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함양 백전면 양천마을 '하고초 축제'를 다녀와서

폭의 수채화처럼…일렁이는 보랏빛 바다

조물주도 탄복할 산골 다랭이논의 꽃물결
하고초꿏 작목반 11가구 20명 연 4~5억 수입
하고초꽃 비빔밥 동동주 등 먹을거리 별미

고흐나 고갱도 이처럼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려낼 수 있었을까. 함양 백전면 양천마을 언덕배기 천수답 다랭이논을 가득 채운 보랏빛 '꿀풀' 하고초꽃 군락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백두대간 백운산 자락 아래 찢어지게 가난한 전형적인 산골마을이 하나 있었습니다. 장수군과 인접한 함양군 백전면 오천리 양천마을입니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부쳐먹을 데라곤 하늘에 걸린 손바닥만한 언덕배기 천수답 다랭이논이 전부였습니다. 가뭄이라도 들라치면 거북등처럼 쩌억 갈라진 논바닥을 보면서 주민들은 죄 없는 마른 하늘만 원망하고 또 원망했습니다.

이런 산골마을에 어느 날 변화의 단초가 된 작은 계기가 찾아왔습니다. 8년 전인 지난 2001년입니다. 함양군이 군내 산골마을을 대상으로 쌀 대체작목으로 약초를 재배해 보라는 이른바 '1마을 1약초' 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천수답 다랭이논의 논농사와 자투리땅 밭뙈기에서의 잡곡 그리고 한봉이 생업의 전부였던 마을 사람들은 고민 끝에 꿀생산의 원천이었던 하고초(夏枯草) 재배에 올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지역에서 자생하는 하고초는 꽃을 따서 빨아먹으면 꿀이 나와 일명 꿀풀로 불리는 다년생 약초입니다.   
 
몇 년 후 천수답을 갈아엎어 조성한 15㏊(4만5000평) 부지에 만개한 하고초꽃 군락은 그야말로 보랏빛 장관을 이루었습니다. '대자연 속의 수채화'라 불러도 될 만큼 그 자체가 하나의 볼거리였습니다.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조성된 국도변의 밋밋한 연보라 자운영 군락지와 비교해도 분명 한 수 위였습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꽃이 피는 매년 5월 말에서 6월 초가 되면 전국에서 외지인들이 하나 둘씩 찾기 시작했습니다. 덩달아 하고초꿀도 잘 팔렸습니다. 하고초가 한방에서 4대 항암약초의 하나라는 임상연구 결과가 나오자 이젠 하고초꿀은 없어서 못 팔 정도가 돼 버렸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이 아름다운 풍광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보기 위해 지난 2004년부터 하고초 축제를 열었습니다. 올해가 여섯 번째입니다.

양천마을 주민은 현재 20가구 33명입니다. 주민들의 평균 연령이 65세가 넘는 이 조그만 마을이 개최하는 하고초 축제는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적은 수의 그리고 가장 나이 많은 사람들이 개최하는 축제로 기억될 것입니다.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초 단체장의 업적이나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존의 축제와는 다릅니다. 눈으론 아름다운 보랏빛 하고초꽃 군락을 감상하시고, 마음으론 시골인심과 정서를 맘껏 담아가시면 됩니다."

우리 땅 여느 시골들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약초였던 '꿀풀' 하고초가 가져다 준 산골마을 상전벽해의 현장을 찾아 보랏빛 향기를 가득 담아 왔습니다.


■ 고흐 고갱도 깜짝 놀랄 하고초꽃 군락지

 고려말 재상 박홍택이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벼슬을 버리고 칩거했다고 전해오는 경남 함양군 백전면 오천리 양천마을.

꽃잔치로 마을 전체가 들썩거릴 줄 알았지만 그 흔한 만국기 하나 보이지 않고 귀를 쩡쩡 울리는 트로트 노랫가락 하나 들리지 않는다. 내심 잘못 왔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골마을은 조용하다.

마을 주변 다랭이논과 언덕배기를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인 하고초꽃 군락지만이 이곳이 축제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보라색 물감을 대자연에 촘촘히 뿌려놓은 것일까. 아무튼 처음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 열에 아홉은 약속이나 한듯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를 자아낸다.

축제 현장에는 하고초꽃 군락지 이외에 볼거리가 또 하나 있다. 전국에서 찾아든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의 행렬이 그것이다. 챙이 넓은 등산모자를 눌러쓴 이들은 포토라인을 설정한 채 거물급 피의자를 기다리는 검찰 출입 사진기자들처럼 받침대를 설치해놓고 이리저리 각도를 달리해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다. 하고 싶었던 바를 하고 있어서 그럴까, 그들의 만면에는 웃음꽃이 떠날 줄 모른다. 그들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흐뭇하다.

보라색 하고초꽃 군락이 밋밋하고 식상했던지 일행 중 한 명이 마을사람들에게 모델이 필요하다 말한다. 촌로 한 분이 어색한 표정으로 지게를 지고 하고초꽃밭으로 발길을 옮긴다. "표정이 너무 굳어 있어요. 얼굴을 왼쪽으로 약간 돌려주세요…." 사진작가들의 요구 사항이 적지 않다. 이곳 하고초 축제장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얼룩배기 황소는 사실 하고초밭에 들어올 필요가 없다. 이 또한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을 위한 연출이다. 앗, 이
 런 것 밝히면 안되는데....
  산골짝 언덕배기 다랭이논을 가득 채운 보랏빛 '꿀풀' 하고초꽃 군락.


■ 하고초꽃 군락지는 생태학습장
 
다소 독특한 이름의 하고초. '여름 하(夏)' '마를 고(枯)' '풀 초(草)' 자를 쓰는 하고초는 문자 그대로 여름에 말라죽는 풀. 초여름 잠깐 꽃을 피웠다가 한여름에 시들어 죽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니까 하고초꽃이 절정을 이루는 기간이 대개 하고초 축제 기간이 되는 셈이다.

우리 땅 시골들녘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다년생 토종 야생초인 하고초는 시골에서 자라 풀(꼴) 베러 다닌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올릴 것이다. 풀을 베다 해질녘 배꼽시계가 울릴 때면 보랏빛의 이 하고초꽃을 따서 쪼옥 빨아먹으면 꿀이 나와 허기를 달랬던 것. 해서, 사람들은 하고초를 꿀이 나온다 하여 꿀풀, 꿀풀이, 꿀방아, 꿀방망이로 불렀다. 그러면서도 이 하고초꽃이 군락을 이루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로 변신한다는 사실은 의외라고 말한다.

기자 또한 오래 전 산행 중 이따금 하고초(당시엔 꿀풀로 알고 있었다)를 본 적이 있지만 그건 낱낱일 경우였다. 산에서 발원한 여러 가닥의 물줄기가 한데 모여 수려한 강을 이루듯 한낱 미물에 불과한 하고초가 군락을 이루면 이토록 아름다운 볼거리로 재탄생할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하고초꽃 군락으로 다가갔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허공을 맴돈다. 꿀벌들이 일용할 양식인 꿀을 모으며 날갯짓하는 소리이다. 가만히 들어보면 서로 장단을 맞추는 듯 산중음악회에 온 것 같다. 한편으론 이방인의 침입을 경계하는 몸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지만 이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공격하지 않으니까. 꿀벌도 공생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일까.
  
방망이처럼 생긴 꽃잎을 따서 꽁지 부분을 빨아봤다. 그윽하면서 은은한 단맛과 함께 입안에 향이 사르르 퍼진다. 머리도 맑아진다. 언제 이런 기분을 느껴봤던가. 대자연의 오묘함을 새삼 체험한다.

재밌는 점도 발견된다. 하고초꽃 군락 바닥에는 꽃잎이 수북이 쌓여 있다. 동행한 박종회(63) 마을 이장은 "이는 꿀벌이 부지런히 꿀을 모은 흔적"이라고 말했다. 다른 꽃은 벌이 꿀을 빨아먹어도 꽃잎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하고초꽃은 벌이 꿀을 안쪽에서 빨아먹기 때문에 꽃잎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인간으로선 남은 꽃잎만 보고서 향후 만들어질 꿀의 양을 가늠해볼 수 있어 그저 고맙기만 하다.

운이 좋으면 꿀벌이 무리지어 향연을 펼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생태학적으로 분봉(分蜂)으로, 1년 중 이 시기에 딱 한 번 펼쳐지는 희귀 장면이다. 분봉은 여왕벌이 산란, 새 여왕벌이 태어나면 일벌의 일부를 이끌고 새로운 무리를 형성한다. 이때 주민들이 새로운 무리를 위해 짚으로 만든 일종의 벌들의 거처인 멍덕을 나무 위에 줄로 매달아 놓으면 이곳으로 몰리며 정육각체의 집을 짓는다. 이 집이 어느 정도 윤곽을 보이면 사람이 멍덕을 줄로 내려 정육각체 집을 새 꿀통으로 옮겨놓는다. 비로소 분봉이 완성된다.

벌통 출입구.

줄로 매달아놓은 멍덕.


참고 하나. 분봉 때 주민들에게 부탁해 조금만 발품을 팔면 벌통 입구에서 일벌보다 약간 큰 여왕벌도 볼 수 있다. 여왕벌은 일벌보다 몸통이 더 길고 색은 약간 불그스름하다. 재밌는 점은 새로 태어나는 여왕벌이 기존의 여왕벌을 몰아낸다는 점이다.

하고초꽃은 벌이 꿀을 빨고 나면 잎이 떨어진다. 벌꿀 수요 예측이 가능하다.
마을 자투리땅에도 온통 하고초꽃 꿀통이 놓여 있다. 그 모습 또한 아름답다.
하고초꽃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 동네 아낙들이 꽃잎을 따고 있다.

간단한 요기를 하기 위해 마을 정자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다.



하고초꽃 비빔밥.

■ 하고초꽃 요리 먹고 동네 한 바퀴   
 
하고초꽃밭에는 땡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정성스럽게 꽃잎과 잎을 따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바로 하고초를 이용한 먹을거리를 장만하기 위해서이다.

하고초 축제가 열리고 있는 양천마을에는 식당이 없다. 대신 100년 된 마을 정자나무 아래에서 마을 아낙네들이 하고초를 이용한 요리를 대접한다. 메뉴라 해봐야 하고초 비빔밥, 하고초전, 하고초 동동주. 모두 '착한 가격' 3000원.

고사리 취나물 무채 등 산채에 하고초꽃잎을 곁들여 고추장에 비벼먹는 하고초 비빔밥, 하고초 잎이 들어간 하고초전, 그리고 하고초를 말린 건초를 자루에 담아 막걸리에 2, 3일 숙성시켜 보랏빛 하고초 꽃잎을 동동 띄운 하고초 동동주. 시원한 바람이 불어대는, 정자나무가 위치한 항아대 그늘에 앉아 더위를 식히며 맛보는 이 맛은 그저 그만이다. 오랫동안 추억으로 남을 듯하다.

박춘선(56) 마을 부녀회장은 "비록 산해진미는 아니지만 시골 인심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며 활짝 웃었다.

든든한 식사 후엔 마을을 거닐 차례. 천천히 한 바퀴 도는 데 1시간쯤 걸린다. 도중 쉼터인 원두막도 설치돼 있지만 여성의 경우 파라솔과 자외선 차단제는 필수. 남자들도 챙이 넓은 모자를 준비하자. 큰 도움이 된다. 일방통행으로 원점회귀할 수 있도록 이정표를 친절하게 세워 놓아 길 찾는 데 아무 문제 없다.

마을 언덕배기에도 벌통이 있지만 대부분 민가 가까이에 있다. 박 이장은 "꿀벌은 행동반경이 4㎞ 정도여서 주민들이 관리하기 쉽게 집 근처에 벌통을 배치한다"고 말했다. 그래야만 벌통도 매일매일 청소하기가 쉽단다.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그럼 하고초꽃밭의 벌통은.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다. "사진작가들이 운치 있는 장면을 찍기 위해 자꾸 꽃밭에 갖다 놓으라고 해서 그런 거예요."

도중 '아들 낳는 옹달샘'이란 팻말이 하나 보인다. 예부터 마을에서 내려오는 전설 속의 샘으로 올 초 반듯하게 정비해 놓았다. 또 어린이들을 위해 계곡물을 모아 미꾸라지 및 메기 잡기 체험장도 만들어 놓았다.


■ 하고초가 산골마을의 운명을 바꾸다

정진상(59) 하고초꿀 작목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함양군이 8년 전 추진한 '1마을 1약초' 운동이 양천마을을 살렸다고.

당시 마을사람들은 어떤 약초를 재배할 것인가 회의를 하며 고민도 많이 했다. 막상 하고초로 결정을 했지만 반대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안이 없었기에 그대로 밀어붙였다. 하늘을 보며 비를 기다리는 천수답 쌀농사보다 낫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 대부분 마을주민들의 생각이었다.

하고초꿀 작목반과 함께 영농조합법인도 설립됐다. 작목반원 모두가 하고초를 공동 경작하면서 수익금을 균등하게 배분하기로 하고 자기 일처럼 열심히 일했다.

운도 따랐다. 지난 2004년 경상대 생명과학연구원이 전국의 자생약초 300여 종을 대상으로 쥐에 대한 임상실험을 한 결과 하고초가 느릅나무 구지뽕 등과 함께 4대 항암약초로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갑상선 고혈암 부인병에 특히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하고초꿀은 일반 꿀보다 50% 정도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없어서 못 팔 정도가 됐다. 재배지도 처음 11㏊(3만3000평)에서 15㏊(4만5000평)로 확대됐다.

귀농인도 생겨나 마을 분위기도 확 달라졌다. 대표적인 이가 현재 마을이장 박종회 씨. 그는 서울에서 살다가 4년 전 고향인 이곳 양천마을에 새로운 둥지를 틀어 1년 반 전부터 단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을이장을 맡고 있다.

현재 양천마을에는 20가구 33명이 거주하고 있다. 하고초 작목반 소속은 11가구 20명. 9가구 13명은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연로해 소일삼아 집에서 한두 통 정도 꿀을 만들고 있다고 한다.

하고초마을의 지난해 꿀 생산량은 4700되(1되 2.4㎏ 7만 원). 하고초 진액까지 포함하면 연간 수익은 4억~5억 원. "이 정도 수입이면 촌 노인들 치고는 괜찮은 편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들도 평범한 약초였던 하고초가 산골마을을 수년 만에 이처럼 변화시킬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고 말했다.

"산골마을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워하는 중장년층이나 하고초와 꿀벌의 생태와 시골마을의 정서를 체험하려는 도시인들에게 보랏빛 추억을 선사하기 위해 고심 끝에 축제를 만들었어요. 그 흔한 공연도 없어요. 그저 넉넉한 시골인심과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하고초꽃 군락을 맘껏 담아가세요." 박종회 마을이장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의 작은 바람이었다. 축제는 내달 10일까지 열린다.

 하고초 축제의 현장인 함양군 백전면 양천마을은 최치원의 애민사상이 담긴 함양의 대표 관광지 상림에서 차로 7~8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함양군청을 지나 상림으로 가다 '백전 병곡'이라 적힌 1001번 지방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쉽게 만난다. 근처에 이르면 초행자들을 위해 애드벌룬이 어서 오라 손짓하고, 마을 입구에는 '신비의 꿀 하고초 마을'이라 적힌 대형 입간판이 서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 한들 들녘에도 꽃잔치…지평선까지 온통 꽃의 물결

풍차 토피어리를 배경으로 한 한들 들녘.


지금 함양에는 하고초 축제 이외에 또 하나의 꽃축제가 열리고 있다. 내달 10일까지 열리는 제1회 함양 한들 플로이아 페스티벌이 바로 그것이다. '한들'은 함양에서 가장 큰 들이라는 의미이다. 그 면적이 여의도의 절반인 100만 ㎡. 함양 나들목에서 함양읍내로 들어오다 좌측으로 보이는 너른 들녘을 전부 축제장으로 보면 된다.

이 축제는 원래 지난달 25일 개막 예정이었지만 지난해 꽃씨 파종 후 저온현상과 가뭄 등 이상기온으로 꽃이 늦게 펴 한때 비난이 쇄도했다. 그러나 이번 주를 계기로 꽃들이 만개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하고초꽃이 시골 새색시의 수줍은 자태라면 한들 벌판의 광활한 꽃잔치는 미인대회에 출전한 수십 명의 늘씬한 도회지 미녀에 비유될 듯하다.

꽃양귀비 수레국화 유채 캘리포니아뽀삐(금영화) 안개꽃 끈끈이대나무 꽃무 영채 서양말냉이 등이 빨주노초파남보 등 무지갯빛 꽃물결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장관이다. 축제가 끝나면 꽃단지는 모두 갈아엎고 모내기를 해 다시 농지로 활용된다. 축제장 입구의 토속 민물고기 생태체험관과 철갑상어 전시장도 볼 만하다. 성인 8000원, 청소년 6000원, 어린이 4000원. 행사장을 왕복하는 카트(전동차)를 타면 편리하다. 소요시간 30분. 성인 4~5명 승차 가능. 1만5000원.

꽃축제장을 도는 카트(전동차).

모델이 없어 남자 진행요원을 꽃속에 앉혔다.


함양에 서식하는 민물고기.

꽃축제장 입구 토종 민물고기 생태체험관.

<함양 맛집>

상림은 함양 관광의 출발점이자 종착지. 주변에는 맛집이 즐비하다. 상림 주차장 인근의 늘봄가든(055-962-6996)은 오곡밥 정식(8000원), 금농(055-963-9399)은 생선구이쌈밥(〃)을 잘 한다. 하늘바람(055-962-8700)은 연(蓮)으로 만든 수제비 세트(7000원)가 일품이다. 함양군청 인근 대성식당(055-963-2089)에는 40년 전통의 쇠고기 국밥(6000원)이 유명하다.

늘봄가든 '오곡밥정식'.
상림 인근 연밭에서 수확한 '연(蓮)으로 만든 수제비 세트'. 연근은 들깨 북어포 등과 함께 국물맛을 내고 연잎은 갈아서 반죽에 섞어 연두빛을 낸다. 버섯 감자 등 각종 야채가 들어가 고소하고 맛있다. 연근조림 연근양갱 연잎차가 한 세트로 나온다.
40년 전통의 대성식당 '쇠고기국밥'. 토란대가 듬뿍 들어가 국물이 담백하다.
금농의 '생선구이쌈밥'.


 


이 글은 지난해 8월 19일 포스팅한 글입니다. 글 제목대로 자꾸 자꾸 생각나서 이렇게나마 다시 볼 수 있도록 올립니다.
노 전 대통령께서 해양수산부 장관시절 저는 경제부에서 해양수산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그해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부산을 찾아 해양수산 담당 기자단과 함께 광안리 모 횟집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 소탈하고 서민적인 이미지로 다가왔습니다. 분위기가 좋아 2차로 노래방도 갔습니다. 이후 팬이 됐었죠. 노사모 회원으로도 가입했습니다.
이후 저는 문화부를 거쳐 주말레저팀으로 옮겼습니다. 산행과 여행을 맡았죠.
그리고 여행면의 여행지로 퇴임 후 노 대통령이 내려와 계신 봉하마을로 정해 소개를 했습니다. 아래 글은 당시 신문에 소개한 글에다 지면 사정상 싣지 못한 내용을 추가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당시 봉하마을에 대한 기사는 더러 보도됐지만 여행지 내지 관광지로서의 봉하마을은 아마도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후 저는 봉하마을에 3번이나 더 갔습니다. 아들과 아내 장모님과, 또 한번은 어머니의 부탁으로, 그리고 또 한번은 다른 곳 취재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냥 생각나서 한번 더 들렸습니다. 아직도 밀짚모자,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나와 농담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 이렇게 재밌게 웃고 하면서, 돌아서면 또 '노무혀이 정말 말 많고 촐싹거리제'라고  말할거지요."
 
 주말 내내 정말 힘들었습니다. 분노가 치밀기도 했습니다.

청와대 한나라당 그리고 검찰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김해 봉하마을을 찾으니 배가 아프고 한편으로 두려웠냐고.

오늘 아침 저 블로그에 1년 전 올린 봉하마을 소개 글에 대한 댓글이 하나 올라와 있더군요. 해서, 다시 한번 더 읽어 보고 이렇게 몇 자 추가한 후 맨 앞으로 옮겨놓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권양숙 여사님이 정말 걱정됩니다. 혹시나 따라가시지는 않을런지. 가족 친지분들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분 금슬이 너무 좋으셨지 않습니까. 


잊은 줄 알았는데 왜 자꾸 생각날까


노 전대통령 아침 담배 피우던 매점
초등학교 중학교 보낸 생가와 사저
하루 평균 4000명 관광객 발길 북적
봉화산·화포천 습지 보리밭도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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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하루에 최고 11번 관광객을 맞은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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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 사저 뒤로 봉화산 사자바위가 보인다.


지난 3일로 고향인 김해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 정착한 지 100일을 맞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때보다 훨씬 높은 인기를 구가하며 연일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대하느라 하루하루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한마디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 쪽은 청와대로 가려는 촛불시위 참여 시민들을 전경들이 막고 있고, 이미 청와대에서 떠난 또 한 쪽은 제발 그만 좀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며 표정관리를 하고 있다. 100일 만에 상황이 뒤집어진 것이다.
 봉하마을 관광안내소에 따르면 지난 4일까지 총 방문객은 41만3400명. 하루 평균 4093명이며 주말 최고 방문객은 2만 명, 평일 최고는 5700명에 달한다.
 노 전 대통령은 그의 홈페이지(
www.knowhow.or.kr)를 통해 이렇게 적고 있다. "저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대문 앞에 나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힘들지만 반갑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습니다. 손님들은 이곳에 와서 저의 생가 보고, 우리 집 보고, 그리고 '나오세요'라고 소리치고, 어떤 때는 저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재미없겠다 싶은데 그래도 손님은 계속 오십니다(중략)." 해서, 그는 마을 뒷산인 봉화산과 인근 습지인 화포천을 한번쯤 둘러보라고 권한다. 그리곤 반드시 마음 놓고 걸을 수 있게 등산화를 신고 오시기를 빠뜨리지 않았다.
 주말레저팀이 과연 봉하마을에 그렇게도 볼 것이 없는 지, 아니면 이것저것 볼 것이 많은 데도 제대로 된 동선(動線)을 찾지 못하고 있는지 한번 확인해봤다.

 #봉하마을에서 '노무현' 흔적 찾기

 여전히 '자연인 노무현'의 귀향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눈에 띄는 봉하마을을 찾으면 우선 관광안내센터 김민정 문화관광해설사를 만나라고 권하고 싶다. 해설사로서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그는 지난 2003년 1월부터 지금까지 줄곧 여기서만 근무하고 있는 '터줏대감'이다. 알고보니 그는 CNN ABC NYT NHK BBC 등 국내외 유수 언론과의 인터뷰를 도맡아 하는 유명 인사(?)였다.

 김 씨는 "얼마 전 노 전 대통령이 아침 일찍 마을주차장 앞 매점(쉼터)에 홀로 앉아 담배피우는 모습이 보도된 후 많은 관광객들이 그 곳이 어디냐고 가장 많이 묻는다"고 전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기자는 김 씨와 함께 직접 매점을 찾았다.
 당시 노 전 대통령에게 담배를 팔았던 양태숙 씨는 "노 전 대통령이 이른 아침 불쑥 찾아와 담배를 하나 달라고 해서 가장 비싼 담배가 순하고 좋은 것 같아 3000원짜리 담배를 권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리고는 당시 노 전 대통령이 앉아서 담배를 피웠던 자리를 가리키며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사며 그 자리를 묻고는 대부분 V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는 웃지 못할 상황이 하루에도 수십 차례 반복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다음은 노 전 대통령의 사저 차례. 매점 우측 마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신축 건물 3채를 나란히 만난다. 첫 번째 집은 본산리 이장 댁, 다음이 경호원들이 머무는 경호 관저, 맨 끝집이 노 전 대통령의 사저이다. 사저 입구 우측 낡은 슬레이트 단층집은 바로 노 전 대통령의 생가이다. 그는 여기서 일곱 살까지 살았단다. 현재 담벼락을 철거한 생가는 최근 노 전 대통령의 부산상고 한 동문이 매입, 김해시에 기부채납했다. 김해시는 이 부지에서 내달 공사를 시작, 현재의 슬레이트 지붕 건물 대신 원래 모습인 초가로 오는 12월께 복원할 계획이다.
 김 씨는 "노 전 대통령이 귀향했을 초창기에는 방문객들이 '나랏님'을 배출한 집터라 생가 마당의 돌과 흙을 가져가고, 이장 댁 앞에서 노 전 대통령을 불러대는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자주 발생했지만 지금은 그같은 현상은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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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과 생가와 봉화산 가는 길.
봉하마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흔적이 더 있다고 귀띔했다.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생가에서 세 번이나 이사를 했으며 그 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이 김 씨의 설명이다.
 관광안내센터 바로 뒤 초록색 철대문집은 노 전 대통령이 생가에서 이사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보낸 곳. 겉으론 벽돌 양옥이지만 대문 안쪽으로 들여다 보면 마당 한 쪽에 다 쓰러져가는 슬레이트 지붕 건물이 하나 보인다. 아마 저곳이 살림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엔 주차장을 가로질러 매점 좌측으로 발길을 옮긴다. 공중전화 부스가 하나 보인다. 그 맞은편 2층 양옥집이 노 전 대통령이 총각시절 및 권양숙 여사와 신혼시절을 부모님과 함께 보낸 곳이다. 이 집 대문 좌측 담벼락에는 '노무현 대통령 생가 가는 길 150m'라고 적힌 안내판이 붙어있다. 물론 지금처럼 양옥이 아니라 슬레이트 지붕집이었다.
 이 집 좌측 골목을 따라 50m쯤 들어서면 커다란 셔터문의 2층 양옥집이 좌측에 있다. 오래전 마을우물 자리다. 여기서 10m쯤 더 가면 비닐하우스 뒤로 조립식 가옥이 한 채 있다. 권양숙 여사가 살던 터다. 당시엔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살면서 노 전 대통령이 총각시절 우물 앞에서 휘파람으로 권 여사를 불러냈던 장면이 연상되는 지점이다.
 마치 청마 유치환이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가 살던 수예점이 바라다 보이는 옛 통영우체국 창가에서 연서를 썼듯 노 전 대통령도 권 여사 집이 훤히 보이는 우물 앞에서 애틋한 연심을 품었던 것이다. 수년 전 통영의 한 문화관광해설사가 통영 투어 후 관광객들에게 어디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묻자 십중팔구 청마와 정운의 애틋한 사연이 담긴 청마거리라고 답한 것처럼 아마도 봉하마을을 찾는 방문객들이 만일 이 사연을 알게 된다면 이곳 또한 봉하마을의 새로운 볼거리로 눈길을 끌 것이라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
 이제 골목길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돌면 좁다란 공터 한 곳을 만난다. 이곳은 노 전 대통령이 고교시절 그의 가족들이 살던 곳이다. 김 문화유산해설사는 "5남매를 공부시키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의 부모는 점차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고 설명했다. 이 공터 맞은편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터가 그의 죽마고우인 이재우 진영농협 조합장의 집이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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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 전 대통령이 사법고시 공부를 하던 토담집도 빼놓을 수 없다. 역시 흔적은 없고 터만 남아 있다. 마을과 마주보고 있는 야트막한 산 아래 위치해 있다. 이곳 주민들은 한 일 자로 길게 뻗은 이 산이 마치 뱀을 닮았다고 해서 일명 뱀산이라 부른다. 이 뱀산 아래 위치해 있다.
 관광안내소에서 뱀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전봇대가 띄엄띄엄 서 있는데 그 중 거의 붙은 두 개의 전봇대가 눈에 띈다. 바로 그곳이다. 헛간이었던 이곳에 노 전 대통령은 톱밥과 널빤지를 구해 제법 방처럼 꾸며놓고 전기가 안 들어오는 밤엔 촛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노 전 대통령의 부친은 이곳의 이름을 마옥당(磨玉堂긿구슬을 가는 집)이라 정해 주었다. 노 전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와의 결혼 후에도 이곳에서 공부하며 출퇴근을 했다고 전해온다.
 이제 남은 곳은 노 전 대통령 부모의 선영. 봉하마을 입구로 돌기 직전 좌측 45도 방향 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최근 산 아래 감나무 전지작업을 하지 않아 겨우 보인다. 입구에는 옥색 간이화장실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땐 선영 입구에 두 명의 전경이 근무를 섰다. 다리 건너 공터가 바로 그곳이며 당시엔 컨테이너 박스가 하나 있었다. 선영의 뒤를 받쳐주는 현무가 든든하고 앞쪽 주작에 해당되는 산이 가까이 보여 조상의 기운을 가장 빠르게 받을 수 있는 명당이라고 알려져 있다.

 #봉화산과 화포천

 봉하(烽下)마을은 봉화산(烽火山) 아래 있는 마을. 해서 두 곳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노 전 대통령도 그의 홈페이지에서 "봉하마을의 명물은 봉화산입니다. 이 산에 올라가보지 않고는 봉하마을 방문은 헛일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봉화산은 참 특이한 산이다. 해발 140m에 불과하지만 너른 들판에 불쑥 솟은 독립봉우리여서 마치 고봉준령에 서 있는 것처럼 조망이 기가 막히다. 호미를 든 관음개발성상이 봉하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정상에 서면 무척산 금동산 석용산 신어산 분성산 등 김해의 산과 이웃한 창원 창녕 밀양 등 웬만한 산들이 죄다 확인된다. 주민들도 "한반도에 이처럼 낮은 산이면서 조망이 확 트인 산은 아마 봉화산뿐 일 것"이라고 말한다.
 뭐니뭐니해도 봉화산을 대표하는 볼거리는 사자바위. 봉하마을에서 동쪽으로 고개를 들면 정면으로 보이는 큰 바위이다. 마을 주차장에서 바라보면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다. 즉 산 아래를 바라보며 호령하는 우측 바위가 사자머리이고, 이 바위 좌측 커다란 바위가 부엉이바위(표기는 부흥이)로 사자 다리에 해당된다. 예부터 부엉이가 많이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산 이름의 단초가 되는 봉수대는 사자바위 바로 위 팻말만 붙어 있다. 가덕도 연대봉의 천성봉수대나 부산 녹산의 봉화산 봉수대에서 받은 봉홧불을 밀양으로 연결했다고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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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 정토원과 선진규 법사.

 봉화산을 찾으면 놓쳐선 안 될 곳이 하나 있다. 정상 바로 아래 위치한 봉화산 정토원. 김해읍지에 따르면 가락국에는 불교와 관련된 세 원찰(願刹)이 있었다. 무척산 모은암, 천태산 부은암과 함께 자암(子庵)이 그것으로, 봉화산에 있었다는 것. 봉화산의 옛 이름이 자암산이었던 것이 이를 입증한다. 이후 수차례 사찰 이름이 변하면서 방치되다 봉하마을 출신 선진규(75) 법사가 1958년 동국대 총학생회장 시절 고향 봉화산을 중심으로 농촌계몽운동을 하기 위해 당시 총장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봉화사라 개명하면서 명실공히 사찰로서 터전을 잡았다.
 봉화산에 서 있는 사명대사 상(像)과 정상의 호미든 관음개발성상도 선 법사가 세웠고, 마애불 위를 누르고 있던 커다란 바위를 제거해 마애불이 자유로운 몸이 되도록 한 것도 역시 그였다.
 노 전 대통령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 선 법사는 "이른 아침 이곳으로 등산을 오면 노 전 대통령을 만날 확률이 높다"고 예의 마음씨 좋은 시골 노인처럼 활짝 웃었다. 봉하마을에서 정토원을 거쳐 정상까지 다녀오는 데 1시간, 사자바위를 거쳐 부흥이바위를 다녀오는 데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이동이 불편한 노인들과 함께라면 봉화산 정토원에 차로 진입이 가능하다. 봉하마을에서 왔던 길로 다시 달려 만나는 이정표가 보이는 첫 삼거리에서 '한림 대현 봉화산' 방향으로 우회전 후 두 번째 삼거리에서 '봉화산' 방향으로 역시 우회전하면 정토원 주차장까지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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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하마을을 약간 벗어나면 누렇게 익은 보리밭과 작은 우포늪을 떠오르게 하는 화포천을 만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이 동양 최대의 습지라고 다소 과장되게 자랑하는 화포천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 차를 타고 한림면과 경계인 배수펌프장 쪽으로 달리면 작은 우포늪이 연상될 정도로 푸근하게 다가온다. 갈대숲 곳곳에는 강태공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무척 한가롭다. 도중 영강사란 절을 만난다. 화포천 인근 갈대로 이은 지붕이 눈길을 끈다. 김해 장방리 갈대집이다. 법당 아래 세 동으로, 스님의 요사채 사랑채 아래채로 사용되고 있다. 이 갈대집은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 이전까지는 많았지만 지금은 이곳이 유일하다. 이곳은 낙동강 주변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관광은 물론 건축학과 민속학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인정돼 최근 도 문화재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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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장방이 갈대집. 최근 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절집 주지인 청호 스님은 "제가 기거하는 '영강정(永江亭)'이란 현판이 걸린 요사채는 70년, 사랑채와 아래채는 130년 정도 됐다"고 말한 후 "갈대지붕이 새들에게 안전하다 보니 갈대를 쪼아내고 집을 짓고 있어 이 놈들을 쫓아내는 것이 큰 일"이라고 말했다.
 화포천 쪽으로 내려가면 마을에선 보이지 않지만 현재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다. 장관이다. 보리밭을 따라 한참동안 비포장로를 걸으면 없던 사랑도 생길 정도로 분위기가 그저 그만이다. 노 전 대통령 부부도 이 길을 걸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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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모 자원봉사지원센터 내부.

 마을 입구의 '노사모 자원봉사지원센터'도 한번 들러보자. 주민들이 농기계를 보관하던 200여 ㎡ 규모의 창고를 개조, 지난 4월 25일 문을 열었다. 일종의 '작은 노사모 기념관'인 셈이다. 한마디로 노 전 대통령과 노사모가 걸어온 궤적을 관조할 수 있다. 그와 관련된 서적과 캐릭터도 전시돼 있다. 특히 '바보' 노무현이 정치인으로 우직하게 걸어온 그간의 역정을 동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

 #봉하마을 단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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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서 매일 봉하마을로 출퇴근하는 최점금 씨와 그의 애마인 트럭.
 
봉하마을 매점(쉼터)를 지나 노 전 대통령 사저로 가는 도중 길 좌측으로 소감이나 격려문을 적을 수 있게 하얀 보드판이 길게 진열돼 있다. 마을에서 직접 종이를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노 전 대통령의 '골수팬'이 매일 교체하고 있다. 주인공은 최점금 씨로, 그는 매일 부산에서 출퇴근한다. 누가 시켜서, 밥값을 받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로 내려오기 전부터 이미 보드판을 설치해 누구보다도 그의 귀향을 반긴 인물이다. 밀짚모자를 쓴 채 왼쪽 가슴 주머니에 여러 개의 검은 색 매직이 꼽혀 있으면 영락없이 최 씨라고 보면 된다.
 보드판의 종이를 매일 교체해 무엇을 할려고 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후에 역사의 자료로 보관하고 싶어서"라고 짧게 말했다.
 또 한 사람은 부산 '아지매'라고 김 해설사가 전했다. 김 해설사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이 손님들을 위해 매일 수 차례씩 나오다 보니 눈에 띄어 그 분에게 "오늘도 또 오셨네요"라고 한마디 인사를 건넨 이후 그분은 신이 나서 거의 매일 이 마을을 찾고 있다고 한다.

 #맛집-고향의 맛 간직한 화포 메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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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어구이와 메기국.

김해사람들이 예부터 즐겨 먹던 메기국 전문점인 '화포 메기국'(055-342-6266). 봉하마을이 속한 진영읍과 이웃한 한림면 안하리 화포천변에 위치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에 온 이후 네 번이나 다녀갔을 정도로 고향의 맛을 간직하고 있다. 김해사람들이 이 집을 모르면 간첩이라 불러도 될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메기를 삶아 뼈와 살을 분리시킨 후 뼈로 끓인 육수에 살코기를 넣어 2~3시간 고아 숙주 정구지 마늘 파 그리고 갖은 양념을 곁들인 김해 고유의 맛이다. 노 전 대통령은 "메거지(메기의 김해 사투리) 맛이 옛날 그대로"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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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포메기국 식당의 안주인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주방에서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3대째 내려오는 80년 전통의 '화포 메기국'집은 봉하마을에서 차로 정확히 8㎞ 떨어져 있다. 한림면 소재지를 지나 굴다리를 통과한 후 '부산 명동' 방면으로 우회전한 후 두 번째 좌회전 하면 간판이 바로 보인다.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허럼한 집이다. 마늘을 듬뿍 넣어 간장 구이 방식으로 구운 장어구이도 일품이다. 메기국 5000원, 장어구이 1만3000원.
 차로 이동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구체적인 경로를 설명하자면 봉하마을에서 본산리(진영 진례IC) 방향으로 가다 첫 삼거리에서 한림 대현 봉화산 방향 우회전~진말 정류장 지나~갈림길에서 우회전((주)청운 지나)~갈림길(좌측 4차선 도로 대신 2차선(구 도로) 방향 직진하면 성심카센터 지나)~명진빌라 앞에서(한림초등) 좌회전~삼거리서 우회전~한림면소재지 지나~굴다리 통과~부산 명동 방향 우회전 후 두 번째 좌회전하면 화포 메기국 간판이 바로 보인다.
 봉하마을 '소고기국밥'(4000원)도 맛있다. 간판에는 봉하전통테마마을로 적혀 있다. 노 전 대통령 부부가 내려오던 날 방문객들에게 국밥을 무료로 대접한 게 계기가 돼 생겨난 식당이다. 이후 노 전 대통령 부부가 손님들과 자주 식사를 했던 곳이다. 최근에는 콩국수 장군차국수도 메뉴로 올라와 있다.  글·사진=이흥곤 기자
hung@kookje.co.kr


  봉하마을 구경이 대충 끝났으면 이제 마을 뒷산인 봉화산에 올라보자.

 이 산행기는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인 2005년 4월 국제신문 섹션신문 '주말&'에 소개된 글이다. 최근 같은 코스로 다시 한번 더 다녀와 최신 버전으로 약간 수정을 해서 올린다.

 봉화산 종주는 이웃한 한림면에서 출발, 넉넉잡아 1시간30분이면 봉하마을로 내려온다. 이럴 경우 차를 가지러 택시를 이용해야 합니다. 이런 수고를 덜려면 봉하마을에서 정상을 거쳐 한림쪽으로 갔다가 되돌아와도 됩니다.  

# 노 전 대통령 고향 봉하마을 뒷산 봉화산 산행기

낮다고 비웃지 마세요 조망은 고봉준령급

넓은 들판에 나홀로 해발 140m 살짝 솟아
산중턱 사자바위 정기는 큰 인물 배출하고
정상 관음개발성상 미소는 자비를 베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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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5 4월 봉화산 사자바위에서 본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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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같은 장소에서 내려다본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 사저의 있고 없고의 차이를 느껴보자.

 김해의 내로라하는 산을 꼽으라면 대개 은하사를 병풍처럼 감싼 신어산과 낙동강을 양쪽으로 굽어보는 무척산, 그리고 장유대청계곡을 품고 있는 용지봉이 별 고민없이 선택된다.
 근자에 와서 세인의 관심을 부쩍 끄는 산이 하나 더 생겼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배출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뒷산인 봉화산이다. 겉모습으론 산이라 불리기엔 약간 쑥스런 야트막한 야산이다.
 '백견(百見)이 불여일등(不如一登)'이라 했던가. 겉모습으로 보면 봉화산은 하고 많은 산 중의 하나일지 모르나 주변 지형과의 어울림이나 그 속내는 여러모로 특이하다.
 너른 들판에 불쑥 홀로 솟아 겨우 해발 140m밖에 안되는 산이지만 막상 오르고 나면 고봉준령에 서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조망이 기가 막히다. 아무리 둘러봐도 솟아오른 곳은 이곳 봉화산뿐이다.
 마을 주민들은 "한반도에 이처럼 낮은 산이면서도 조망이 확 트인 산은 아마 봉화산 뿐 일 것"이라고 말한다.
뭐니뭐니해도 봉화산을 대표하는 볼거리는 사자바위. 대통령 생가 앞 주차장에서 봉화산을 바라보면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의 바위군을 볼 수 있다. 산 아래를 바라보며 호령하는 우측 바위가 사자머리이고, 이 바위 좌측 커다란 바위가 부엉이바위(표기는 부흥이)로 사자 다리에 해당된다. 옛날부터 부엉이가 많이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봉하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사자바위는 고대인들이 고등종교가 들어오기 전 제사를 올린 터로 알려져 있다. 오랜 정성이 축적된 곳이기에 정기가 배어 있다는 것이 마을 어르신들의 설명이다. 바위 곳곳에는 움푹 팬 곳이 몇 곳 있어 이곳이 재물을 담은 감실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사람들은 그간 다녀간 많은 지관들의 설명을 종합해 "봉화산이 앉은 터, 사자바위의 정기, 명당인 대통령 선친의 묘와 함께 마을 정중앙에 골이 패이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대나무를 심은 주민들의 비보(裨補) 노력 등이 큰 인물 탄생의 배경"이라고 전했다.
 산행은 진영읍과 이웃한 한림면에서 시작했다. 산행 후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인 봉하마을을 여유있게 둘러보기 위해서다.
 한림면사무소~한림초등학교 후문~단감나무 과수원~체육공원~쉼터(벤치)~영강사 갈림길~잇단 물탱크~정상(호미든 관음개발성상)~사색의 숲~봉화대~사자바위~봉화산~마애불~부엉이바위(토굴)~대통령 생가~봉하마을 주차장 순. 넉넉잡아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그야말로 '마실'이다. 산길은 반듯하지만 마사토라 미끄러우니 등산화는 꼭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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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림면사무소에 주차했다면 면사무소를 나와 좌측으로 약간 간 후 다시 면사무소를 끼고 좌측으로 발길을 옮긴다. 정면에 '삼각당'이라 적힌 간판이 보이면 우측으로, 다시 3m 뒤 좌측 골목길로 들어선다. 한림초등교 후문을 지나면 오름길이 시작되며 이내 갈림길. 우측 아름드리 소나무 쪽 대신 좌측으로 간다. 길 옆에는 마늘밭과 머구가 자라고 있다. 100m쯤 오르면 갈림길, 오르막인 우측으로 향한다. 곧 등산로 입구. '호미든 관음성상 2.2㎞'.라 적힌 이정표가 들머리임을 알려준다. 하얀 꽃이 만개한 탱자나무길로 산행이 시작된다.
 천주교 공동묘지를 지나면 단감나무 과수원. 하지만 가지치기를 하지 않았다. 산에서 만난 한림면 한 주민은 "근자에 단감 시세가 워낙 좋지 않아 올핸 절반 이상이 농사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농부의 무거운 맘에 아랑곳 않고 길 옆에는 애기똥풀 벼룩나물 별꽃 제비꽃이 나그네를 반긴다.
 체육공원을 지나면 침목을 댄 수많은 계단이 기다린다. 숨을 헉헉거리며 올라서면 잠시 쉬어가라고 6~7개의 벤치가 기다린다.
 이제부터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솔밭길이다. 도중 좌우로 열린 길을 만난다. 우측은 장방 본부락 진말, 좌측은 영강사나 이 절 근처 한림낚시터로 가는 길이다. 약수암 자광사 영강사 쪽에서 올라오는 길은 예부터 도둑이 많아 도둑골이라 불린다. 오래 전 김해에서 이 도둑골을 거쳐 창녕의 영산과 대구를 거쳐 서울로 갔다고 전해온다.
이후 물탱크를 만난다. 주변이 모두 단감나무밭이라 물을 대기 위한 것이리라.
 갑자기 시야가 트이면서 정면에 호미든 관음개발성상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곧 갈림길. 어느 길로 가도 상관없다. 우연히 만난 동네 할머니와 아주머니은 이 봉화산에는 특히 고사리와 뱀이 많다고 말했다.
 이번 산행에서 갈림길을 만나면 이정표 기준으로 '호미든 관음개발상' 방향, 이정표가 없으면 그냥 직전하면 정상가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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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탱크를 또 지나 왼쪽 너른 길을 만난다. 봉하마을 쪽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곧 갈림길. 왼쪽은 우회하는 길, 오른쪽은 지름길. 정상 입구에서 결국 만난다. 5분 뒤 정상. 뜻밖에도 왼손은 연꽃, 오른손은 호미를 든 관음개발성상(우측 사진)이다. 비로소 대통령 생가가 있는 봉하마을이 시야에 들어온다.

 잠시 주변 사방의 조망을 살펴보자. 관음상 뒤 동쪽의 높은 산 무척산을 중심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금동산 석용산 신어산 분성산 경운산 팔판산 불모산 장유봉 신정산 대암산 정병산 천주산 용지봉 농바위 구월산 작대산 무령산 백월산 천마산 마금산 함박산 종암산 덕암산 영취산 화왕산 산성산 청룡산 만어산 구천산 금오산 등 김해 창원 창녕 밀양 등지의 웬만한 산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하산은 봉화산 정토원(옛 봉화사) 방향으로 내려선다. 곧 사색의 숲. 왼쪽 봉화대 방향으로 간다. 산죽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봉화대이고 그 바로 밑이 전망이 빼어난 사자바위. 바위 곳곳에는 세수대야 크기의 구멍이 여럿 뚫려 있다. 봉하마을이 발아래 시원하게 펼쳐진다. 노 전 대통령 사저와 생가 등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이어지는 동선은 왔던 길 대신 사자바위 아래로 열린 곳으로 내려선다. 사명대사 상(像)과 봉화산 정토원을 지나면 곧 봉화산 마애불. 이정표가 있어 찾기 쉽다. 안내판 왼쪽 끝 바위틈 사이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암벽이 떨어져나가 누워있지만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높이 2.48m. 조금 더 내려가면 등로 우측으로 좁다란 산길이 하나 보인다. 진입하면 너른 터로, 이 터 우측 바위 사이로 굴이 하나 보인다. 안을 들여다보면 예상외로 깊다. 노 전 대통령 당선 후 이 토굴이 모 방송에 방영되면서 한때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굴의 기(氣)를 받기 위해 몰려든 곳이기도 하다.
 토굴 옆에는 물줄기는 가늘지만 3단쯤 돼 보이는 실폭포가 있다. 이 정도 높이의 산에 물이 흘러내리는 것 또한 흔한 광경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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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전 대통령 사저가 지어지기 전 봉하마을에서 본 사자바위(오른쪽)와 부엉이바위. 왼쪽 맨 뒤 봉우리가 봉화산 정상이며, 자세히 보면 호미든 관음개발성상이 확인된다. 부엉이 바위는 안내판 뒤에 보이는 바위이다. 크게 보면 사자바위가 사자의 머리에 해당되고, 부엉이 바위는 웅크린 사자의 다리에 해당된다.

 다시 등산로로 나와 하산을 해도 되지만 잠시 왔던 길로 조금 올라 실폭포 상류 물길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목교를 건너자. 부엉이바위를 보기 위해서다. 2분 정도면 도달한다. 사자바위 못지 않은 멋진 전망대다. 봉하마을에서 보면 우측 산 아래를 바라보며 호령하는 듯한 큰 바위가 사자바위이고, 이 바위 좌측 바위가 바로 이곳 부엉이바위(표기는 부흥이)이다. 예부터 부엉이가 많이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즉, 마을에서 이곳을 바라보면 사자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으로 사자바위가 사자 머리, 부엉이바위가 사자 다리에 해당된다.
 부엉이바위에서 버섯재배장을 거쳐 마을 주차장까지는 대략 6분 정도 걸린다.

 #떠나기전에

 너른 들판에 불쑥 솟은 봉화산(熢火山)에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봉화대가 있다. 기록만 남아있을 뿐 봉화대는 복원되지 않았다. 주민들은 가덕도 연대봉의 천성봉수대나 부산 녹산의 봉화산 봉수대에서 받은 봉홧불을 밀양으로 연결했다고 말했다.
 또 한가지. 김해읍지에 따르면 가락국에는 불교와 관련된 세 원찰(願刹)이 있었다. 무척산 모은암(母恩庵), 삼랑진 천태산 부은암(父恩庵)과 함께 자암(子庵)이 그것으로, 봉화산에 있었다는 것. 봉화산의 옛 이름이 자암산이었던 것은 이를 입증한다. 지금은 그 터에 이 고장 출신인 선진규(75) 법사가 지난 1950년대 중반부터 봉화산 정토원을 세워 불심을 전하고 있다.
 봉화산 정상의 호미든 관음개발성상도 선 법사가 세웠고, 마애불 위를 누르고 있던 커다란 바위를 제거해 마애불이 자유로운 몸이 되도록 한 것도 역시 그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초창기 봉하마을에는 평일 100명, 주말 500명 정도 찾았고, 당선 후 맞은 첫 새해 일출 땐 전국에서 1000여 명이 봉화산을 찾았다.
 5년이 지나 노 전 대통령이 귀향한 후 101일째인 지난 6월 4일까지 총 방문객은 무려 41만3400명에 달한다. 평일 평균 4100명, 주말이면 2만 명을 상회한다. 탐방객이 깨 많다는 우리나라 국립공원의 연 탐방객이 50~60만 명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이다. 아마 국내 관광지 중 49가구에 거주 인구가 130여 명에 불과한 김해 봉하마을이 가장 인기가 높다가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 때문에 지난 2003년 1월부터 노 전 대통령이 귀향하기 직전까지 혼자서 근무하던 문화관광해설사는 이후 3명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일손이 부족하다. 이곳 터줏대감 격인 김민정 문화관광해설사는 "주말이면 밀려오는 관광객들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말했다.

 #교통편

 부산 서부버스터미널에서 김해행 시외버스는 오전 7시20분부터 50분 간격으로 출발한다. 1800원. 김해시외버스터미널에선 동부교통 56, 58-1번 버스를 타면 된다. 56번은 오전 6시30, 8시10, 9시10, 11시, 낮 12시, 오후 1시50분, 58-1번은 오전 6시, 8시30, 10시40, 오후 1시에 있다. 900원.
 날머리 봉하마을에서 시외버스터미널행 버스는 낮 12시20분, 오후 2시40, 4시40, 7시(막차)에 출발한다. 김해터미널에서 부산행 시외버스는 오후 2시30, 4시, 5시, 5시30, 6시40, 7시20, 8시40분(막차)에 있다. 1500원.
 기차도 있다. 부전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김해 한림정역에서 내리면 된다. 부전역 기준 오전 5시, 6시57분, 오후 1시10분. 3000원. 사상 구포 화명역에서도 탈 수 있다. 한림정역에서 한림면사무소까지는 걸어서 5분.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이정표 기준으로 남해고속도로 진례IC~진영 방향 우회전~신용삼거리서 김해 부산 방향 우회전~고개 넘어 빙그레 공장 지나~명동삼거리서 좌회전(명동주유소)~한림면사무소 순으로 가면 된다. 봉하마을에서 한림면까지는 택시(055-342-7878, 6929)를 이용하면 된다. 8000원 내외. 남포동에서 출발하는 좌석버스 309번도 김해터미널 앞에 정차한다.




 

지난 2004년 발효된 칠레와의 FTA(자유무역협정) 불똥
복숭아 10년 내 관세철폐품목 분류, 폐업시 국가차원 지원
대신 관세철폐 제외 품목 사과나무로 점차 대체되고 있어

이 아름다운 진홍빛의 복사꽃대궐이 FTA 때문에 절반 이상 사라졌다. 34번 국도변에서는 이제 복사꽃을 거의 불 수 없고 산기슭으로 가야 볼 수 있다. 불과 4년 전의 이 사진은 이제 추억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황금 은어의 서식지로 유명한 오십천변에 만개한 복사꽃.
영덕의 자랑 복사꽃대궐은 이제 절반 이상 사과꽃으로 대체되고 있다. 지금 영덕은 복사꽃이 지고 사과꽃이 피어나고 있다.

 떠나기전 영덕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게 뭐냐고 물었더니 십중팔구 대게였다. 다음은 복사꽃이었다. 영덕에 와서 대게와 복사꽃 이외에 내세울 게 있으면 말해보라는 물음에 군민들은 한결같이 오십천 황금 은어와 동해 일출을 꼽았다.

흔히 영덕은 해맞이 공원에서의 일출과 대게를 테마로 한 겨울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법. 사실 대게는 4월이 제철이다. 일출과 대게가 한 묶음이 된 것은 아마도 동해안 일출을 보며 새해 소망을 빌러 영덕을 찾았는데 마침 대게가 그물에 걸리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귓전에 들렸기 때문이리라.

예부터 영덕에선 이렇게 전해온다.
"오십천변에 복사꽃이 피는 음력 춘삼월이 돼야 비로소 대게도 완전히 살이 오르고 은어 또한 동해안에서 오십천으로 거슬러 오기 시작한다." 전국의 미식가들이 이달부터 영덕으로 모여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 입맛 찾아-살 통통 오른 영덕대게 "이거 게판이구만~"

대게 원조마을.


 대게는 기온이 내려가는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맛볼 수 있다. 나머지 기간은 나라에서 정한 금어기다. 속살이 꽉 차고 담백한 맛을 보려면 2월말부터 4월 사이가 제격이지만 그 중 절정은 복사꽃이 피는 4월 초순이다. 어민들은 한겨울에 잡히는 대게는 4월 대게의 맛에 비할 바가 못된다고 귀띔한다.

약간의 단맛이 나는 듯 하면서도 쫄깃쫄깃하고 담백해 절대 물리지 않는 대게는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 수라상에 단골로 올랐다. 지난 1999년 한일어업협정으로 독도 근처 대화퇴 어장을 잃어 어획량이 현저히 줄어든 바람에 가격은 사실 서민들에게 부담될 만큼 무지 비싸다. 국내산은 마리당 대략 6만~11만 원, 수입산은 3만~6만 원선. 살이 꽉 찬 이른바 국내산 '박달대게'는 마리당 10만 원을 호가한다. 20만 원 하는 '박달대게'도 간혹 잡힌단다.

4인 가족이 찾았다면 값싼 홍게와 수입산을 곁들여 12만 원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미식가가 아니라면 수입산과 국내산은 거의 구별하기 힘들다. 동해안 인근에서 북한 일본 러시아와 우리나라 배가 비슷한 시기에 잡기 때문에 큰 차이가 없다는 것.
대게의 진면모를 보려면 강구항의 대게 위판장을 찾아야 한다. 요즘엔 주말 오전 8시를 전후해 열린다. '박달대게'에서부터 살 대신 물로 가득 찬 '물게'에 이르기까지 10등급으로 세분돼 위판장 바닥에 도열된다. 능숙한 경매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중도매인의 손이 연신 움직인다. 분명 볼거리다.

"제 얼굴보다 커지요."

"제 얼굴만큼 커지요."

# 눈맛 찾아 - 복사꽃 천지 34번 국도를 가지 않고 낭만을 논하지 말지어다

딱히 물어볼 필요가 없다. 영덕읍내에서 그저 안동 방향 34번 국도를 타고 달리면 된다. 초입에는 군민운동장 뒤로 오십천과 인접한 강변도로를 타고 달린다. 길이만도 무려 12㎞. 국도변과 들판, 그리고 산기슭이 진홍빛의 복사꽃대궐이다. 발품을 팔아 약간 높은 언덕배기로 오르면 복사꽃 천지는 가히 무릉도원이라 불러도 될 성 싶다.


영덕에는 원래 복사꽃이 없었다. 지난 1959년 태풍 사라호가 지나간 뒤 생계에 도움이 될까 하여 오십천변에 우연히 복숭아 나무를 심었다. 그게 히트를 친 것이다.
물빠짐이 잘 되는 사질토인 데다 일사량도 좋고 무엇보다 칠보산과 주왕산이 바람을 막아줬다. 여기에 옥계계곡에서 내려오는 오십천의 물줄기가 마르지 않아 그야말로 복숭아 농사를 위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차츰 복숭아 재배지가 늘어 한때는 100만 평이 훨씬 넘었다.

하지만 도로변에는 간혹 아직 피지 않았거나 하얀 꽃봉우리를 단 사과꽃이 자주 눈에 띄었다. 사과꽃은 4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한다. 알고보니 자유무역협정(FTA)의 불똥이 영덕까지 튄 것이다. 지난 2004년 발효된 한·칠레 FTA로 인해 복숭아가 10년 내 관세철폐품목으로 분류돼 4년 전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복숭아 폐업 지원사업이 진행돼 농민이 원할 경우 관세철폐 제외 품목인 사과나무로 점차 대체되고 있다는 것. 현재 전체 복숭아 경작지의 절반 정도가 사과나무로 대체됐다. FTA가 영덕의 명소인 복사꽃길을 앗아간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밀려드는 건 기자만은 아닐 것이다.

# 손맛 찾아 - 해맞이 공원· 30㎞ 해안도로 "그래 봄속을 달리는 거야"

그 유명한 7번 국도가 동해안 드라이브길이라 알려져 있지만 영덕 구간은 최남단 남정면과 최북단 병곡면 일부만 바다와 접할 뿐 나머지 구간에선 바다를 볼 수 없다. 대신 강구항에서 고래불해수욕장까지 30여 ㎞의 구간이 20번 군도인 2차선 해안도로이다. 도로 한 쪽에는 해풍에 말리는 돌미역과 가자미가 널려 있고 갯바위에는 낚시꾼들이 삼삼오오 세월을 낚고 있다. 우리네 한적한 갯가의 전형이다. 워낙 바다와 근접해 있어 차창 밖으로 파도소리까지 들린다. 간혹 보이는 차들도 모두 드라이브 나선 타지 차량이라 쉬엄쉬엄 간다.
유난히 갈매기가 많은 금진포구와 하저해수욕장을 지나면 첫 기착지인 해맞이공원. 지난 1997년 이곳에 산불이 난 후 군이 새롭게 조성한 떠오르는 명소이다. 등대가 위치한 아랫쪽은 창포리, 200m 떨어진 위쪽은 대탄리 공원이다. 총 면적 3만 평. 바다로 이어지는 절개지에는 산책로와 쉼터가 조성돼 있으며 그 주변에는 만개한 노란 수선화를 시작으로 영산홍 나리꽃 해당화 등이 7, 8월까지 해송과 어울린다.

            대게등대.

최근 새로 조성한 20m 높이의 '대게등대'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기존 10m 높이의 밋밋한 등대 대신 일반인들도 올라갈 수 있는 빨간색 전망대에 동(銅)으로 만든 대게 집게모양의 조형물을 덧씌워 대게의 고장임을 강조하고 있다. 전망대에 서면 대게 이름이 유래됐다는 축산항의 죽도(竹島)등대와 남쪽으론 호미곶도 볼 수 있다.

일출.
바다에서 본 풍력발전단지. 장관이다.

해맞이공원 맞은편 둔덕 쪽엔 풍력발전단지가 있다. 높이 80m의 대형 풍력발전기가 해풍에 의해 힘찬 몸짓을 하고 있다. 북쪽으로 더 달리면 대게 원조마을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 경정리 차유마을에 닿고, 여기서 6㎞쯤 더 달리면 대진해수욕장과 고래불해수욕장을 잇따라 만난다.
또 한가지. 삼사해상공원 내 영덕어촌민속전시관도 꼭 들러보자. 지난 2005년 12월 개관한 이곳은 대게 어로법 등 대게와 관련한 모든 것이 전시돼 있다.
영덕어촌민속전시관.
     

# 영덕 맛집 - 황금빛 오십천 은어 맛보세요

강구항에는 영덕 근해자망 외에 인근 구룡포나 울진 후포의 배들도 강구수협에서 대게를 위판한다. 하지만 영덕근해자망협회는 영덕 배가 잡은 대게 이외에는 국내산임을 입증하는 초록색 라벨을 붙여주지 않는다. 이때문에 구룡포 등 외지 배들이 잡은 대게는 간혹 수입산으로 오해를 산다. 그 만큼 유통 및 판매 체계가 체계화돼 있지 않다. 소비자 입장에선 100% 신뢰가 가지 않는다.

 싸고 믿을 만한 대게집을 한 곳 추천한다. 영덕대게협동조합직매장(054-734-0691). 경보화석박물관을 지나 삼사해상공원에서 300m쯤 못미친 7번 국도 대로변에 위치해 있다. 맞은 편엔 오션뷰CC. 전국을 대상으로 대게 택배를 전문으로 하며 강구항 내 대게집보다 가격이 20%쯤 싸다. 가위로 대게를 먹기좋게 잘라주며 먹는 방법도 가르쳐 준다. 게장 비빔밥도 즉석에서 만들어주며 밑반찬은 모두 직접 농사를 지은 유기농산물로 만든다. 산에서 직접 캔 냉이나 달래 등 봄나물도 맛볼 수 있다. 주인 노부부의 후덕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한번 이곳을 찾으면 반드시 단골이 된다.

화림산가든(054-734-0945)은 은어 전문 요리점. 전국에서 은어가 잡히는 곳은 많지만 등줄기에 황금빛이 보이는 오십천의 은어는 유일하게 수라상에 올랐을 정도로 맛이 빼어나다. 복사꽃이 피는 4월부터 동해에서 오십천으로 올라오기 시작해 지금은 튀김을 할 정도로 작지만 6, 7월부턴 수박향이 진해지면서 회나 매운탕으로 인기가 높다. 특히 송이가 나는 9월이 되면 뱃속의 내장을 제거한 후 송이를 넣어 굽는 구이맛에 반해 일본인 단골들이 많이 찾는다.

은어매운탕.
은어회.

-배내골 배내산장 김성달 씨에게 듣는 배내골의 어제와 오늘

영남알프스 산군으로 둘러싸인 배내골 남쪽의 전경. 사진 좌측으로 향로봉과 사진상으로 보이지 않지만 향로봉 뒤로 향로산 재약산 천황산이 포진해 있고, 우측으로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이 확인된다. 울주에서 발원한 배내골 물은 고점교 인근에서 방향을 틀어 좌측 밀양호로 흘러 들어간다. 우측 하단부 도로는 에덴밸리 스키장 방향으로 이어진다. 항공사진 제공=양산시

 가을의 전령 억새의 군무가 한창인 지난해 10월 어느날 기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습니다. 내용은 대략 이랬습니다.
 
밀양시가 국내 최대 억새군락지인 재약산 사자평 인근에 생태공원을 조성하면서 배내골로 이어지는 기존 등산로를 폐쇄, 일반 산꾼들이 하산길을 찾지 못해 한바탕 큰 혼란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발빠른 산꾼들이야 산행 기점인 밀양 표충사 쪽으로 발걸음을 되돌렸지만 체력이 떨어진 일부 산꾼들은 배내골로 하산하기 위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광활한 억새밭을 헤매다 자정 무렵 겨우 구조됐다고 합니다. 일부 산꾼들은 탈수 증세를 보여 조금만 늦었더라면 목숨까지 잃는 사태까지 갈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습니다.

 그는 밀양시가 산중 습지를 보호하기 위해 생태공원을 조성하면서 우회 길 등 대체 등산로를 알리는 안내판을 만들지 않고 '펜스 진입시 자연보호법에 따라 엄벌한다'는 내용의 경고문만 눈에 띄게 만들어놓아 이를 보는 순간 허탈감으로 맥이 풀렸다고 합니다.

 영남알프스로 둘러싸여 산의 고장임을 내세우는 밀양시의 이율배반적인 행정을 따끔하게 지적한 그는 배내골에서 조그만 '배내산장'을 운영하는 산장지기 김성달(55) 씨입니다.

 그가 운영하는 배내산장은 주변의 화려한 펜션과 달리 마당 곳곳엔 그가 직접 깎은 크고 작은 솟대와 장승이 금낭화 등 야생화와 어울려 널브러져 있고 황토로 만든 건물 내부에는 시와 그림, 각종 토기 및 자기들과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있습니다. 한눈에 여유로움과 더불어 삶의 여백이 묻어나는 공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배내산장 김성달 씨 부부. 등 뒤 느티나무는 21년 전 김 씨가 배내골로 들어와서 심었단다. 
          장승도 모두 그가 깎았다.

 배내산장 식당 건무 내부. 시와 그림, 각종 토기와 자기들이 전시돼 있다. 삶의 여백이 묻어나는 공간이다.


             배내산장 마당 곳곳에는 산장지기 김성달 씨가 직접 깎은 솟대와 장승이 곳곳에 널려 있다. 
             우측의 건물은 뒷간입니다. 

 뒷간 문에는 창호지가 발린 문이 운치를 더해 줍니다.
                뒤뜰에는 직접 지은 조그만 황토방. 
               군불을 때는 김성달 씨.

 산장을 좀 더 둘러봤습니다. 산장을 감싸고 있는 늘푸른 대숲이 인상적인 뒤뜰에는 군불을 때는 조그만 황토집과 아궁이가 눈에 띄고 바로 옆에는 투박한 긴 탁자와 그네 하나가 벗하며 놀고 있습니다. 뒷간도 특이합니다. 창호지를 발라 운치를 더해줍니다. 그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관음증 수준으로 치닫게 됩니다.

 관광경영학을 전공한 그는 도시에서 반듯한 직장을 다니다 21년 전 어느날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가족들은 이듬해 합류했습니다. 지금이야 신작로가 뚫려 휑하니 내달리면 되지만 당시엔 비만 오면 길이 새로 만들어지는, 경운기 한 대 겨우 오갈 수 있는 거친 임도 수준의 길이 유일한 통행로였다고 합니다.

 그는 지독한 산꾼이었습니다. 배내골로 오기 전 이미 영축산 신불산 등을 100여 차례나 올랐고 최근에는 안나푸르나와 차마고도 트레킹도 부인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비록 그는 자격증은 없지만 배내골에서 유일하게 산악구조대원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배내골을 중심으로 밀양 울산 양산 지역 등산로를 두루 머릿속에 꿰고 있으면서 두 다리 튼튼한 이는 배내골에서 김 씨가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주말레저팀에 제보한 것도 그의 늘상 업무 중 하나였던 것입니다.

경남 창녕이 고향인 김성달 씨는 지금 배내골에선 없어서는 안 될 약방의 감초와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강산이 두 번 변할 동안 배내골 원주민 어른들과 동고동락해온 터라 4년 전에는 '굴러온 돌' 중 처음으로 마을 당상제의 제주로 임명돼 당상나무 앞에서 지극 정성으로 넙죽 절하며 축원문을 읽었고 이듬해부턴 반장과 새마을위원 그리고 지금은 무분별한 개발을 막기 위한 개발위원직을 맡고 있습니다. 오래 전 주민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언양버스가 마을을 경유토록 한 것도 그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고들 합니다. 

새끼줄로 둘러쳐져 있는 마을 당상나무.

당상나무를 내려다보는 당집.


 산골에 있다 보니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 평소 풍수 주역 상서 등을 공부하며 조금씩 풍월을 읊자 이제는 마을 어른들이 돌아가시면 묘 자리 쓰기와 하관식 등의 절차는 모두 그의 몫이 돼 버렸습니다. 그가 없으면 장례가 올스톱 되는지라 상을 치를 때쯤이면 김 씨를 대기시켜놓을 정도입니다. 문득 마을의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영화 속의 주인공 '홍반장'이 떠오르는군요.

 민박을 치며 다양한 음식을 파는 김 씨는 다소 엉뚱하게도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배내골의 정서와 문화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팔고 싶다고 합니다. 기자가 김 씨를 찾은 진짜 이유입니다. 21년간 배내골서 거주한 '굴러온 돌' 김성달 씨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배내골의 어제와 오늘을  들어봤습니다.

(2)편은 여기 클릭해 주세요.
'한 맺힌 민초들의 삶과 더불어 사라진 돌배꽃-배내골 이야기(2) http://hung.kookje.co.kr/393

       돌배나무가 많아 배내골이라 명명됐다는 설이 나올 정도로 배내골에는 돌배나무가 많았지만 지금은
       마을길을 넓히기 위해 수변의 돌배나무가 대부분 사라져 산기슭에만 일부 남아 있다. 하얀꽃이 돌배
       나무, 분홍빛은 산벚나무.
      배내산장 김성달 산장지기. 뒤로 보이는 느티나무가 바로 김 씨가 21년 전에 심은 것이다.
    벚꽃이 계곡 주변에 만개한 가운데 원동면 장선리의 송림이 한 폭의 한국화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배내골은 어떤 곳

배내골은 울산시 울주군에서 발원, 양산 원동면을 거쳐 밀양호(댐)로 흘러들어가는 계곡을 말한다. 예나 지금이나 수려한 경관 덕분에 울산 밀양 양산에선 각각 울산 배내골, 밀양 배내골, 양산 배내골로 부르지만, 흔히 말하는 배내골은 양산지역에 가장 많이 걸쳐 있어 대체로 양산 배내골로 보면 된다. 실제로 배내골은 '양산 8경'에만 포함돼 있을 뿐 '울산 12경'이나 밀양의 주요 관광지에는 언급조차 없다.

 산꾼들의 관점에서 보면 배내골은 천황 재약산으로 대표되는 영남알프스 남서부 능선과 간월 신불 영축산 등 영남알프스 남동부 능선을 잇는 고갯마루인 배내고개에서 밀양 금오산과 양산 안전 축천산을 잇는 배태고개까지의 70리(약 28㎞) 계곡을 의미한다. 

 
 좀 더 피부에 와닿게 설명하면 언양에서 석남사를 거쳐 밀양으로 넘어가는 옛 24번 국도를 타고 오다 만나는 갈림길에서 69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배내고개를 넘어도 되고, 원동역에서 원동휴양림과 신흥사를 잇따라 지나 상수도 보호구역임을 알리는 대형 이정석이 서 있는 배태고개를 지나면 만날 수 있다. 최근에는 경부고속도로 양산IC로 나와 어곡터널과 신불산 공원묘지나 에덴밸리스키장을 지나면 손쉽게 접근이 가능해 부산 쪽에선 대부분 이 길을 이용한다.

배태고개.

배내고개. 보이는 산은 능동산.



■배내골이라는 이름의 기원
배내산장지기 김성달 씨는 배내골이라는 이름의 기원을 여러 방면으로 나름대로 분석했다.
우선 땅의 생김새로 본 측면.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배내골은 배가 바다에 떠 있는 형상인, 전형적인 행주형(行舟形)의 지세다.

김 씨는 이를 주변 지세를 근거로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배내골을 하나의 배로 가정할 때 골짝의 두 진입로 중 해발고도가 낮은 배태고개를 뱃머리로, 약간 더 높은 배내고개를 배의 뒷부분인 선미로 분석했다. 또 배내골을 감싸고 있는 영남알프스 남서부, 남동부 능선은 각각 밀양 얼음골이나 양산 통도사에서 보면 거의 직벽이라 양쪽 산줄기를 배의 측면으로 간주했다. 덧붙이자면 예부터 행주형 지세에서 배가 떠나면 흉하다 하여 비보(裨補) 차원에서 인근에 지명으로나마 포구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배태고개 아래의 원동면 영포리 내포리 등이 그 예에 해당된다고 한다.

배내골의 배내는 또 갓난아이의 저고리인 배냇저고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산으로 옴폭 둘러싸인 배내골이 어머니의 자궁(뱃속)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땅으로 풀이된다는 것. 배내산장이 위치한 양산 원동면 선리의 태봉(胎峰)이라는 마을 이름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또 하나는 예부터 냇가에 돌배나무가 즐비하다 하여 '배 리(梨)' 자와 '내 천(川)' 자의 뜻만 차용해 배내골로 불리게 됐다는 설이다.  가장 널리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설이다. 이천리(梨川里)라는 지명 또한 실제로 울산 쪽 배내골의 명소인 철구소 인근에 존재한다. 아쉽게도 지금의 배내골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도로를 넓히고 펜션을 지으면서 냇가의 돌배나무는 거의 잘려나가 일부 산기슭에 명맥만 유지돼 매년 5월이면 겨우 하얀 배꽃을 볼 수 있을 정도다. 해서, 그 흔하디 흔한 돌배주 맛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게 됐다.

지워지지 않는 질곡의 삶 터전, 배내골
세상의 모든 만물이 음양의 조화에서 벗어날 수 없듯 사람 사는 땅도 예외가 아니다. 배내골은 수려한 산세와 빼어난 계곡미가 아름다워 천혜의 자연경관이라고는 하지만 돌이켜보면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거칠고 척박한 오지 중 오지였다는 것이 김성달 씨의 설명이다. 험준한 산줄기로 둘러싸여 외부와 단절돼 있고 사람의 왕래 또한 드문, 풍수적으로 음양의 균형이 깨진 전형적인 음(陰)의 땅이라는 것.

나그네에겐 눈앞의 풍광이 전부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거친 땅에서 억센 삶을 살다 간 민초들의 이야기가 계류에 실려 끊임없이 흘러내린 곳이다.

21년간 배내골을 지킨 김 씨는 "배내골 사람들은 도회지의 많은 무리 속에서 부대끼며 살기에 어딘가 모가 난, 속된 말로 '내 팔 내가 흔들며 자유분방하게 살겠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마을을 이룬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 또한 크게 보면 그런 부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종가의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넉넉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며 땀의 대가로 사는 것을 천직으로 여겼다. 하지만 매터도가 판치는 세상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내골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봐도 선택의 폭이 적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배내골행을 과감하게 실행한 것이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의 결정에 말없이 따라준 사랑하는 부인과 두 아들이 없었다면 힘들었겠지만."

배내골에는 비단 김 씨뿐 아니라 가슴 아픈 사연의 민초들이 살다간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우선 떠오르는 분이 인근 죽전마을 당상나무집 욕쟁이 할매란다. 서른도 안 돼 청상과부로 배내골에 들어와 한 많은 삶을 살면서 북받쳐 오르는 한을 속으로 삭이다 못해 뱉어 놓은 것이 욕이었다. 산판일을 하는 일꾼들을 대상으로 주막을 했는데 그래도 오며가며 정 준 사람이 있어 성이 다른 딸을 셋 둔 욕쟁이 할매는 장대비 쏟아지는 7년 전 어느날 이승의 질긴 끈을 싹둑 자르고 팔순의 노구를 배내골에 묻었다.
 백련마을 어귀 최 보살과 마을에 버스가 들어와 잔치를 할 당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던 임 노인도 파란만장한 삶을 끝내고 이제 하늘나라로 되돌아갔다.

시간을 더 거슬러 조선시대에는 사림의 거봉 점필재 김종직을 비롯해 많은 유생들이 세상을 등지고 산수를 벗하며 세월을 보냈고, 조선 후기 천주교 탄압 땐 많은 신도들이 배내골로 들어와 질그릇을 구워 한피기고개를 넘어 통도사 인근 언양 신평장이나 표충사 인근 밀양 단장장에 내다팔아 의식주를 해결했다. 실제로 상북면 이천리 간월재 가는 도중 만나는 죽림굴은 기해박해 당시 잔혹했던 관아의 손길을 피해 모였던 피난처로 여기서 토기와 목기를 만들거나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했다. 입구는 좁지만 안쪽이 넓어 150명까지 지낼 수 있는 천연석굴 죽림굴은 현재 천주교 성지로 신도들의 발길이 끊일 줄 모른다.

죽림굴. 입구는 작지만 내부가 넓어 150명도 수용 가능하다.

죽림굴 올라가는 계단길.


죽림굴 안내판.

죽림굴 안내석.


아직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태봉마을 산자락 옹기골에도 적지 않은 질그릇 파편과 함께 대작 가마까지 출토돼 이 또한 천주교인들의 흔적으로 추정된다고 김 씨는 설명했다.

한국전쟁 땐 빨치산들이 덕유 지리를 거쳐 이곳 배내골로 내려와 지금의 원동면 장선리에 교육도당을 설치, 골육상잔의 비극의 현장으로 변했다. 이와 관련, 신불산 서릉의 955봉에는 '공비지휘소가 있던 곳'이라 적힌 비석이 서 있다. 비석 뒷면에는 한국전쟁 중 남부군 제5지대장이 이곳에 머물면서 신불산 일대의 부하들을 총지휘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실제로 이곳에 서면 비석 내용 그대로 주변 능선 계곡의 지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김 씨는 "밤엔 인민군이, 낮엔 우리나라 50사단 병력이 점령하는 등 당시 밤낮으로 배내골의 주인이 바뀌면서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며 "이후 다시 돌아온 원주민이나 앞서 언급한 세상을 등진 사람들 그리고 최근 펜션 등 민박이나 식당을 운영하기 위해 이방인이 하나 둘 찾아들면서 지금의 배내골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여전히 몸살 앓는 배내골
1990년대 후반부터 배내골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중장비의 굉음소리와 레미콘차가 쉴새없이 넘나들며 망나니 칼춤 추듯 지축을 흔들기 시작했다. 새마을운동 노래 가사처럼 수변의 돌배나무를 벤 후 마을길도 넓히고 산골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휘황찬란한 펜션과 식당 전원주택 연수원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인간의 더러운 손길이 미치자 배내골은 서서히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배내산장 식당건물 한 쪽 벽에는 눈길 끄는 글이 하나 붙어 있다. 올해 서울의 일류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산장지기 김 씨의 둘째 아들 종현이가 초등학교 때 쓴 '배내골'이란 생활문이다. 종현이는 5살 때 배내골로 들어왔다. '버스를 탔는데 아저씨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지금이야 깨끗하지. 한 10년 뒤엔 아주 더러워져 '배내똥'이라 불릴걸.(중략) 여름엔 피서객들이 음식을 다 먹지도 않고 반은 버리고 간다. 그것이 비가 오면 강에 흘러들어 오염이 되는 것이다. (중략) 음식물을 되가져 가는 것이 환경을 보호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생의 눈에 이렇게 보였으면 더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김 씨도 이렇게 회상했다. "식수로 길러 먹던 계곡물이 하도 맑아 하늘이 통째로 담긴 모습에 넋을 놓고 온종일 보내기도 했고, 매미 여치는 한낮의 무료함을 달래줬고, 두견새는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창가를 떠나지 않았어요. 어느날 아침 문득 잠에서 깨어나 들꽃 위에 실안개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면 마치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어요."

이처럼 원시에 가까운 풍요로움이 가득한 배내골은 사바세계에서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온 한 맺힌 이방인들을 포근히 감싸 안아 주었다. 김 씨는 이를 배내골의 묘한 마력이라고 표현했다. 거친 삶을 살아온 필부들도 이 배내골에 들어오면 아픔조차도 충분히 삭여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그 자체로 보도록 도와주는 그 힘 말이다.

김 씨는 이런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원시에 가까운 풍요로움은 비록 사라진 돌배꽃 전설처럼 서서히 묻혀버리고 있지만 그래도 배내골은 여전히 아름다운 땅이라고. 하지만 이 아름다움의 이면에 묻혀 있는 배내골의 정서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진정 바위 틈에 핀 들풀 한 포기도 소중히 다가올 것이라고.

<떠나기 전에>-죽림굴 파래소폭포 철구소 등 볼거리 및 먹을거리 무궁무진

         
배내골 전경.

도심에선 이미 벚꽃이 난분분 꽃비를 뿌린 후 아기 손톱 크기의 새순이 돋고 있지만 산골마을이라 봄이 늦게 찾아오는 배내골은 이제서야 산벚꽃과 몇 안 되는 하얀 돌배꽃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하지만 지금 배내골은 의외로 한산하다. 벚꽃이 한창일 때 사람들은 벚꽃이 유명한 쌍계사나 경주 등지로 떠나 찾는 이가 거의 없다가 벚꽃놀이철이 끝나야 사람들이 찾는단다. 가을에도 마찬가지다. 각 지자체의 축제가 몰린 9월말부터 10월 중순까지 역시 일순간 발길이 끊긴 후 억새나 단풍이 모습이 보이면 또 다시 몰린다고 한다.

사전 정보없이 배내골을 찾으면 밋밋하고 심심하다. 그래도 볼거리는 꽤 있다. 천주교 성지인 죽림굴은 간월재 아래 위치해 있고, 배내산장 맞은편 신불산폭포 자연휴양림에는 파래소폭포가 유명하다. 만추 단풍이 황홀한 주암계곡에는 여름철 최고의 명소 철구소가 있다. 시퍼런 물이 한눈에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어 밀양 호박소, 신불산 파래소폭포와 함께 영남알프스 3대 소(沼)로 손꼽힌다. 또 통도골에는 영화 '달마야 놀자'에서 조폭들이 물속에서 누가 오래 있나 내기를 했던 곳으로 유명한 선녀탕이 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5분에서 많게는 30분 정도의 발품을 팔아야 한다.

밀양호(댐)로 가는 멋진 드라이브길도 달려보자. 도중 휴게소에서 바라본 밀양호의 풍광은 일품이다. 정자 앞에는 망향비가 서 있다. 1990년 밀양댐이 조성되면서 수몰된 단장면 고점리의 덕달 사희동 죽촌 고점 등 4개 마을의 안타까운 사연이 적혀 있다. 배내골 하류에 해당되는 이곳에는 농짝같은 암장이 치솟아 멋진 풍광을 선사한다. 농암대다. 사림의 거두 점필재 김종직이 말년에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밀양호 휴게소. 망향비와 농암정이 보인다.

점필재 김종식이 말년이 머물렀던 농암대. 농암정 정자 안에 사진이 걸려 있다.


배내산장의 특미 '흑염소 숯불구이'.

'흑염소 숯불구이' 상차림.


배내골 맛집을 소개한다. 음식보다 배내골의 정서와 문화를 팔고 싶다는 김성달 씨가 운영하는 배내산장(055-387-3292)은 흑염소 숯불구이와 버섯전골이 유명하다. 영축산 산행의 들머리인 청수골산장(052-254-0875)은 흑돼지구이를 잘 하고, 수림가든(055-387-1016)은 꿩탕과 순두부, 대추나무집(055-387-5312)은 오리불고기와 메기매운탕 전문이다. 경부고속도로 양산IC로 나와 에덴밸리 쪽으로 올 경우 만나는 세검정(055-388-5757)은 생갈비와 돼지갈비로 유명하다. 원동면 장선리에는 50년 전통의 선리양조장(055-363-8933)이 있다. 

(1)편은 여기 클릭해 주세요.
'굴러온 돌' 21년 산장지기에게 듣는 배내골 이야기 http://hung.kookje.co.kr/392

하늘로 간 영혼들과 상처받은 생존자들의 아픔을 아는지 지난 14일 활짝 핀 진달래는 유난히 곱고 빛이 선명합니다. 창녕군청 제공.

지난 2월 9일 정월대보름을 맞아 억새태우기 행사를 하다 7명이 숨지고 81명이 부상을 당하는 대형 참사가 빚어졌던 경남 창녕군 화왕산(해발 757m) 정상부에 지금 연분홍 진달래가 온 산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창녕은 예부터 낙동강과 우포늪의 범람으로 홍수가 잦아 주민들이 물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창녕의 진산 이름을 '불기운이 왕성하다'는 의미의 화왕산(火旺山)으로 명명했습니다. 이 때문에 유난히 산불이 많이 발생해 키 큰 나무들은 오간데 없어 산 '가을의 전령' 억새와 연분홍 진달래가 고 산 정상부를 뒤덮고 있습니다.

무심한 산도 아직 2개월전의 대참사를 기억하고 있는지 올해 진달래의 연분홍빛이 유난히 선명합니다.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대자연은 위대한가 봅니다.

시간이 나면 화왕산에 올라봅시다.
창양읍내 화왕산 군립공원 자하곡 주차장에서 출발하면 깔딱고개를 넘어 1시간이면 충분합니다.
화왕산은 산 정상부에 화왕산성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이 큰 공을 세운 곳입니다. 남동쪽의 경우 돌로 성을 쌓았지만 서북쪽은 절벽능선이라 자연성벽입니다. 그 가운데가 십리억새밭으로 그 면적은 18만4800㎢(5만6000평)에 달합니다. 가을엔 광활한 억새밭으로, 이 봄엔 진달래 군무로 아주 유명하답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곽일주를 합니다. 통상 난전이 펼쳐진 서문에서 정상으로 올라 시계방향으로 돕니다. 반대편으로 돌아도 상관없습니다. 지난번 참사의 현장이었던 배바위 방향으로 말입니다. 화왕산 정상과 배바위는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한 바퀴 돌면 대략 1시간 정도 걸립니다.

잊지 말아야 하겠죠. 진달래 한 송이 한 송이를 어루만지며 당시 숨진 영혼들의 아픔을 달래며 명복을 빌어 줍시다.

아래 사진은 2006년 봄 진달래 사진입니다.


지난 2월 참사 때의 사진입니다.


"배춧잎에 김 한 장을 올려놓고 실파와 마늘 고추 등 각종 야채와 미역을 곁들인 다음 과메기 한 점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그 맛은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과메기 생산의 1번지 구룡포. 정확히 말하면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약간 비릿한 바다내음에 쫄깃하면서도 고소한 살맛이 입안에 착착 달라붙는 과메기. 언제 먹어도 식상하지 않고 되레 반갑기만 하다.

  과메기는 1월이 지나면 사실상 끝이라고 하지만 막상 가보니 2월말까지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

#족보있는 음식 '과메기'
구룡포항을 벗어나 31번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과메기'라고 적힌 커다란 입간판이 눈길을 끈다. 과메기 덕장이 푸른 바다와 하얀 포말과 한데 어울려 독특한 풍광을 보여준다.

 과메기를 굳이 범부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꽁치 숙성회' 혹은 '꽁치 말림'. 원래 과메기는 꼬챙이로 청어의 눈을 꿰어 말렸다는 '관목어'(貫目魚)에서 유래한 말. 영일만 부근에선 '목'(目)이란 말을 흔히 '메기'로 불렀기 때문에 '관목'이란 말이 '관메기'로 불리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과메기'로 정착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예부터 구룡포 연안은 청어의 주산지. 겨울철 특별한 먹을 거리가 없던 구룡포에서는 이 청어가 더없이 좋은 식량자원이었기에 사람들은 이를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들은 부엌 살창(채광을 겸한 통풍구) 입구에 청어를 걸어 찬바람에 얼렸다가 부엌 땔감의 연기에 녹였다를 반복, 얼말린 과메기를 만든 것. 당시엔 술안주보다는 밥 반찬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과메기는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문헌에도 기록이 나와 족보있는 음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70년대 들어서 청어가 연안에서 자취를 감추자 대체어로 꽁치가 사용됐고, 이어 연안에서 꽁치 조차 어획량이 급격히 줄자 10여년 전부터 러시아 쿠릴열도 부근에서 잡은 원양꽁치가 과메기 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원양꽁치로 만든 과메기가 국내 연안의 청어나 꽁치에 비해 불포화지방산 등 영양학적 측면에서 월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이 입증돼 이제는 과메기 재료로 입지를 완전히 굳혔다는 것.

 이외에도 과메기는 숙취해소를 돕는 아스파라긴산이 풍부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애주가의 사랑을 덤뿍 받고 있다.

 과메기는 '통마리'와 '배지기' 두 종류가 있다. 통마리는 말그대로 통째로 숙성시킨 것이고 배지기는 배를 따 뼈와 내장을 걷어내고 말린 것. 현지인들은 피가 나오고 내장이 흘러내리는 통마리를 즐긴다. 배지기는 과메기가 외지에 알려지면서 외지인들을 위해 고안된 것. 외지인들이 통마리를 약간 혐오스러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구룡포 과메기생산자 영어조합법인 김점돌 회장의 설명이다. 

 김 회장은 "이곳 사람들은 원래 과메기를 초고추장에 찍어 김에 싸먹었다"며 "지금과 같이 각종 야채를 곁들이는 방법은 외지에서 개발돼 역수입된 것 같다"고 말했다.

 막상 덕장에 가보니 그냥 해풍에 말리면 저절로 숙성되는 줄 알았던 과메기는 온도 습도 바람 등을 고려해야 하는 그야말로 과학과 정성으로 만들어지는 먹을거리였다.

 "무작정 햇빛에 말리면 딱딱해집니다. 또 기온이 뚝 떨어지는 밤에 실외에 그대로 놔두면 얼어 하얗게 변합니다. 그러면 상품성은 제로이지요. 제 자식처럼 사랑과 관심을 듬뿍 줘야 먹음직스러운 과메기로 태어납니다." 구룡포 진강수산 최정만 대표의 설명이다.

 과메기는 우선 세척과정을 필수입니다. 바닷물로 한번, 바닷물과 민물을 섞은 기수로 한번, 그냥 민물로 한번 등 세번의 세척이 되야 비린내와 기름 및 불순물이 제거된답니다.

세척과정입니다.

세 차례 세척한 꽁치를 건조대에 옮깁니다.
햇빛에 말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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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대의 선풍기가 천장에 매달려 있습니다.


온도계도 있습니다. 창문도 많습니다.

연탄난로도 준비돼 있습니다.


진강수산 최진만 대표가 과메기 숙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으로 가른 과메기가 붙으면 안 된다며 작대기로 일일이 분리시키는 최진만 대표.

정말 정말 손이 많이 가는 과메기입니다.



바람은 북서풍이 90% 일때가 제일 좋다고 합니다. 최 대표는 바람에 따라 과메기의 비린내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이 모든 조건이 맞지 않으면 건조실로 들어갑니다.

 건조실은 온도 습도 바람 조절을 위해 창문이 아주 많습니다. 온도계와 선풍기 연탄난로 등이 준비돼 있습니다. 급작스런 기후 변화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서랍니다.

 일반적으로 과메기의 숙성 조건은 습도는 45~55%이며 30% 이하로 떨어지면 아삭아삭해진답니다. 온도는 10~20도일 경우 2박3일~3박4일, 5~10도 일땐 4박5일 정도가 지나야 숙성된답니다.

 여기에 반 가른 과메기가 붙으면, 그 붙은 부위의 숙성이 달라진다면 일일이 긴 대나무 꼬챙이 분리해야 하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된답니다. 

사실 저는 그냥 햇빛에 말리는줄 알았습니다. 한 톨의 쌀알이 농부의
땀방울이듯 과메기 한 점도 덕장의 적지 않은 사람들의 노고가 배어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날 냉동 수입산 꽁치가 들어왔습니다. 제일 아래 사진은 냉동실입니다.

한반도 동쪽 끝단임을 알리는 대형 입간판.

 스무고개입니다.
 1. 섬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에서 최동단과 최남단은 어디일까요. 이건 누구나 맞출 수 있는 아주 쉬운문제. 답은 경북 울릉군 독도와 제주도 남제주군 마라도. 

 2. 그럼 맨 서쪽과 최북단은. 이건 '퀴즈 대한민국' 최종 라운드 진출을 꿈꾸며 준비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어려운 문제. 답은 서쪽은 평안북도 용천군 마안도와 북쪽은 함경북도 온성군 유포면. 

 3. 자 이젠, 섬을 뺀 육지로 한정합니다. 맞춰보세요. 역시 '퀴즈 대한민국' 최종 라운드급 수준입니다. 그럴 경우 최북단은 그대로이고 최남단은 전남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토말로 소위 말하는 땅끝마을입니다. 그럼 맨 동쪽과 맨 서쪽은 어디일까요. 답은 각각 함북 경흥군 노서면과 평북 용천군 용천면입니다. 

 4. 자 이제 진짜 문제가 나갑니다. 그렇다면 섬을 뺀 한반도 남한땅으로 한정할 때 가장 동쪽은 어디일까요. 이 또한 '퀴즈 대한민국' 최종 라운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별 고민없이 이 문제를 맞춘다면 대단한 실력가로 봐도 무난할 듯합니다.

 흔히 섬을 제외한 남한땅 맨 동쪽은 일출 명소로 유명한 포항 대보면 호미곶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도 이렇게 나오는 곳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토지리정보원(www.ngi.go.kr)에 따르면 남한땅에서 가장 동쪽은 호미곶광장에서 남쪽으로 8㎞ 떨어진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 석병리(동경 129도 35분 10초)입니다. 

 이곳 석병리에는 지난 1980년대 중반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측량해 최동단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답니다. 하지만 마을주민들이 10년전쯤 농로를 포장하면서 그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해 없애버렸지만 3년 전 국토지리정보원이 다시 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찾아가야 할까요. 
구룡포항을 지나 31번 해안도로를 타고 그냥 달리기만 하면 됩니다. 단, 최근 포항시에서 만든 말끔한 새 국도를 타면 안 됩니다. 구 도로를 타야 됩니다.
 
 그러면 길 우측에 '한반도 동쪽 땅끝마을'이라 적힌 커다란 입간판이 보입니다. 워낙 커서 놓칠 수가 없습니다. 확신합니다. 우회전해 들어가면 바닷가가 보이며, 방파제 우측으로 가두리 양식장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그 뒤로 낚시꾼들이 아주 좋아할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바위 위를 자세히 보면 동그란 조형물이 보입니다. 이게 육지의 동쪽 끝단임을 표식입니다.

방파제길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고, 사진 우측 저 멀리 보이는 동그란 조형물이 동쪽 끝단임을 알리는 표식입니다.
조금 뒤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철조망으로 막힌 방파제길 대신 가두리 양식장 사이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반대편에서 가두리 양식장을 촬영한 것입니다. 

 섬으로 가는 방파제길은 철조망으로 막혀 있습니다. 아마도 안전사고를 우려한듯 합니다. 대신 가두리 양식장를 섹터로 나눈, 즉 어민들이 다니는 길로 걸어가면 조형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조형물에는 동그랗게 깎은 지구본 모양의 돌에 우리나라 지도를 양각해 동쪽의 끝단임을 표시해놓고 있습니다. 그리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한반도 동쪽 땅끝, 경북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석병리, 동경(경도) 129 35 10, 북위(위도) 36 2 51'.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이 자신이 서 있는 지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다녀와서 반추해보면 별 것 아닌데도 뭔가 큰 것을 발견한 것처럼 당시엔 감정이 약간 북받쳐 오르는 들었습니다. 한번 다녀오시면 공감하실 겁니다.

 동쪽 끝단 조형물에서 정면 그러니까 북쪽이겠죠, 이 북쪽 해안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바다쪽으로 돌출된 땅이 보입니다. 저곳은 구룡포읍 강사2리입니다.
 
 재밌는 점은 저곳이 이곳 석병리, 정확히는 석병2리와 한때 동쪽 끝이라고 경쟁을 벌였던 마을입니다. 결국은 국토지리정보원이 측량 후 명확한 판결을 내려 이제 잠잠해졌습니다.

바다 건너 보이는 땅이 동쪽 땅끝마을과 동쪽 끝이라고 경쟁을 벌였던 강사2리입니다. 사진 상으로 표가 안 나지만 실제로 보면 석병리가 약간 해안쪽으로 더 나온 것 같습니다.
 

 동행한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한마디를 더 하더군요.

 땅끝마을이란 이름은 해남에 선점당했으니 '등끝'이라 불렀으면 좋겠다고 하네요. 호랑이등의 끝이라는 의미의 '등끝'은 옛 지명이기도 하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우리말로 동쪽 끝이라는 의미의 '샛끝'이란 이름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합디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키는 포항시 즉 '관'이 쥐고 있습니다.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높으신 이 분들이 움직여야 고쳐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눈에 봐도 일본가옥거리임을 알 수 있는 구룡포 적산가옥 거리.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로 과메기뿐 아니라 대게 오징어의 국내 생산량 1위인 포항 구룡포항은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합한 후
이듬해 일본 자국 어민들을 집단 이주시켰다. 구룡포읍과 포항시에 따르면 오까야마, 가가와, 아이찌 등 세토나까이 주변 일대 어민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수산업이 포화상태여서 어민들간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아주 심해 뭔가 돌파구가 필요할 때였다. 무엇보다 동해 구룡포의 어족자원이 무궁무진했던 것이 집단 이주를 가능케한 요인이었다.

 여기에 일본의 어선들은 동력선이어서 돛단배를 이용하는 우리 어업기술에 비해 무려 100년 정도 앞서 있었다. 한마디로 일본 어민들이 이주해야 될 필요충분조건이 모두 갖춰진 셈이었다.

30여년 전 간판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 찌그러져 가는 여인숙 간판.



 100년이 지난 지금도 구룡포에는 당시의 일본 어민들이 집단 이주해 살았던 그 시절의 일본 가옥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 적산(敵産)가옥거리, 다시말해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장안동 골목을 천천히 걷노라면 영화속 한 장면처럼 아직도 일본풍이 물씬 풍겨난다.

 아무 정보 없이 구룡포항을 찾는다면 이 적산가옥 거리는 찾기 어렵다. 구룡포항 내 도로를 건너 작은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쉽게 만난다. 그렇지 않다면 구룡포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아주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원래 지금의 구룡포항내 공유지와 도로는 오래전 매립된 것이다. 예전에는 이 적산가옥거리가 바다와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한눈에 일본풍이 느껴지는 이 거리는 오래전 모 방송국의 인기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일본 거리 장면이 촬영된 곳이다. 시점과 종점의 거리는 대략 470m. 일직선이 아니라 꼬불꼬불하게 약간 굽어 있어 운치가 있다.

 가옥은 대략 50가구. 절반 가까이 빈 집이다. 빈 집에 들어가보면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창문이나 문틀을 자세히 보면 눈길 끄는 문양이 있다. 동그란 구멍이 있는가 하면 선사시대의 알 수 없는 무늬가 아주 세실하게 조각돼 있다.

 동행한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그들도 사람인지라 아마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러한 문양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말했다. 한 예로 동그란 구멍과 그 옆으로 그으진 선을 두고 서 부소장은 일본의 마음에 항상 있는 최고봉인 후지산의 정상과 천지못이라고 설명했다. 지그재그로 그려진 것은 고향인 일본의 바다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라고 덧붙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일본풍 가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 골목을 걷다 보면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 속에 자리잡은 일본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론 이층 목조가옥 창문이 열리면서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인네가 '곤니치와'하고 인사를 건넬 것 같다.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이 거리는 1930년대 번성했던 과거를 간직하고 있다"며 "과거로의 회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들러봐야 할 공간"이라고 말했다.

 현재 결정된 계획은 없지만 포항시가 현재 이 적산가옥거리를 일본인 관광객들을 겨냥한 일본인 거리를 조성하려고 한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서 부소장은 "왜색풍이 넘치는 일본인 거리보다는 차라리 이 거리를 적절히 보존하면서 일본의 만행과 당시의 우리 삶을 아우르는 가칭 근대역사 거리로 후대에 널리 알렸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잠시 안을 들여다봤다. 빨래가 널려 있지만 흡사 난민촌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분위기가 을씨년스럽다.

다다미가 그대로 남아 있는 빈집.
적산가옥 거리 중간중간에는 우리네 집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본풍이다.

적산가옥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일본인들이 새겨 놓은 다양한 문양이 눈길을 끈다.

양지바른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듯하다.
이 적산가옥 거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이다. 여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깔끔한 집이어서 물어보니 당시 약국집이었단다.





과메기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1위

"대게는 영덕, 오징어는 울릉도에 지명도에 밀리지만 
생산량은 압도적으로 1위랍니다"

구룡포항 전경. 웬만한 어항 하곤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각도를 달리해서 본 구룡포항.

장삼이사들은 구룡포 하면 십중팔구 과메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구룡포에는 과메기 이외에 국내 최대를 자랑하는 두 가지 수산물이 더 있다. 다름아닌 대게와 오징어이다. 혹자들은 대게는 영덕, 오징어는 울릉도를 떠올리겠지만 이건 와전이고 편견이다.

대게와 오징어의 명실상부한 국내 최대 생산지는 바로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항이다. 결국 구룡포는 대게 오징어 과메기의 전국 최대 생산지이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라 불릴 만큼 구룡포는 어항이라 부르면 미안할 정도로 항구가 자체가 아주 크다. 한눈에 봐도 영덕이나 울진 후포항, 울산 정자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규모가 상당하다.

해서, 구룡포는 겨울바다의 낭만 보다는 갈매기의 호위를 받아 뱃고동을 울리며 쉴새없이 드나드는 비릿한 고깃배의 모습이 더 살갑게 다가오는 거대 어항이다.

우선 과메기를 살펴보자. 일출 명소로 유명한 호미곶이 위치한 북쪽의 대보면 등과 함께 과메기 특구로 지정된 구룡포는 국내 전체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구룡포가 과메기 최대 집산지로 자리매김한 데는 지정학적 위치 덕분. 포항은 낙동정맥이 고도를 낮추는 지점이라 북서풍과 염분을 머금은 영일만의 해풍이 뒤섞이며 과메기를 숙성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과메기는 구룡포항을 살짝 벗어나면 해안가에 덕장이 이어진다.

대게와 관련해선 땅을 치고 통곡할 정도. 구룡포수협에 따르면 국내 생산량의 60%가 이곳 구룡포항에서 위판된다고 한다. 하지만 브랜드가 영덕에 밀리다 보니 여기서 잡은 대게의 상당 부분이 영덕으로 올라가 영덕대게로 옷을 갈아 입니다. 마치 전남 고흥 녹동항에서 위판된 세발낙지가 목포 세발낙지로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구룡포수협 관계자도 "브랜드 인지도에서 차이가 나는 건 현실이지만 분명히 생산량은 구룡포가 훨씬 앞선다는 것은 자명하다"고 강조했다.
구룡포항 대게 위판장.

오징어 또한 국내 최대 생산을 자랑한다. 흔히 오징어 하면 울릉도를 연상시키는데 실제로는 울릉도 보다 오징어를 많이 잡는 곳이 이곳 구룡포다. 구룡포수협에 따르면 오징어 생산의 절반 가량이 구룡포에 모여든다고 한다.

 오징어의 경우 워낙 많이 위판되다 보니 오징어 채낚기배에 잡히는 오징어(활어) 위판장과 그물에 의해 잡히는 (트롤)오징어 위판장 두 군데가 있다. 이렇게 오징어가 많이 생산되는데도 필부들은 오징어 하면 울릉도를 떠올리니 구룡포 사람들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고 있다.
밤에 등불을 밝혀 오징어를 불어모은 후 긴 낚시줄로 잡아올리는 오징어채낚이배.
구룡포항을 벗어나면 과메기와 함께 해풍에서 건조되는 오징어를 만날 수 있다. 반건조 오징어인 일명 피데기이다.

한마디로 구룡포는 대게는 영덕, 오징어는 울릉도에게 밀리면서 그야말로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있는 것이다.

전국에서 가장 싱싱한 대게와 오징어, 과메기를 가장 싸고 맛있게 맛볼 수 있는 곳이 다름아닌 구룡포항인 것이다.

여기서 국내 유일 등대박물관과 유명 일출 명소로 '상생의 손'이 반기는 호미곶이 불과 30㎞에 불과해 해안드라이브 코스로 일품이다.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인 구룡포항을 벗어나면 과메기 덕장과 함께 아름다운 해변이 줄곧 이어진다. 해안드라이브길로 일품이다.

 서인만 구룡포 미래사회연구소 부소장은 "동해안 최대 어장인 구룡포가 어업 생산량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것은 일차적으로 구룡포 사람들 책임이 크다"며 "앞으로는 브랜드 인지도를 올리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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