라 불렸으나 지금은 그 이름에서 파생돼 파래소로 굳어졌다. 물놀이는 불가능하다. 굳이 하고 싶다면 인근의 철구소에서 하면 좋을 듯싶다.

파래소폭포.

함양 용추계곡 입구에 위치한 용추폭포 또한 한여름 더위를 잊게 해주는 명소. 언제나 유량이 풍부해 폭포 아래 단 몇 분만 앉아 있어도 옷이 흠뻑 젖을 만큼 물방울의 분무가 아주 세다.

용추폭포.
 
흔히 포항 보경사계곡으로 더 잘 알려진 천령산 청하골은 4㎞에 걸쳐 무려 12개의 폭포가 있어 일명 '12폭포골'로 불린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넓은 소와 병풍처럼 둘러싸인 기암괴석, 그리고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는 소나무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 중 연산폭포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이다. 높이 30m쯤 되는 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고 있노라면 대자연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
포항 청하골(일명 보경사계곡) 연산폭포.

자녀와 함께 가볼 만한 계곡

함양이 자랑하는 용추계곡 화림동계곡과 달리 함양 이외의 사람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계곡이 바로 부전계곡이다. 군은 이 계곡만은 개발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포장도 하지 않은 채 알리지도 않고 있다. 백두대간 영취산이 품고 있는 이 계곡은 암반 사이로 옥류같은 계류가 포말을 일으키며 용소에 이르는 모습이 마치 놀이공원의 구불구불한 슬라이드를 떠오르게 한다. 이곳은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놀기에 적합하다.

             함양 부전계곡.

울산 대운산 상대계곡과 도통골도 한여름 자녀와 함께 가면 좋을 계곡이다. 양산 웅상읍과의 경계에 솟은 대운산은 사계절 산행지로 각광을 받고 있지만 여름이면 단연 돋보인다. 관리사무소를 지나 만나는 첫 갈림길에서 우측 내원암 방향 대신 좌측 애기소농장 방향으로 향하면 옥류같은 맑은 물이 흰 포말을 일으키는 애기소와 구유소를 만난다. 여기서 대피소가 위치한 도통골로 30분쯤 임도를 따라 걸으면 삼단폭포와 너른 소가 기다린다. 수영도 가능하다.

대운산 도통골.

배내골 주암계곡의 철구소 또한 온가족이 가볼 만한 계곡이다. 영남알프스 재약산에서 발원한 주암계곡에서 배내골로 내려오는 지류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는 찾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지자체가 다리와 덱을 조성해놓아 찾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배내골서 양산과 울산의 경계를 지나 울산 쪽 강촌가든 옆 다리만 찾으면 쉽게 만난다. 시퍼런 물이 한눈에 봐도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데다 웬만한 수영장만큼 넓다. 깊은 곳은 어른 키를 능가한다. 중고등학생 자녀라면 놀기에 안성마춤이다. 튜브 필수.

배내골 철구소.

간월산에서 발원한 작괘천도 여름이면 단골 물놀이 명소로 소문이 자자하다. 작천정 앞을 흘러 일명 '작천정 계곡'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세월에 깍인 수백평이나 되는 너른 암반이 품은 유량이 웬만한 풀장에 버금간다.
울산 작괘천, 일명 작천정계곡이라고 불린다.

손발이 시려운 신비한 얼음골도 있어요
  
밀양시 산내면 남명리 재약산 기슭 해발 600~750m에 위치한 골짜기인 밀양 얼음골 정식 명칭은 시례빙곡(詩禮氷谷)으로 천연기념물 224호. 주차장에서 넉넉잡아 25분 정도 걸어야 만난다.

삼복더위에 그 이름 그대로 얼음이 얼고, 겨울엔 얼음이 녹아 더운 김이 올라와 예부터 부·울·경 지역의 단골 피서명소로 자리매김해왔다. 천황사에서 다리를 건너면 순식간에 오싹해질 정도로 냉기가 온몸을 감싼다.

밀양 얼음골.

천황사 입구에서 우측은 얼음골 결빙지(130m), 좌측은 암·수 가마볼폭포가 위치한 가마볼협곡(180m). 대개 결빙지를 돌아 가마볼폭포를 보고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나오면 원점회귀가 된다. 얼음이 어는 지역을 철망으로 막아놓아 실망스럽지만 냉기 하나만은 끝내준다. 여기서 240m쯤 떨어진 암·수 가마볼폭포 또한 유량이 풍부해 더위를 날려준다.

수가마볼폭포.

암가마볼폭포.


얼음골로 가기 위한 다리 위해서 본 모습. 이곳은 얼음골 하류 계곡인 셈이다. 
쇠점골 입구 계곡.

의성 빙계계곡 빙혈(氷穴)과 풍혈(風穴)로 유명하다. 계류가 기암절벽을 굽이쳐 멋스런 풍광을 연출, 경북8승 중 하나로 꼽히지만 도로에서 접근하기가 어려워 발담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참고하길. 
  
오르는 길 옆 바위 사이에도 찬바람이 나오지만 바위굴을 벽돌과 유리문으로 막은 빙혈에선 한기를 느낄 정도로 차다. 빙혈 바로 위에 위치한 풍혈은 바위와 바위 사이의 작은 굴. 어른 두 사람이 겨우 들어갈 공간이다. 빙혈에 비하면 냉기는 약하지만 한여름 더위를 쫓기에는 그저 그만이다.
의셩 빙계계곡의 풍혈.

청송 얼음골 밀양 얼음골이나 의성 빙계계곡에 비해 지명도는 떨어지지만 경북 내륙에선 꽤 유명한 여름철 명소이다. 차가운 얼음물이 솟는 지점에 굴을 조성, 돌 틈 사이로 나오는 찬바람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이와 별도로 겨울이면 빙벽대회가 열리는 높이 62m의 인공폭포 또한 볼거리다.

청송 얼음골. 찬바람과 함께 시원한 석간수가 일품이다.

계곡산행의 진수 셋

 평소에는 잘 찾지 않다가도 여름철만 되면 성지순례하듯 전국의 산꾼들이 모여드는 곳이 밀양 구만산이다. 해발 758m로 영남알프스 산군 중 높지 않은 데다 전망 또한 신통치 않지만 빼어난 계곡 덕분에 여름이면 북새통을 이룬다. 그 절정은 구만폭포. 40m 높이의 폭포수가 멋있지만 물이 떨어지는 시퍼런 물빛의 너른 소는 어른들의 거대한 물놀이장으로 변한다. 남녀 구분없이 나이를 잊고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그럴까. 아무튼 한여름 구만폭포는 어른들에 의해 점령된다. 들머리에서 1시간.

                 구만산 구만폭포.

금오산 하면 흔히 구미가 떠오르지만 여름철 금오산칠곡 금오동천을 품은 남릉으로 올라야 제맛이다. 들머리에서 7분이면 연이은 폭포가 나그네를 기다린다. 제4, 3, 2, 1폭포와 벅시소 용시소 구유소 선녀탕이 연이어 나타난다. 금오산은 계곡뿐 아니라 산릉에서도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8부 능선쯤 산속에 축구장 면적의 절반쯤 되는 평지가 있고, 정상 바로 아래 절벽 사이에는 약사암이 있다. 낙동강과 구미시가 한눈에 펼쳐지고, 구름다리로 연결해놓은 범종각은 멋진 풍경을 선사한다. 하산길의 부처바위 석굴법당 등도 여느 산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볼거리다.
 

               칠곡 금오산 금오동천 선녀탕.

포항 내연산 삼지봉이 품은 마실골~덕골은 산꾼들로부터
'원시계곡의 백미'라고 불리는 계곡산행의 히든카드. 옥계37경으로 유명한 영덕 옥계계곡의 상류인 하옥리계곡의 지류인 마실골~덕골기기묘묘한 암벽과 단애, 이름모들 무수한 폭포와 소·담, 하늘을 가릴듯한 울창한 숲은 곳곳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등산로가 제대로 없어 초보자나 나홀로 산행은 결단코 말리고 싶다. 최소 서너 명은 함께 하길 권한다.
                       '원시 계곡의 백미'로 불리는 포항 내연산 삼지봉이 품은 덕골 하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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