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로 가는 길 고수에게 배운다
<2> 김현령 롯데스카이힐 김해CC 경기팀장(KLPGA 프로)

대부분 백스윙 톱 직전 다운스윙으로 진행
이럴 땐 몸 빨리 열리고 헤드업돼 미스샷 잦아
"백스윙은 장타 치기 위해 힘 모으는 과정"


"이상하네. 며칠 전만 해도 감이 좋았는데 오늘은 왜 이런지 모르겠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신의 스윙. 덕분에 매 홀마다 열리는 지갑.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을 관리해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처량하고 불쌍하다. 몸을 돌리기만 하면 '착! 착!' 소리를 내며 기가 막히게 나가던 볼이 하루아침에 들쭉날쭉이 돼버렸으니 땅을 치고 통곡을 할 수밖에.
 그렇다고 클럽을 놓을 수는 없는 노릇. 복수는 하고 놓아야지. 내가 뭐 프론가. 골프스윙은 매일매일 바뀌고 달라질 수 있으며, 이게 다 싱글로 가는 성장통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주말골퍼 버디 씨.
 하지만 버디 씨는 앞으로도 별로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사업 때문에 연습할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특단의 조치가 없으면 계속의 만인의 몟밥몠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방법이 없을까요. 프로님.
 롯데스카이힐 김해CC 경기팀장이자 KLPGA 김현령(37) 프로는 "연습할 시간이 별로 없고, 골프는 잘 치고 싶은 버디 씨 같은 주말골퍼들은 만사 제쳐놓고 단 하나, 스윙의 리듬을 집중 연마할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스윙 리듬만 일정하면 연습량이 적어도 미스 샷을 낼 확률이 적다는 것. 이는 핸디캡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다고 덧붙였다.
 김 프로가 강조하는 스윙 리듬의 핵심은 백스윙 톱에서 한 박자 쉬어주는 여유였다.(사진 위) 주말골퍼의 대부분은 '장타는 헤드 스피드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백스윙에서 다운스윙으로 이어질 때 템포가 빨라지면서 공격적으로 스윙을 한다. 그러나 뭐든 조급해지면 흐트러지기 쉬운 법. 이런 스윙은 몸이 빨리 움직이고 헤드업이 돼 볼을 정확하게 스위트 스폿에 맞출 수 있는 확률을 감소시킨다.
 김 프로는 "골프는 어차피 실수를 줄여야 사는 확률 게임"이라며 "빠른 스윙으로 정확하게 임팩트하는 것보다 부드러운 리듬을 통해 나오는 임팩트가 확률적으로 실수가 적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원 포인트 레슨 부탁을 받으면 절대로 스윙 폼은 건드리지 않고 리듬만을 가르친다고 했다.


 "연습할 땐 바로 백스윙으로 가면 리듬이 잘 안 생기기 때문에 클럽을 좌로 50㎝쯤 보냈다가(사진 위 왼쪽) 백스윙 방향으로 클럽을 보내면 생각보다 쉽게 적응이 되지요. 마음속으로 '하나~둘~셋'하면서 말이에요. 이는 아이언 샷이나 어프로치 샷, 퍼팅 때도 마찬가지지요. 부산·울산·경남 지역 클럽 챔피언들도 스윙만 놓고 보면 별로지만 자신만의 리듬을 잘 타는 법을 몸의 근육에 기억을 잘 시켜놓아 꾸준히 좋은 스코어를 내고 있지요."
 그러면서 대뜸 기자에게 "백스윙은 왜 하나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우물쭈물하며 시원한 답을 못 하자 김 프로는 "(장타를 치기 위해)힘을 모으기 위한 것 아닌가요"라고 했다.
 이어지는 김 프로의 설명. "백스윙을 할 때 몸은 다 돌아갔지만 실제로 클럽은 미세하지만 정점으로 향해 움직이고 있지요. 하지만 주말골퍼들은 클럽이 돌아가고 있는데, 다시 말해 정점에 도달하지 않았는데 몸이 다 돌아갔다고 생각해 다음 동작인 다운스윙으로 진행해 버리지요. 힘을 모으기 위해 백스윙을 했지만 결국 힘을 제대로 모으지도 못하고 부자연스럽게 다운스윙을 해버리지요. 그렇다 보니 스윙이 들쭉날쭉해지면서 기복이 심한 골퍼로 전락하는 것이지요. 손목 힘이 약한 여성골퍼들에게 이 리듬 스윙은 큰 효력을 발휘하지요."
 김 프로는 "장타자들의 스윙을 보면 연속 동작이 워낙 빨리 진행돼 일순간 멈추는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슬로비디오로 자세히 보면 찰나의 순간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멈추는 동작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 찰나의 순간이 바로 몸의 근육들이 순간적으로 파워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는 신호를 보내는 시간이다.
 그는 프로야구단 롯데 자이언츠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예를 들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시합이 없는 날이면 롯데스카이힐 김해CC에서 김 프로와 이따금 라운드를 함께한다. 드라이버 샷이 280~290m에 달할 정도로 장타자인 그는 70대 후반의 스코어를 낸다고 소개했다.
 김 프로는 장타를 의식해 빠른 스윙만을 고수하는 로이스터 감독에게 백스윙 톱에서 한 박자 쉬는 스윙의 리듬법을 설명했다. 이후 힘을 잔뜩 주고 빠른 스윙을 할 때보다 거리 또한 늘고 미스 샷도 줄더라는 것. 기자 또한 백스윙 톱에서 한 박자를 쉬면서 힘을 모아 드라이버 샷을 날린 결과 평소보다 20m쯤 더 나가는 믿지 못할 일이 발생했다. 원 포인트 레슨의 힘이었다.
 김 프로의 리듬 스윙은 프로 선수들 사이에서도 꽤나 유명하다. 비시즌 때면 잃었던 스윙의 리듬을 찾겠다며 동반 라운드 제의가 자주 들어온다. 그가 특히 리듬 스윙에 정통한 이유는 뭘까. 알고 보니 그는 대학 때까지 체중 이동에 따른 리듬 스윙이 생명인 테니스 선수였다. 골프는 대학원 진학을 하면서 시작해 29세 때 투어 프로가 됐다.
 지금은 경기팀장으로 골프장 경영 및 관리 파트 업무를 보며 이따금 투어에 참가하는 김 프로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프로들처럼 연습을 잘 안 해요. 연습할 시간도 없어요. 하지만 저의 전매특허 리듬 스윙으로 버티고 있어요. 주말골퍼들이 이 리듬 스윙법을 몸에 익혀 놓으면 힘이 적게 들면서 비거리도 늘고, 방향성도 좋아지지요."
 드라이버 비거리가 260야드로 여성 프로 중 장타자로 손꼽히는 그는 특히 방향성이 좋아 투어 때 홀인원을 일곱 번이나 한 기록도 갖고 있다. 이 모두 리듬 스윙 덕분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근래 최고 성적은 2008년 피닉스파크 클래식 3R 합계 7언더파로 3위.





마지막으로 그는 샷의 정확성을 높이는 방법을 하나 더 제시했다. 임팩트 순간 헤드 면에 볼이 달라붙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고 했다. 임팩트 순간부터 볼 앞쪽 20㎝ 정도까지 밀어줘야 한다는 것.(사진 아래) 골퍼들이 대개 볼을 때리는 순간 스윙을 끝내기 때문에 방향성뿐 아니라 거리도 손해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김 프로는 "헤드 면에 볼이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컨트롤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겨 훅이나 슬라이스를 줄일 수 있게 되는 데다 파워까지 최대한 실어 보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것만 되면 제대로 된 피니시가 사실상 완성되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롯데스카이힐 제주CC를 방문했을 때 김현령 프로가 임팩트 순간부터
      볼 앞쪽 20㎝ 정도까지 밀어줘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9홀을 함께 라운드 후 기자와 함께한 김현령 프로.

- 부산 중구 보수동 '새진주식당'

"우리집이 진주비빔밥의 원형 그대로 간직"
직접 담근 고추장 간장 등 장맛이 맛이 비결
아직도 유명 정재계 인사들 부산 오면 찾아


비빔밥에 관한 한 부산사람들은 오랫동안 축복받았다고 할 수 있다. 51년째 같은 장소에서 비빔밥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마을 어귀 장승처럼 도심 한가운데 떡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중구 보수동 중부산세무서(옛 보수초등학교) 옆에 위치한 새진주식당(051-256-8855). 단순히 오래됐다는 것보다 진주비빔밥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소개하는 것이다.

 진주가 고향인 안주인 조춘자(70, 사진 왼쪽 ) 씨는 "열아홉 살 때 엄마와 함께 15만 원을 들고 와서 보수천 옆 이곳에 10만 원으로 하꼬방이나 다름없는 집을 얻고, 5만 원으로 살림살이를 장만해 비빔밥을 팔았으니 참 오래됐지"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어렸을 때 큰고모가 진주에서 비빔밥집을 했어. 갈 때마다 한 번씩 맛보던 그 비빔밥이 얼마나 맛이 있던지. 비빔밥 만드는 법을 딱히 배운 것은 없지만 비빔밥에 무엇이 들어가는지 유심히 봐 뒀지."
 진주비빔밥은 육회비빔밥이다. 1593년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에게 성이 함락되기 직전, 백성들과 군인들이 마지막으로 성에 남아 있던 소를 모두 잡아 육회를 만들고, 그릇이 모자라 밥과 나물을 한데 넣고 비벼 먹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전해온다. 비빔밥에 못 넣고 남은 고기는 모조리 국을 끓여 먹었다. 눈물겨운 최후의 만찬이었던 셈이다.
 이처럼 전통을 자랑하는 진주비빔밥이 현재 진주에서는 시외버스터미널 인근 중앙시장 내 제일식당과 천황식당 등 몇 곳에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전주비빔밥이 한국을 대표하는 비빔밥으로 우뚝 솟아 있는데도 말이다.
 궁금해서 물었다. "진주의 제일식당 천황식당과 전주비빔밥을 드셔 보셨는지." 돌아온 답이 재미있다. "물론 가봤지. 잘 하던데. 거긴 청포묵이 없었지만 우린 주변에 큰 시장이 있어 청포묵이 올라왔어. 그러니까 우리 집이 진주비빔밥의 원형을 100% 유지하고 있는 셈이지. 두 군데 다 가본 단골들이 거기보다 우리 집이 더 맛있다고 하던데. 전주비빔밥은 이름값에 비하면 생각보다 별로였어. 파전도 우리와 달리 오징어만 잔뜩 들어간 오징어전이던데."
 진주비빔밥(1만 원)이 나왔다. 콩나물 녹두나물 고사리 버섯 호박 시금치 배추 미나리 쑥갓 등에 육회와 청포 계란지단 등이 올려진 화려한 비빔밥은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맵지 않으면서 뒷맛이 달짝지근하다. 육회가 나물에 섞여 입안에서 녹는다. 입속에 오래 남는 여운은 다진 쇠고기와 홍합 조개를 삶아 푹 우려내 한두 숟가락 곁들인 포탕과의 조화 때문일 게다. 선짓국은 얼마나 담백하고 깔끔한지. 곱창 양 쇠고기 죽순 버섯 등이 들어 있어 솔직히 비빔밥 없이도 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울 듯하다. 두툼한 파전(1만5000원)도 오묘한 맛을 자랑한다. 갑오징어 새우 문어 낙지 쇠고기 등 재료만 무려 30가지가 넘는다.
 조춘자 씨는 "우리집 맛의 비결은 결국 장맛"이라며 주방 뒤로 안내하며 20여 개의 항아리(사진 아래)를 열어 보였다. 또 다른 여러 항아리를 가리키며 "저건 전어젓 제주자리돔젓 조기젓 갈치젓 멸치젓 등 각종 젓갈"이라고 말했다.



 메뉴에 돌솥비빔밥과 회비빔밥(이상 1만2000원)이 보였다. "일본사람들이 저걸 찾더라고. 그래서 만들었어. 한 10년쯤 됐지." 이 집의 유명세는 알고 보니 전국구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정·재계 인사들은 아직도 그 맛을 못 잊어 부산을 찾으면 반드시 들른단다.

-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 날 맞아 창녕 불교문화재 순례

창녕 관룡사 용선대는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 반야용선을 의미해 매년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전국에서 수많은 불자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유홍준 교수는 문화재와 자연경관이 어우러지는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 하나라고 치켜 세웠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이라는 말이 있지요. 의역하자면 '진리를 깨닫는 지혜(반야)의 세계로 향하는, 용이 이끄는 배(용선)'쯤 되겠지요. 불가에서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의미하지요.

절집 법당은 사부대중이 부처님과 함께 타고 가는 배의 선실과 같은 곳이지요. 법당 건물이나 축대 및 계단 등에 조각해 놓은 용머리와 용꼬리, 거북 게 등은 이 법당이 반야용선임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법당에서의 여러 행위들은 바로 피안의 극락정토에 다다르기 위한 작은 정성인 셈이죠.

우리나라 절집은 표현 양식은 다르지만 피안의 세계를 향하는 반야용선의 형상을 한 곳이 상당수 있습니다.   
 
영축산 통도사나 월악산 신륵사 극락전에는 중생의 간절한 염원을 그린 반야용선 벽화가 있고, 청도 운문사 대웅보전 천장에는 용모양의 나무 배에 인형 하나가 줄에 의지해 대롱대롱 매달려 있지요. 반야용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린 이 동자를 악착동자라고 부르지요. 혼자 도 닦아선 극락정토로 갈 능력은 안 되고, 하지만 가고는 싶은 동자의 갸륵하고도 솔직한 노력의 외적 표현이라 보는 이의 마음을 새삼 다잡게 해주고 있지요.

경남 청도 와인터널 바로 위에 위치한 조그만 천년고찰 대적사 극락전 화강암 기단부에는 거북과 게 문양이 돋을새김돼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거북 한 마리가 있는 힘을 다해 기둥의 모서리를 꽉 잡고 법당을 향해 기어오르는 모습이 눈에 띕니다. 이는 기단부가 바다를, 법당이 중생을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지혜의 반야용선임을 의미하고 있지요.

전남 해남 달마산 미황사 대웅전은 그 자체가 바다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반야용선으로 알려져 있지요. 대웅전을 떠받치고 있는 주춧돌에는 고해를 헤치고 나아가는 반야용선이란 의미로 게와 거북이 새겨져 있지요. 인도에서 경전과 부처상을 실은 배 한 척이 달마산 포구 아래 닿았다는 창건 설화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합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땅에서 반야용선의 백미는 창녕 화왕산 관룡사 용선대를 으뜸으로 치지요. 용선대는 용의 등줄기 같은 관룡산의 화강암 줄기가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다 문득 멈춘 절벽으로, 멀리서 보면 마치 용 모양의 뱃머리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지요. 이 용선대의 펑퍼짐한 자리에 3m 높이의 석조여래좌상이 사바세계를 굽어보며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지요. 벼랑 끝에 세워진 불상과 그 앞에서 예불을 드리는 한 부부의 간절한 기도 모습을 바라보면 큰 바다를 헤치고 나아가는 불가의 반야용선에 다름 아님을 확인할 수 있지요. 1300년 전 용선대의 이 돌부처를 조각한 불심 가득한 이름 없는 석공의 안목에 경의감마저 들더군요.

용선대와 관련, 우스갯소리 하나 할까요. 용선대가 극락 가는 배, 다시 말해 반야용선의 형상이라는 말을 들은 한 학생이 용선대 난간 앞에서 영화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가 뱃머리에서 두 팔을 벌리는 장면을 따라하면서 용선대 돌부처는 졸지에 새로운 별명을 하나 얻었다네요. '타이타닉 부처님'으로.

오늘은 불기 2554년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부산서 차로 80분가량 걸리는 관룡사를 찾아보면 어떨는지요. 용선대는 절에서 불과 480m, 20분 정도 걸려 노인뿐 아니라 아이들도 쉽게 올라갈 수 있습니다. 용선대 한 번 오르고 극락정토행 '입장권'을 마음속으로 예약할 수 있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성불하십시요.

경남 창원서 온 불자들이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있다.

- 불심 넘치는 자비의 땅 '경남의 경주'

시대별로 다양한 불교문화재 산재
생태 보고 우포늪과 함께 수만 년 공존한 역사의 땅
천년고찰 관룡사 소박하지만 독특한 기품
용선대 돌부처 사바세계 굽어보며 중생들 인도
비구니승의 집념으로 국보로 빛 본 술정리 동삼층석탑
매일 오후 7시 지역 주민들과 매일 밤 탑돌이



우포늪과 화왕산 그리고 부곡온천이 우선 떠오르는 경남 창녕은 흔히 '제2의 경주'라 불린다. 문화재와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역사의 땅'이기 때문이다. 술정리 동삼층석탑과 신라 진흥왕 척경비 등 국보 2점,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등 보물 9점 등 국가지정문화재 21점과 도지정문화재 53점, 향토문화재 32점에 천연기념물 5점까지 포함하면 전국 230개 지방자치단체 중 '톱10'에 들 만큼 '문화재의 보고'이다.
창녕향토사연구회 김량한 부회장은 시대적 스펙트럼의 다양성을 예로 들며 창녕이 '제2의 경주'에 비유된다는 사실에 손사래를 쳤다. 신라에 거의 한정된 경주보다 낙동강이 굽이쳐 기름진 평화를 자양분으로 선사시대부터 가야 신라 고려 조선 근세에 이르기까지 독창적인 문화재와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창녕이 오히려 흥미롭고 역사적으로 가치가 더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남의 경주'라는 표현이 잘 어울릴 듯하다는 것이 김 부회장의 주장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창녕의 수많은 문화재 중 놓쳐서는 안 될 불교문화재를 둘러봤다.

동쪽으로 돌아앉은 관룡사 용선대 돌부처

관룡사 석장승. 창녕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천년고찰 관룡사 탐방은 명물 석장승부터 시작된다. 이웃한 화왕산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광경을 보고 원효대사가 명명한 관룡사 어귀에는 2m쯤 되는 석장승 2기가 서 있다. 조선의 대표적 석장승으로 지금은 창녕의 아이콘 역할을 하고 있다. 왕방울 눈, 주먹 코, 튀어나온 송곳니 등 그 표정이 우스꽝스럽지만 성스러운 공간임을 일러주는 절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지난 2003년 태풍 '매미' 때 유실 후 도난당했지만 한 달 만에 충남 홍성에서 발견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돌문(바로 아래 사진)도 놓치지 말자. 돌을 쌓아 기둥으로 삼고 그 위에 장대석 두 장을 얹은 뒤 기와를 올린사람 하나 드나들 수 있는 조그만 문이다.

관룡사만의 독특한 산문이다. 이 문을 들어서면 노란 염주괴불주머니와 스님의 머리를 빼닮은 불두화라 불리는 수국이 반긴다.
 절집은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팔작지붕 대웅전과 그 너머로 보이는 병풍바위 구룡산의 조화는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그 기품은 반야용선의 전형 미황사 대웅전을 품은 해남 달마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반면 처마가 낮은 약사전 안의 석불은 눈높이가 탐방객과 맞다. 약사전 앞마당의 삼층석탑도 손을 뻗으면 탑 머리를 만질 수 있을 만큼 앙증맞다. 그래서 정감이 더 간다. 약사전은 임진왜란 때도 소실되지 않아 이 절에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를 간직한 전각이다. 관룡사를 품은 관룡산의 참혈이 이곳에 수렴됐기 때문이란다. 그만큼 앉은 터가 좋다는 의미이다.
 관룡사를 찾으면 빠뜨려선 안 될 곳이 바로 용선대다. 사진으로 보면 까마득한 절벽 위에 부처님이 앉아 있어 꽤 멀 것 같지만 절에서 480m만 걸으면 만날 수 있다.
 용선대가 반야용선의 형상임을 확인하려면 용선대 바로 위 바위에 오르자. 암반 전체가 하나의 배로 보인다. 용선대가 불국토로 향하는 배이고, 벼랑 끝에서 사바세계를 굽어보는 석조여래좌상이 선장인 셈이다. 유홍준(명지대) 교수는 구룡산 병풍바위를 광배로 한 용선대 석조여래좌상의 모습을 두고 황매산을 배경으로 한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과 함께 문화재와 자연경관이 어우러지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고 치켜세웠다.

관룡산 용선대 전경. 건너편에 보이는 산이 영취산이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될 한 가지. 석조여래좌상은 관룡사 방향, 다시 말해 동쪽으로 돌아앉아 있다. 창녕향토사연구회 김량한 부회장은 "중생을 위한다는 의미의 반야용선의 돌부처는 (옥천리) 마을이 위치한 남쪽을 바라보고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이는 배산임수의 원칙에도 어긋난다는 것.
 이를 설명하기 위해 김 부회장은 현재 석불의 좌대와 좌대를 놓기 위해 깎은 바닥의 길이가 일치하지 않는다며(우측 사진), 석불의 좌대를 남쪽으로 90도 돌리면

 석불의 좌대와 깎인 부분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설명했다. 돌부처 목 부분의 시멘트로 덧씌운 흔적도 결국 불두를 돌리는 과정에서 야기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럼 누가 돌부처를 동쪽으로 돌려 놓았을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의 소행이란 설도 있고, 오래전 관룡사에서 절쪽으로 돌려놓았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하나 아직 확인된 것이 없다고 김 부회장은 말했다.
 중요한 것은 용선대에 오르면 극락세계로 가는 반야용선에 승선하는 의미이고, 또 용선대에서 기도하면 반드시 한 가지의 소원은 들어준다는 데 있지 않을까.

용선대로 가는 산길에서 올려다본 석조여래좌상.

관룡산 사천왕문 옆에서 본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용선대에서 본 병풍바위라 불리는 구룡산 전경.

용선대에서 본 화왕산 배바위(왼쪽)과 화왕산(정상은 아니다).



국보 34호 술정리 동삼층석탑 지킴이 일선 혜일 스님
국보 제34호 술정리 동삼층석탑 지킴이 일선 혜일 스님(맨 앞)이 지난해 부처님 오신 날 때 전국의 불자들과 함께 탑돌이를 하고 있다. 스님은 또 지역 주민들과 매일 오후 7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탑돌이를 한다.

불국사 석가탑과 비교될 만큼 아름다운 국보 34호 술정리 동삼층석탑(이하 동탑)은 오래전 국보로 지정됐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 담요와 시레기 등이 널려 있었고 주변에는 개똥과 술병 담배꽁초 등이 쌓인 방치된 탑이었다. 국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한 비구니 스님과의 운명적 만남으로 이제 창녕을 넘어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탑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사연은 이랬다. 제주에서 출가한 일선 스님(아래 사진)은 요양차 창녕으로 와 수행하던 중 지난 1998년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 스님에게 법명을 혜일로 바꾸라 명하고 인도한 곳이 동탑이었다. 새벽에 잠을 깬 스님이 꿈에서 부처님이 인도한 곳으로 찾아가보니 실제로 동탑이 있었다.

 그때부터 스님은 동탑 앞의 조그만 임시거처인 '국제 제34호 동탑관리소'(055-533-9921)에 머물면서 방치된 탑을 관리하며 주민들을 설득하는 등 동탑 지킴이를 자임했다. 주민들로부터 '이상한 스님'이란 말을 들으며 2년 정도 묵묵히 동탑을 관리하던 스님은 2001년 우연히 동탑 옆 비석에 새겨진 희미한 '국보'라는 한자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후 스님은 창녕문화원과 군청 등에서 동탑에 대한 문헌을 수집하던 중 동탑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용구가 발견됐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문의했지만 '발견 기록은 있지만 보관 기록은 없다'는 성의없는 답변만 받았다. 참다 못한 스님은 발로 뛰었다. 문화재청의 문화재지킴이 교육에 참여, 국보인 동탑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며 열변을 토하는 한편 청와대에 민원을 넣고, 국립박물관을 찾아 10일간 아예 박물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자료를 뒤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이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박물관과 문화재청이 본격 수소문했고, 그 결과 박물관 수장고에서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사리용구가 발견됐다. 1965년 동탑을 해체 복원한 후 38년 만인 2003년 불사리장엄구(부처님 사리를 넣은 함) 등 탑 안의 유물이 비로소 햇빛을 본 것이다.
 이때부터 동탑 보존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문화재 보호비로 6억8000만 원이 내려오고 예산 타령만 하던 군도 뒤늦게 발벗고 나섰다. 주변 부지도 매입, 지금까지 탑 주변의 100여 가구를 이주시켰다. 차량 통행을 우회시키고 탑 주변의 보기 흉한 전깃줄도 말끔하게 정리했다. 1300년간 방치됐던 동탑이 한 스님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엄청난 성과를 일궈낸 것이다.
 혜일 스님은 아직도 할 일이 남았다고 했다. 석가탑에서 발견된 사리함 등이 석가탑과 함께 진작 국보로 지정됐지만 동탑에서 뒤늦게 햇빛을 본 사리병 등 유물의 문화재 지정에는 문화재청이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이를 위해 창녕향토사연구회 측과 함께 지금도 문화재 지정에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편조대사 신돈의 발자취와 삼성암 보광전 내 석간수샘

관룡사 팻말 건너편이 옥천사진 입구다.

깨진 흔적을 보면 인위적으로 훼손했음을 알 수 있다.


창녕은 고려 공민왕 때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개혁에 앞장섰던 편조대사 신돈이 태어나 출가한 곳. 관룡사 입구 도로 우측 편에 출가한 곳인 옥천사지가 있다. 절 입구 간이매점 옆 '관룡사 1.2㎞' 팻말 우측 숲 속으로 들어서면 절 기초석과 탑의 면석, 부도 하대석 등이 널브러져 있어 신돈의 실각과 함께 인위적으로 훼손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돈이 태어난 일미사지는 옥천저수지 아래 일매교를 건너 배롱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문암정을 지나 구현산 기슭 죽림에 둘러싸여 있다. 일미사지 아래에는 펜션이 한창 공사 중이다. 이곳 대나무 숲 주변에는 석축과 두터운 기와편들이 발견된다. 또 커다란 석조와 멧돌이 있었지만 3개월 전 창녕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일미사지 기와 파편.

일미사지서 발견된 석조(왼쪽)와 멧돌(오른쪽). 창녕박물관에 있다.

일미사지.


통도사의 말사로서, 울산의 문수암 미타암과 함께 기도 효험이 빼어난 도량으로 알려져 있는 삼성암은 법당인 보광전 아래 특이하게 석간수샘이 있다. 가뭄 때도 절대 마르지 않는 이 샘은 실제 바닥 일부를 걷으면 3m쯤 아래 있다. 절에선 샘을 깨끗이 청소한 후 대리석으로 깔끔하게 정리해 놓았다. 보광전 앞 수도꼭지는 이 물을 빼올린 것으로 신비의 석간수로 알려져 탐방객들은 빠뜨리지 않고 찾는다.

삼성암 보광전 내 석간수샘. 마루바닥 일부를 걷으면 볼 수 있다.

석간수샘을 빼올린 수도꼭지.


이 밖에 송현동 고분군 옆에 위치한 송현동 석불좌상과 고암면 창녕자연휴양림 내 감리 마애여래입상 또한 부처님의 온화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다.


창녕 맛집 둘

'화왕산 된장 청국장마을'-각종 나물에 된장 넣은 비빔밥 일품
'가현한우생고기'- 우포늪 인동초 먹인 한우 가격도 맛도 그저그만

'금강산도 식후경'. 창녕만의 맛은 창녕 불교문화재 순례의 화룡점정이다. 관룡사 입구 옥천저수지 인근에 위치한 '화왕산 된장·청국장마을'(055-521-3337)은 직접 메주를 띄워 담근 청국장과 된장 등을 맛볼 수 있다. 주변의 많은 청국장집 중 원조가 바로 이 집이다. 보글보글 뚝배기에 끓여내온 청국장과 고사리 취나무 시레기 등을 넣고 밥을 비벼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가격은 5000원. 정구지와 팽이버섯을 곁들인 오리불고기 또한 별미 중 별미이다. 2만~3만 원.

창녕읍에서는 또 우포 인동초를 먹인 한우가 유명하다. '가현한우생고기(055-532-9259)는 창녕지역 도축장((주)영남엘피시)과 함께 있어 싱싱한 1등급 한우를 저렴하게 맛볼 수 있다. '양 많고 싸고 맛있는' 집이다. 한우 모둠(600g)이 3만5000원. 10명이 찾아 고기와 함께 식사를 해도 13만 원 안팎으로 부담없이 한우를 즐길 수 있다.




부산의 맛 - 부산 기장군 칠암 붕장어회

보슬보슬…꼬들꼬들 밥알 같은 '아나고회' 
씹히는 맛 회 중 최고…담백·고소함은 일품
지방·비타민A, 오메가-3 등 갯장어보다 영양 높아
기장 ~ 울산 사이 동해안 수심 350m 펄 서식
양식은 불가, 붕장어회는 모두 자연산
기장 칠암리 해안가 붕장어회 1번지
'안칼' 작업 따라 씹는 맛 조금씩 달라

"단골들은 바로 압니다. 씹히는 맛이 우선 틀리거든요. 휴가철인 여름철 어획량이 적어 어쩔 수 없이 남해안이나 전라도 지역의 물량을 받아 손님들에게 내줬더니 단박에 알고 이렇게 물어보지 않겠어요."
'이거 동해 쪽에서 잡은 것 아니제'.

일명 '아나고'로 불리는 붕장어회 1번지인 부산 기장군 일광면 칠암리 칠암횟촌번영회 이동명(53) 회장의 경험담이다. 그는 "칠암을 찾아야 비로소 붕장어회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며 "붕장어회는 대한민국에서 칠암이 가장 맛있다"고 자부했다.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 중 맛에 관한 한 전국 최고라고 자신있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칠암 붕장어회라는 것이다. 단지 지명도가 약간 떨어지는 부산의 맛이라는 아쉬움을 갖고 있지만.

갯장어보다 싸지만 영양가 높아

보양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장어류는 크게 뱀장어·먹장어·갯장어·붕장어 등 네 종류. 하지만 바닷가인 부산에서조차 이 네 가지 장어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사람은 드물다. 용어 정리부터 하고 넘어가자.

우선 뱀장어. 흔히 말하는 고가의 민물장어다. 유일하게 양식이 가능하다. 먹장어는 곰장어다. 부산사람들이 흔히 '꼼장어'로 부르는 놈이다. 주둥이가 길고 입이 큰 갯장어는 여름철이 제철인 '하모회'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붕장어는 흔히 말하는 '아나고'로 회나 구이로 먹는다.

이렇게 볼 때 장어류 중 회로 먹는 것은 갯장어와 붕장어뿐이다. 고급 횟감으로 통하는 갯장어(하모회)는 경남 통영 고성, 전남 여수 등지가 주산지로 가격은 붕장어보다 훨씬 비싸지만 영양성분은 되레 붕장어가 더 빼어나다. '생선회 박사'로 유명한 부경대 식품공학과 조영제 교수는 "지방 함량을 비롯 오메가-3(DHA+EPA), 비타민A는 붕장어가 갯장어보다 훨씬 더 많아 혀로 느끼는 고소함이 더 좋다"고 설명했다.

꼬들꼬들·고소·담백, 독특한 맛
   
해운대~송정~대변~일광해수욕장을 지나 만나는 기장군의 조그만 포구 칠암(리). 이곳에는 해안가 1㎞를 따라 횟집만 30여 개나 펼쳐져 있다. 모두 붕장어회를 전문으로 한다. 국내 최대 붕장어회 단지다.

칠암 해안가를 따라 펼쳐진 붕장어횟집.

칠암 앞바다. 경치가 수려하다.


칠암 해변가에 펼쳐진 난전.

인심이 넉넉히 아주 저렴하다.


칠암횟촌 일대의 맛은 사실 '오십보백보'. 횟집 주인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인정한다. 이 중 칠암횟촌번영회 이동명(53) 회장이 운영하는 수중횟집(051-727-1697)을 찾았다. 대로변인 바닷가가 아니라 약간 들어간 골목에 위치하다 보니 단골들만 찾는 숨은 횟집이다. 안주인 한말연(52) 씨는 "전망이 좋지 않다 보니 더 많은 양과 친절한 서비스로 승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궁금했다. 튀밥처럼 먹음직스러운 붕장어회가 어떻게 만들어져 나오는지. 한 씨는 한참 고민 끝에 주방을 개방했다.

껍질 벗기고, 안칼 작업 후 세절기에 넣기 전.

생선회 세절기.

순식간에 이뤄진다.


팔딱거리는 붕장어를 기절시킨 후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제거한다. 여기까지는 어디서나 똑같다. 이후 한 씨는 길게 칼집을 두 번쯤 넣으며 "이 작업을 여기선 '안칼'이라고 하는데 칠암 붕장어회가 부드러우면서 씹히는 맛이 빼어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설명했다. 칠암만의 독특한 작업인 것이었다. 뼈는 보통 제거하지 않지만 노약자와 아이들이 있을 경우나 손님이 특히 원할 경우 제거한다고 했다.

기본 작업이 끝나면 붕장어를 두 동강 낸 후 생선회 세절기에 넣는다. 뼈를 제거한 것은 한 번, 제거하지 않은 것은 두 번 내린다. 순식간에 이뤄진다. 수북히 쌓인 붕장어회는 기름기를 제거하기 위해 물로 서너 차례 헹군 후 마지막은 반드시 정수기물로 깨끗이 씻었다. 이후 부드러운 망에 넣고 탈수기로 돌린다. 뼈를 제거한 것은 뼈와 살 사이의 공간이 많아 8분 정도, 뼈를 뺀 것은 5분 정도 돌렸다.

세절기를 통과한 아나고회.

물로 서너 차례 헹군다.

부드러운 망에 넣고 탈수기에 돌린다.


작은 소쿠리에 담겨져 나온 붕장어회는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었다. 콩고물을 넣은 양배추에 초장을 적당히 섞은 후 붕장어회를 넣고 건성건성 비빈 후 쌈을 싸먹는다. 초장을 너무 많이 넣으면 야채의 숨이 빨리 죽고, 붕장어회를 넣고 너무 많이 휘저으면 회의 질감이 떨어져 회 고유의 제맛이 나지 않는다. 여기에 칠암의 특산품인 잎마늘(상추마늘)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

소쿠리에 담겨줘 나오는 칠암 붕장어(아나고)회.

기본 상차림.

아나고 맛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초장.

수중횟집이 유황을 넣고 직접 키운 야채.


그럼 맛은. 고소하며 담백하고, 꼬들꼬들 씹히는 맛이 일품이다. 먹는 기쁨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붕장어회를 두고 누가 봄도다리가 최고라고 했는지. 그 사람은 아마도 붕장어회를 먹어 보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양념구이용 붕장어의 작업은 달랐다. 등줄기에 길게 칼을 댄 후 내장과 뼈, 머리를 각각 제거했다. 수중횟집의 양념구이는 독특하게 황기 천궁 등 12가지 한약재를 넣은 한방양념구이였다. 가격에서 부담스러운 민물장어구이와 함께 놓고 구별해 보라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다. 별미 중 별미다. 입에서 녹는 것은 민물장어만이 아니었다.

구이용으로 장만한 붕장어.

수중횟집의 한양 양념구이.


칠암 붕장어회, 그것이 알고 싶다
  
붕장어는 모두 자연산이다. 양식산이 없다는 것. 칠암사람들은 "이곳에서 19마일쯤 떨어진, 기장과 울산 사이의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수심 350m 펄층에서 서식하고 있는 사실만 알 뿐 어민들도 붕장어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국립수산과학원 진해내수면양식연구센터 김대중 연구사는 "현재 일본의 한 연구소가 붕장어의 양식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한 후 "국내 연구진도 붕장어의 양식과 관련해 연구비 등 주변 여건만 성숙되면 가능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획량이 충분한 데다 무엇보다 타산성이 없기 때문에 연구를 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붕장어회는 탈이 자주 난다. 구토 등 소화불량 증세가 나타나는 이른바 '아다리'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한보용(66) 칠암어촌계장은 "지난 1970, 80년대에는 이 같은 현상이 자주 발발해 식당별로 보험까지 가입하는 등 심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일이 드물다"고 말했다. 그는 "붕장어 피 속의 약한 단백독소가 구토 설사 등의 주원인"이라며 "지금은 식당별로 붕장어를 장만할 때 이 부분을 주의하고 있으며, 혹 먹을 때 붉은 핏대가 보이면 먹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독소는 가열하면 분해되므로 구이를 먹으면 절대 탈이 나지 않는다.

붕장어회는 언제부터 탈수기로 물기를 제거하고 콩가루를 곁들인 야채와 함께 먹었을까. 수중횟집 안주인 한 씨(바로 위 사진)는 "둘 다 1990년 중반부터"라고 말했다. 양배추는 특히 붕장어회의 소화를 촉진시킨다고 한다.

붕장어의 내장은 별미라고 하던데. 사실이다. 하지만 손이 너무 많이 가 아주 특별한 손님이 오면 해줄까 판매는 하지 않는다. 내장탕 내장구이모두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고 한다.


한보용 칠암어촌계장 인터뷰

 "붕장어는 칠암이 원조, 올해 10월 붕장어축제 개최"  
 
한보용(66·아래 사진) 칠암어촌계장의 삶은 칠암 붕장어회의 '산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기장 장안읍 월례리에서 태어나 3세 때 이웃 일광면 칠암(리)으로 이사와 군대 3년을 빼곤 지금까지 칠암에서 붕장어회와 함께했다. 젊었을 때 15년간 붕장어를 직접 잡으러 나가기도 했던 그는 이후 배는 동생에게 물려주고 칠암에서 용당횟집(051-727-0560)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현재 칠암과 기장읍 연화리, 일광면 학리에서 각각 붕장어를 잡고 있지만 원조는 칠암이라고 강조했다. "1950, 60대엔 1t도 채 안 되는 돛단배를 몰고 연승(주낙)으로 붕장어를 잡아 일본으로 바로 수출했지요. 이후 1965년부터 정부 융자로 동력선을 마련했지만 이상하게도 붕장어가 잘 안 잡혀 대부분의 어민들이 고데구리 어업으로 돌아섰어요. 불법이었죠."

하지만 1980년 정부에서 사업 자금을 저리로 융자해줘 고데구리 불법 어업 대신 다시 붕장어를 합법적으로 잡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일부에서는 연화리에서 붕장어를 가장 먼저 잡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연화리는 1975년쯤 통발 배로 붕장어를 잡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물론 연승 배가 아닌 통발 배로는 먼저 붕장어를 잡기 시작했지만 연승, 통발 배를 통틀어 붕장어를 잡기 시작한 것은 엄연히 칠암이라고 했다.

"지금은 붕장어를 이웃 학리에서 가장 많이 어획하고 있어요. 칠암이 18척, 연화리가 30척, 학리에서 40척의 붕장어 배가 있지요." 하지만 한 계장은 칠암이 붕장어의 가장 큰 집산지라고 했다. 마치 울진 등 다른 지역의 배들이 대게를 더 많이 잡고 있지만 유통망이 빼어나 영덕이 대게로 유명해진 것처럼 지금의 칠암은 비록 배가 적어 붕장어 어획량이 적지만 가장 소비가 많아 붕장어회의 중심으로 여전히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다.

붕장어축제는 칠암과 연화리에서 매년 돌아가며 개최한다. 올해는 오는 10월 칠암에서 열린다.

부산의 맛 - 동래파전

싱싱한 파·해산물 주재료…농·어업 동시에 가능한 부산 지리적 특성이 낳아
유래 밝힌 문헌 없어…조선시대 고관 술안주에서 장터 등 서민 음식된 듯
부산 동래구청 주자창 인근 '동래할매파전'집 4대째 70여 년 전통 이어
봉사단체 동래파전연구회…표준화된 조리법 연구 등 관광자원·브랜드화 앞장

4대째 7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온 부산 동래구청 인근 '동래할매파전'.
 
"이 전의 이름이 뭐죠. 밀가루로 얇게 부쳐내는 일반 파전과는 달리 파가 엄청 많이 들어 있어 두툼하고 푸짐하네요. 간장이 아니라 독특하게 초장 소스를 찍어 먹네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게 계란 등이 약간 더 바삭하게 구워지면 더 좋을 듯 하네요."-충북 충주시 거주 이경진(여·87)

"대개 전 종류는 남자들이 좋아하지 않지만 동래파전은 막걸리 등 우리나라 전통주와 궁합이 잘 맞아 남자들도 아주 선호할 것 같은데요."-경남 창원시 거주 최정석(57)

"굴 홍합 새우 등 싱싱한 해물과 야채가 들어가는 동래파전은 영양가가 풍부하고 양도 푸짐해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을 듯 합니다."-인천 거주 김선미(여·58)

동래파전의 상품화 마케팅 이젠 절실   
 
 지난해 12월 말 부산시와 부산시관광협회가 남해안 관광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의 3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남해안 크루즈 선상 팸 투어에서 부산의 대표 향토 음식인 동래파전을 시식한 후 나온 다른 지역 참가자들의 반응이다.

당시 동행했던 동래구청 문화공보과 김선희 씨와 부산시청 관광진흥과 김귀옥 씨는 "동래파전이 부산의 대표 음식이긴 하지만 전국적인 지명도가 약해 신통찮은 반응이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했지만 예상 외로 좋은 반응이 쏟아져 관광상품으로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역시 크루즈 팸 투어에 함께 참석한 부산발전연구원 우석봉 박사는 "흔히 관광의 3대 요소라 불리는 볼거리, 즐길거리, 먹을거리만으로 볼 때 부산은 먹을거리 부문에서 가장 취약해 하루빨리 시 차원에서 부산의 대표 먹을거리를 선정해 국내외를 대상으로 홍보마케팅 활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남해안 관광 활성화 방안을 위한 부산·경남·전남 등 3개 시·도 공동 용역을 맡고 있는 우 박사는 경남 전남 지역의 연구원들과의 정기적인 만남에서 부산의 먹을거리의 빈약함을 이렇게 토로했다.

"전남도의 경우 기본적으로 시·군을 대표하는 음식이 너무 많아 어떤 음식을 대표 음식으로 선정해야 할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으며, 경남도는 지난해 난중일기 등 옛 문헌을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 작업을 거쳐 '이순신 밥상'을 복원해 관광상품으로 대히트를 치고 있어요. 하지만 부산은 동래파전이라는 괜찮은 콘텐츠가 있어도 이를 응용해 상품화하는 전략조차 아직 없어요."

향토성을 가장 잘 간직한 음식

파가 주재료인 동래파전은 부산의 음식 중 가장 지역성과 향토성을 잘 간직한 음식이다. 이는 재료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파 미나리 대합 홍합 굴 새우 쇠고기 계란 멥쌀 및 찹쌀가루 등과 맛국물을 내는 재료인 멸치 다시마 띠포리 등은 하나같이 부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결국 동래파전은 어업과 농업이 동시에 가능했던 부산지역의 지리적 특성이 낳은 자연발생적인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동래파전은 언제부터 먹어온 음식일까. 아쉽게도 이에 대한 대답을 흔쾌히 해주는 문헌도 없을 뿐아니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도 거의 없다. 동래파전의 유래가 일부 알려져 있는 이유는 구전이나 당시의 시대적 정황으로 추측했을 뿐이다.

원로 소설가 최해군 선생은 "동래가 조선시대 도호부 때 대일 외교와 군사상의 요지로 조정 고관들의 왕래가 잦아 그들을 접대하기 위한 술자리에서 안주로 나오던 파전이 점차 발달해 지금의 동래파전으로 정착된 것이 아닐까 한다"고 설명했다. 이후 고관들의 술자리에 동석했던 동래 관기들이 나이가 들어 은퇴하면서 점차 여염집에서도 동래파전이 재현되고, 이것이 다시 널리 퍼져 동래장터에서 서민들의 음식으로 변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못했던 시대를 거치면서 동래파전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동래 기생들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동래할매파전'이 동래파전의 원조
   
부산에서 동래파전을 설명하기 위해선 동래구청 앞에 위치한 '동래할매파전'을 빼놓을 수 없다. 380년 된 아름드리 팽나무가 바로 옆에 기품있게 서 있는 이 집은 김정희(47) 대표의 시증조할머니가 동래파전집을 연 1930년대 이후 시할머니(1986년 타계), 시어머니(1995년 타계)를 거쳐 지금까지 4대째 70여 년간 전통 방식으로 고스란히 대물림해오고 있다. 김 대표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1970대 초까지 '제일식당'이란 상호를 사용하다 이후 지금의 '동래할매파전'으로 바뀐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부산의 민속음식점 1호점답게 인테리어가 고풍스럽다. 한지를 바른 여닫이 문에 그릇 하나 수저 하나까지 세세한 신경을 써 정감이 간다. 맛은 어떨까. 물기가 없이 부치는 일반 파전과 달리 쌀가루(멥쌀 및 찹쌀)를 갈아서 사용해 찰진 맛을 우선 느낄 수 있다. 해산물의 시원한 맛과 파의 부드럽고 달짝지근한 맛이 어울려 한마디로 '봄맛'이다. 조리 과정에서 두꺼운 파를 골고루 익히기 위해 뚜껑을 덮어놓은 덕분에 파의 향기까지 은은하게 배어난다. 노란 호박동동주와 분홍빛의 오미자동동주를 한 잔씩 걸치니 세상 부러울 것 하나 없다.

식사 중 김 대표의 희망 섞인 한 마디가 귀에 꽂힌다. 최근 외국인과 젊은층이 많이 찾는 등 손님이 예전에 비해 약간 늘고 있다고 한다. 동래파전이 슬로푸드이며 웰빙 음식인 것을 뒤늦게 알았던 것일까. 하지만 이들은 전통 방식인 초장 대신 간장을 찍어 먹는다고 한다. 여기에 외국인은 한 입 크기로 잘라달라고 요구하고, 일본인은 4등분 정도로 미리 잘라 나왔으면 좋겠다고 주문한다.

1995년부터 '동래할매파전'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김 대표는 "전통은 전통대로 고수해야 겠지만 새로운 수요자들의 요구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고민이 많다"며 "앞으로 동래파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매년 열리는 '동래읍성축제' 때 봉사단체인 동래파전연구회가 동래파전을 재료값 정도로 판매하고 있다.
'동래파전연구회'는 동래읍성축제 때 동래파전 시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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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파전연구회를 아시나요   
 
2004년 11월 동래구청은 '동래파전연구회'라는 단체를 발족시켰다. 동래파전의 맛을 널리 알리기 위해 표준화된 조리법은 물론 역사적 유래와 영양학적 가치 등을 연구해 동래파전을 관광자원 및 브랜드화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일종의 자원봉사단체이다.

현재 회원은 30명. 대부분 사회봉사에 적극적인 전업 주부로 구성된 이 단체는 지금까지 매월 1~2회 동래문화회관에 모여 직접 재료를 구입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동래파전을 연구한 끝에 2006년 나름대로 표준화된 조리법을 완성했다.

회원들은 이를 바탕으로 매년 개최되는 동래읍성역사축제와 대한민국 축제박람회 때 난전을 펼친다. 이들은 전국의 관광객들이 보는 앞에서 동래파전을 부쳐 재료비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도 하는 한편 관광객들이 직접 동래파전을 부쳐보도록 하는 등 동래파전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뿐만 아니라 관내 무의탁 노인들에게 식사 대신 동래파전을 직접 부쳐 대접하고 있다. 최근에는 인절미 김치 청양초를 곁들인 퓨전 동래파전을 개발해 널리 알리고 있다. 이런 연유로 회원들 중 김정숙 씨가 동래구청 인근에 '초암'이라는 동래파전집을 열어 전통 동래파전과 함께 퓨전 동래파전을 판매하고 있다.

동래파전연구회 회장인 동부산대학 김소미 호텔외식조리과 교수는 "앞으로 현대인의 입맛에 맞는 동래파전을 연구해 브랜드화에 매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원로 소설가 최해군 선생과 동래파전

- "동래고보 입학식땐 학교 앞에 아낙네 모여 솥뚜껑으로 파전 지져대"
   
취재 당일 '동래할매파전'집에 원로 소설가이자 '부산 역사 지킴이'로 불리는 최해군(85·아래 사진 오른쪽, 왼쪽은 '동래할매파전' 김정희 대표) 선생이 동행했다. 누구보다도 동래파전과 관련된 일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5년 펴낸 회고록 '문단 이야기'(해성)에서도 그는 동래파전 이야기로 일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오래전부터 동래 일대에는 파전이 널리 지져졌다고 한다. 예를 들어 동래고의 전신인 동래고등보통학교 입학식 때는 학교 앞에 솥뚜껑을 거꾸로 해서 파전을 붙이는 아낙네들이 난전을 펼쳐 입학식에 오는 손님은 파전 한 넙떼기와 막걸리 한사발이면 점심 없이 배부름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동래고보의 입학식은 4월 1일. 이 즈음이면 동래파전의 주재료인 조선파의 맵싸한 맛이 오르고 미나리꽝에도 새순이 돋아 근처 바다에서 나온 싱싱한 홍합 굴 등과 알맞게 버무려 지지면 1년 중 최고의 맛을 보였다고 한다. 최 선생이 동래고 교사로 재직하던 1960년대 후반기의 회식 땐 주로 파전집으로 갔다. 당시 파전집으로 유명한 곳은 '용각' '수정집' '이화장'과 일명 '할매집'으로 불리던 '제일식당'.

최 선생은 "당시 '제일식당'의 할매는 추강(秋江) 여사로 불리는 60대였는데 깔끔하면서도 교양이 있어 문인들과 교수 등 지식인층이 단골로 자주 찾았다. 그 추강 여사가 지금의 '동래할매파전' 김정희 대표의 시할머니"라고 말했다. '동래할매파전' 집이 오늘날까지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식당임을 최 선생이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그때 단골들의 면면을 보면 전 국회의장 곽상훈, 전 부산교육대학장 김하득, 수필가 박문화 , 향파 이주홍, 전 부산대 교수 박지홍, 전 부산교육대학 교수 이주호 씨 등이었다. 특히 추강 여사는 향파 선생과 죽이 맞아 향파 선생이 오면 '아이고 향파 선생님'하고 온후한 기품으로 환대를 했다. 이어 동래파전과 막걸리를 상으로 차린 뒤 나머지 일은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맡기고 자리를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는 향파의 해학과 추강의 응수가 어우러져 밤새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최 선생은 '동래할매파전'집에서 추강 여사의 손자며느리인 김정희 대표가 만든 동래파전을 맛보면서 당시의 맛과 약간 차이가 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월의 더께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나이가 들어 입맛이 변했는지 하여튼 당시 추강 여사의 파전은 산뜻한 맛이었다"며 잠시 40여 년 전으로 기억을 되돌리는 듯했다.

- '꽃과 사람' 8명 완연한 봄 맞아 경주 토함산으로 번개출사
-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아름다운 자태 렌즈에 담아

- 노란 꽃다지와 첫인사 후 멸종위기 노랑무늬붓꽃 감상
- 각개전투하듯 다양한 자세로 자기만의 촬영모드 돌입

- 야생화 특성·꽃말 등 꿰뚫어 회원 모두 움직이는 식물도감
- 영남알프스·무룡산·노자산 등 부울경 대표적 출사지도 섭렵













번개 출사지는 경주 토함산(745m)이었다. 일반적으로 불국사와 석굴암을 품고 있고 하늘에 제를 지내던 신라 5대 영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토함산은 산꾼들에게는 단석산 남산과 함께 경주의 3대 명산이자 동해바다를 굽어보는 해맞이 명소로 인식돼 있다.

반면 야생화 마니아들에게 토함산은 산나물과 함께 야생화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오랜 친구와도 같은 푸근한 육산으로 사랑받고 있다. 같은 산이라도 이처럼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종족 보존 위해 더욱 많이 핀 야생화
 
부산 근교의 대표적 야생화 출사지로는 정자항을 품은 울산 무룡산, 양산 천성산 상리천, 고성 문수산 늘앗골, 거제 노자산과 영남알프스 가지산 신불산 등이 있다. 이 중 왜 토함산이냐고 물었더니 "지금 이 시기에 가장 다양한 종류의 야생화가 도처에 고개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완연한 봄이지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떠오를 정도로 봄바람 속에 새치름함이 남아있었다. 자연스럽게 날씨와 야생화의 관계가 화두로 먼저 떠올랐다.

'꽃과 사람' 김병권 회장은 "올해는 날씨 덕분에 되레 일부 야생화는 더 많이 피었다"고 운을 뗐다. 약간 귀를 의심했다. 분명 올해는 이상 저온과 잦은 강수에 따른 일조량 부족 등으로 농작물 피해가 발생하고 있어 야생화 또한 예외가 아닐텐데.

김 회장은 오래전 김영삼 정부 집권 첫해를 회상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엔 이른 봄부터 7월까지 가물었어요. 야생화 마니아들은 아마도 거의 꽃이 피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신불산에 올랐는데 예년과 달리 키 작은 철쭉이 신불산 평원을 가득 메우고 있지 않겠어요. 그것도 아주 화려하게. 생명의 위협을 느낀 철쭉이 종족 보존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 꽃을 피운 거지요. 죽기 전 소나무가 가지마다 솔방울을 가득 달리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지요."

올해 야생화도 당시와 유사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는 "올봄의 경우 이상 저온 등으로 야생화가 생각보다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각시붓꽃이나 반디지치 같은 일부 야생화는 급증했다"고 말했다. 통상 야생화는 한 해 걸러 많이 피고 적게 피고를 반복하는 해걸이를 한다. 지난해 많이 핀 각시붓꽃이 상대적으로 적어야 하지만 역시 종족 보존을 위해 많이 핀 것이라고 한다. 비록 예년에 비해 일주일 정도 늦게 만개했지만, 덕분에 마니아들은 신이 났다. 손톱만 한 크기의 조그만 야생화가 지구 이상 기온의 중요한 지표가 될 줄이야. 야생화 보존. 더 나아가 생물종 다양성 보존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경주 토함산은 야생화의 보고  
 
이날 번개 출사에 나선 회원은 8명. 여자 셋, 남자 다섯. 얼핏 적은 듯하지만 야생화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 정도가 적당하다고 한다.

인터넷 동호회가 늘 그렇듯 그들은 남녀노소 관계없이 '님' 자를 붙여가며 닉네임을 사용했다. 근교인 범의귀 큰바우 천지 지음 그림자 해피맘 그리고 모만호가 그들. 맨 후자는 닉네임 같지만 본명이다. 그는 동래원예고 교사다. 오래전 가입했지만 출사는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이날 전문가 수준의 회원들이 잘 모르는 야생화를 해박하고도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선생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지금 토함산의 모습은 파스텔톤으로 분칠한 화사한 신부 같다. 수종에 따라 연두색 잎이 농담을 달리하며 푸름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연중 이때의 신록이 가장 예쁘다. 그 모습에 반해 한동안 멍하니 서 있자 야생화꾼들이 한마디 던진다. "이 기자, 오늘은 허리를 숙여야 큰 성과가 있다구."

그랬다. 수줍은 듯 고개를 내민 야생화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는 허리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다가서야 비로소 야생화는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를 나눠주기 때문이다.

이날 찾은 토함산 시부걸 코스는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2월 말이면 변산바람꽃을 비롯 복수초 가지복수초 노루귀(청색 분홍색 흰색) 올괴불나무 등을 볼 수 있는 데다 특히 이 시기에는 노랑무늬붓꽃 애기송이풀 등 멸종위기 및 희귀식물이 적지 않아 봄 야생화 순례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산길 또한 부드러워 야생화 산행지로 금상첨화다.

노란 꽃다지가 봄바람에 하늘거리며 첫인사를 한다. 농부의 눈에는 한낱 잡초에 불과하지만 군락을 이룬 자태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산괴불주머니도 지천이다. 오랑캐꽃이라고도 불리는 제비꽃도 반갑게 인사한다. 흔히 보리고개 때인 4월 북방 오랑캐가 쳐들어올 때 한참 펴 오랑캐꽃이라 명명됐다 전해오지만 모 선생이 꽃을 따 보여주며 꽃잎 뒤의 꿀주머니가 오랑캐의 뒤통수를 닮아 오랑캐꽃이라고 설명했다. 하찮아 보이는 풀꽃 하나에도 생김새에 따라 그럴듯한 전설이 숨어 있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노랑무늬붓꽃 앞에서 모 선생의 설명이 이어진다. "우리나라 식물은 크게 환경부의 멸종 위기 식물 1급(8종) 2급(56종), 산림청의 희귀식물(217종) 후보종(44종)으로 지정돼 있어요. 노랑무늬붓꽃은 멸종 위기 2급에 해당되지요."

산중 회의도 잠시 열렸다. 회원 '지음' 씨가 늘 보는 모습과 약간 달라 어떤 천남성인지 화두를 던졌기 때문이었다. 장희빈의 사약 원료로 알려진 천남성은 쉬운 것 같지만 종류가 많아 의외로 어렵다고 한다. 다음 날 '지음' 씨는 홈페이지에 문제의 사진을 올리면서 둥근잎천남성(아래 사진)이라고 못을 박았다. 잠시 농담 하나. 여성들은 가급적 천남성을 홈페이지에 올리지 말지어다. 발음이 '첫남성'이라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란다.

회원 '범의귀'는 비록 꽃은 피지 않았지만 가늘게 자란 잎만 보고 애기나리라고 했다. '야생화 하는' 사람들은 꽃이 피기 전과 지고 난 후의 잎을 봐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각개전투하던 회원들이 모처럼 한곳으로 모여든다.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 애기송이풀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기 때문. 중부 이남에서는 보기 힘든 '귀하신 몸'이라 다들 배낭을 내려놓고 본격 촬영 모드에 들어갔다. 새를 닮은 진분홍빛 꽃도 앙증맞지만 애기송이풀을 완벽하게 담으려는 회원들의 다양한 자세가 가관이다. 앉아 쏴, 엎드러 쏴, 쪼그려 쏴는 기본이고 요가를 응용한 이상야릇한 폼도 자연스럽게 나온다. 사바세계에서는 내외할 법도 한 관계지만 산속 야생화 앞에선 몸이 밀착되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등이나 엉덩이 무릎에 흙이 묻는 것은 보통이었다. 야생화의 힘이었다.

"회원들의 몸이 어쩌면 저렇게 유연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40분쯤 뒤 누군가 '갑시다'라고 외치자 아쉬운 듯 자리를 뜬다. 애기송이풀을 두고 회원 '근교인'은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린 후 진분홍빛의 정열적인 새를 닮았다며 '불새꽃'(아래 사진)이라 부르길 강력히 주장한다고 적어 놓았다.

이름 그대로 족도리를 닮은 족도리풀은 누군가 촬영을 위해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해놓았다. 잠시 헤어졌던 모 선생이 "이거 한번 드셔 보세요"라며 뭔가를 하나 건네준다. 입에 넣었더니 약간 새콤한 맛이 났다. 큰괭이밥으로, 강원도 태백에서는 '새콤이'라고 부른다며 우리 산야에선 알고 보면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었다.

날개현호색도 만났다. 소박하고 은은한 존재감.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 아닐까. 모 선생은 "자세히 보세요. 꽃자루 뒤에 붙은 턱잎이 애기 손을 닮았지요. 현호색은 제비꽃처럼 변종이 많아요. 그래서 어려워요"라고 설명했다. 옆에 있던 회원 '큰바우' 씨는 "공부를 안 하면 여기서는 왕따가 된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25년간 골프도 치고 등산도 해봤지만 야생화만큼 재미있는 취미가 없다"며 "나이 육십이 넘어 뒤늦게 야생화를 알게 된 것이 내 인생의 큰 기쁨"이라고 덧붙였다.

그들의 야생화 사랑은 끝이 없었다. 고양이 눈을 닮은 선괭이눈과 상괭이눈, 산자고와 앵초, 각사붓꽃, 털제비꽃 등등. 그들은 예외 없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일일이 렌즈에 담고 또 담았다. 여전히 등이나 엉덩이에 흙을 묻혀 가면서.

각시붓꽃.

선괭이눈.


덩굴꽃말이.

산자고.



'꽃과 사람' 번개 출사 회원들은 간단한 점심 식사 후 오전 작업이 성에 안 찼던지 귀향길에 울주군 연화산을 찾았다. 분꽃나무가 향기를 뿜고 있고 앵초의 대규모 군락지가 있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이곳은 또 북쪽에만 있는 걸로 알려져 있는 홀아비꽃대와 남쪽에만 서식하는 걸로 알려진 옥녀꽃대가 동일 장소에서 서식하고 있는, 아마도 전국에서 유일한 곳이다. 그들의 정열과 애착에 경의감마저 느껴진다.


야생화는 정보 싸움, 화무십일홍을 잊지 마라

'꽃과 사람' 회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야생화는 정보와의 전쟁이라고 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가장 뼈에 사무치는 사람이 바로 야생화꾼들이기 때문이다.

"10여 일 정도 바쁘거나 어떤 이유에서든 특정 꽃을 못 보고 지나가면 꼬박 일 년을 기다려야 되지요. 또 귀한 꽃이 피는 장소와 시기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동호회 활동을 통해 정보를 알 수 있지요."

야생화꾼들은 또 아주 부지런해야 한다. 풍경도 그렇지만 야생화도 통상 해 뜨고 1시간, 해 지기 전 1시간 즈음, 촬영하기 가장 좋다고 한다. 해서 시간을 맞추려고 무진장 노력한다. 하지만 모든 야생화가 그러한 룰에 맞게 피고 지고를 하는 것은 아니다.

 복수초와 변산바람꽃은 햇빛을 제법 받은 오전 10~11시쯤 만개하고, 산자고나 깽깽이풀 만주바람꽃은 날씨가 화창한 오전 11시~오후 2시 꽃을 피운다. 그래서 야생화꾼들은 그 같은 부단한 작업을 두고 '운팔기이'의 외로운 작업이라고 한다.

야생화를 알게 되면서 회원들은 자연을 더욱 더 사랑하게 됐다고 했다. "대자연 속에서 그 가치를 몸으로 깨닫는 작업이야말로 진정 자연친화적 삶이 무엇인지, 나아가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해주는 것 같아요."

한 회원은 이렇게 덧붙였다. "수년 전 할미꽃 한 송이가 5000원쯤 한 적이 있었어요. 할미꽃이 돈이 된다고 하니 무덤 위의 모든 할미꽃이 일순간 사라져 버리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지요. 지금은 할미꽃이 많아요. 할미꽃을 화분에 옮겨놓아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나아가 산에 피는 야생화는 아파트 화분 속에 오면 금방 죽는다는 사실도 알았어요."

인터넷 야생화 사진 동호회 '꽃과 사람' 이야기를 더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hung.kookje.co.kr/471


경주 토함산 시부걸계곡 초입에서 봄바람에 하늘거리며 첫인사를 하는 노란 꽃다지 군락지에서 '꽃과 사람' 회원들이 잠시 포즈를 취했다.

앵초군락지에서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는 '꽃과 사람' 회원들.

찬바람이 휘몰아치던 지난 2월 초 부산시립미술관에는 작은 아우성이 일었다. 평소 한산하던 평일임에도 관람객들이 삼삼오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진원지는 알고 보니 듣도 보도 못한 조그만 동호회의 야생화 사진전이었다. 같은 시기 이곳에는 물방울 화가 '김창렬 특별전'과 소나무 사진으로 유명한 '배병우 특별전', '신옥진 기증 작품전'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분명 작은 반란이었다.

 문외한들에게는 하고많은 사진전 중의 하나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그 전시회는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제법 의미 있는 행사였다. 지난 2006년 부산을 근거지로 의기투합해 문을 연 '꽃과 사람'(flowersaram.com)이라는 인터넷 야생화 동호인들이 바로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울 중심의 야생화 동호회인 '인디카' '야생화클럽' '야사모' 등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정기 출사'나 '번개 출사' 등이 수도권 중심으로 이뤄져 활동에 한계가 있었다. 사실상 '들러리'였다.

온라인상으로만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그들은 주체적인 활동을 원했다. 영남지역을 모태로 한 야생화 동호회를 갈구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이심전심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그들은 자체 모임을 갖고 야생화에 목마른 마니아들을 규합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홈페이지도 만들고 정기 및 번개 출사도 자주 떠났다. 카메라에 담아온 야생화는 즉시 홈페이지에 올렸다. 자료가 점점 쌓이면서 회원과 홈페이지 방문객도 늘기 시작했다.   

'꽃과 사람'의 현재 회원은 411명. 부산을 비롯해 경북 경주 포항, 경남 마산 창원 김해 양산 등 영남지역의 회원들이 주류를 이룬다. 산꾼에서 야생화꾼으로 전향한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40년 산꾼으로 살다 최근 야생화에 흠뻑 빠진 60대의 한 회원은 "오랜 기간 등산을 하며 무심코 지나쳤던 조그만 야생화가 큰 행복감을 안겨줄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아 천만다행"이라며 "야생화는 한마디로 미지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고 소개했다.

야생화에 대한 그들의 예찬은 계속 이어졌다.

"꽃 이름과 생태 그리고 꽃과 관련된 사연을 하나씩 알게 될수록 경이로움이 아주 커지지요. 미지의 야생화를 카메라에 담아 집에 와서 하나씩 살피며 대화를 나누다 보면 당시 숲 속의 향기와 분위기를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어요. 가장 잘된 야생화 사진을 액자에 담아 거실에 걸어두는 그 기분을 누가 알까요."

'꽃과 사람' 김병권 회장은 "자연의 본성을 닮은 하나의 소우주인 야생화를 찾아 나서는 작업은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생태프로그램과 맥을 같이하고 있어 자연 보호와 함께 인간 본연의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야생화의 즐거움과 신비로움을 만끽해보기 위해 '꽃과 사람'의 번개 출사에 따라붙었다. 모처럼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한가로운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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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붓꽃.


분꽃나무.

앵초.



아래 사진은 지난 2월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제1회 '꽃과 사람' 전시회 모습입니다.




'꽃과 사람' 두 번째 이야기를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hung.kookje.co.kr/472








 

부산대 인근 명화 많은 레스토랑으로 유명
얇은 도우 심플한 토핑 기존 피자와 달라
매달 와인스터디 열어 와인 저변화 기여

썬즈갤러리 이성희(맨 왼쪽) 대표와 직원들. 명화 갤러리답게 벽에는 온통 그림이 걸려 있다.
  
명화와 클래식 선율, 와인과 근사한 이탈리안 음식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부산대 인근에 숨어 있었다. '썬즈갤러리'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포근하고 아늑하다. 테이블은 8개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가 은은히 들리는 가운데 양쪽 벽에는 10여 점의 명화가 전시돼 있다. 파스텔풍의 샤걀과 강렬한 색감의 마티스 그림이 눈길을 끈다. 거꾸로 매달려 조명에 반짝이는 와인 잔의 모습도 이색적이다. 싸고 양 많은 부산대 인근의 식당 콘셉트에 맞지 않다.

'썬즈갤러리'는 몇 차례 진화를 거듭했다.

이성희(39) 대표는 오래전부터 유럽 배낭여행을 다니며 모은 명화를 많은 사람과 공유하기 위해 2004년 문을 열었다. 그땐 차와 케이크로 시작했다. 이듬해부터 와인에 흠뻑 빠졌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유명 와이너리를 부지런히 발로 뛴 결과 와인 전문가가 됐다. 이후 와인을 널리 그리고 제대로 알리기 위해 한 달에 한두 번 와인스터디를 열고 있다. 초급·중급·고급자 과정으로, 식사를 함께 하며 와인과 관련해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배운다. 그런데 이 집의 와인은 무척 싸다. 통상 와인레스토랑은 와인숍 가격의 2~3배지만 이곳은 와인숍 가격에 1만 원만 더 받는다.

와인을 본격 취급하면서 와인과 어울리는 요리뿐 아니라 파스타 피자 그리고 코스 요리에도 신경을 썼다. 실력 있는 셰프를 스카우트하고 유럽 여행 때 경험한 현지 맛을 떠올리며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지난해부터 제 궤도에 올랐다고 이 대표는 자부했다. 덕분에 단골들도 꽤 늘었다. 단골들이 "이제 다른 집에서는 못 먹겠다"고 말할 땐 보람도 느낀다고 했다.   
  
메뉴판을 열었다. 피자는 네 가지가 전부였다. 모두 손수 반죽해 만든 얇은 도우를 이용한 토핑이 심플한 이탈리안 피자다. 기존 피자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이다.

이탈리안 야채를 토핑한 루꼴라, 고르곤졸라치즈를 9시간 졸여 피자 조각을 돌돌 말아 꿀을 찍어 먹는 고르곤졸라(아래 사진), 네 가지 치즈를 토핑한 꽈뜨로 뽀르마지오(이상 각각 1만5000원), 생모차렐라 치즈와 생토마토를 토핑한 마르게리타(2만 원)가 그것. 마르게리타의 경우 토핑되는 치즈가격만 1만 원일 정도로 재료값을 아끼지 않는다.

고르곤졸라피자는 꿀을 찍어 먹는다. 아래와 같이 돌돌 말아서.



파스타는 종류가 10가지. 잘 나가는 '빅3'를 꼽아 달랬다. 시푸드 느낌이 나는 비앙코 파스타(1만5000원), 해물과 야채를 굴소스에 곁들여 자체 개발한 퓨전 스타일인 상하이 파스타(1만4000원), 해산물의 신선함과 생크림의 고소함이 절묘한 화이트크림 파스타(1만3000원)가 인기 메뉴라고 했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 이 대표는 코스 요리를 권했다. 썬즈 코스 4만 원, 문즈 코스 5만 원(아래 사진)이다. 각각 기장군 철마에서 순수 구입한 최고급 한우로 만든 안심스테이크를 포함한 4~6가지 요리가 나온다. 가지에 싼 구운 관자살, 블랙트러플(송로버섯)을 얹은 감자스프, 샐러드,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알리오올리오(마늘파스타), 미디엄레어로 육즙의 진수를 보여주는 안심스테이크는 격조 있는 식사의 진수를 보여준다. 와인이 곁들여지면 금상첨화. 디저트로 뜨거운 초콜렛을 품은 폰당에 이은 에스프레소까지 음미하면 오랫동안 여운으로 남을 식사가 완성된다.

그릴에 구운 가지에 싼 관자살.
블랙트러플(송로버섯)을 얹은 감자스프.
버섯을 곁들여 발사믹소스를 얹인 샐러드.
알리오올리오(마늘파스타). 씹히는 맛이 있고 아주 고소하다.
안심스테이크.
다른 각도에서 본 안심스테이크.
디저트. 뜨거운 초콜렛을 품은 폰당.
에스프레소. 폰당의 단맛을 중화시켜준다.

파스타와 음료(1만3000원), 피자 파스타 디저트 음료(3만 원)의 점심세트와 피자 파스타 디저트 와인(4만3000원) 파스타 디저트 와인(4만2000원) 세트도 준비돼 있다. (051)515-6630

-싱글로 가는 길 고수에게 배운다
<1> 최칠관 전 부산골프협회 회장


올해 일흔둘, 여전히 70대 후반 싱글 유지
부산CC 챔피언전 땐 4R 합계 2오버파 기록
나이 들면서 유틸리티와 롱퍼터로 바꿔 라운드

 
'1, 2년 정도라면 아직 희망이 있고 3년 즈음이면 좀 그렇고, 5년 이상이라면 희망이 별로 없다'. 주말골퍼들이 '싱글'이 될 수 있는 확률상의 구력이다. 바다 건너 미국 얘기라 참고로만 하자. 골프채를 한 번이라도 잡아본 사람이라면 '골프에는 신화가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만큼 어렵다. 오죽했으면 못 치는 핑계가 100개가 넘는다고 할까. 주말골퍼의 꿈은 예외 없이 싱글. 프로에 가까운 싱글, 즉 핸디캡 1~3 정도는 어렵겠지만 핸디캡 6~9 정도는 노력만 하면 이룰 수 있다고들 한다. 고수들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단기간의 집중연마가 효과적이라고 한다. 주말마다 연습장이나 필드에 나가서는 '하세월'이라는 것이다. 강호의 고수들을 찾아 싱글로 가는 지름길을 물어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남녀노소 구분없이 타칭 고수라면 먼 길도 마다치 않을 작정이다.


클럽 챔피언 출신이라면 프로 선수 못지않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스윙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그는 달랐다.

첫 홀 티잉그라운드에서 그의 드라이스샷 모습은 여느 연습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소 구부정한 폼이었기 때문이었다.(아래 사진) 하지만 두세 홀을 더 돌면서 유심히 보니 스윙의 전체적인 템포나 리듬감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드라이브 비거리는 200~210m 정도.



싱글을 꿈꾸는 주말골퍼들에게 스코어를 줄일 수 있는 조그만 팁이라도 전해야 하는 입장에서 첫 취재원으로 잘못 택했다는 생각도 내심 들었다.

그의 이름은 최칠관. 올해 나이 일흔둘. 그는 현재 (주)고성노벨화약과 오는 24일 개장하는 고성 노벨CC 회장이자 현재 부산상의 부회장이다. 골프 관련 이력은 더 화려하다. 잠시 소개하면 이렇다.

그는 지난 1970~1980년대 중반까지 부산 아마추어 골프계를 주름잡았던 대표적 골퍼였다. 지난 1995~1996년 부산골프협회 회장도 역임한 그는 아마추어 골퍼라면 한 번쯤 꿈꾸어봄 직한 클럽 챔피언에 무려 8번(부산CC 6회, 동래CC 1회, 경주신라(옛 조선)CC 1회)이나 올랐다. 특히 1984년 부산CC 챔피언 땐 전무후무한 기록인 4R 합계 290타(+2)타를 기록했다.

1987년에는 전국체전에서 처음으로 채택된 골프 종목 부산 대표로 출전해 5위에 올랐고, 앞서 1980년엔 남서울CC에서 그해 프로 및 아마추어 챔피언 12명이 겨루는 프로암 대회에서 당대 내로라하는 김승학 김석종 프로를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다.

전성기 때 그의 드라이브 비거리는 초창기 감나무를 깎아 만든 퍼시몬채로 240~250m 정도. 지금의 첨단 소재 드라이브가 20m 더 나간다고 볼 때 프로에 버금가는 장타자였다. 1970년대 중반 일본서 우승도 한 한장상 프로가 동계훈련을 위해 부산을 찾으면 최 회장에게 핸디 두 개만 주고 라운드를 할 정도였다. 당시 한 프로 밑의 연습생이었던 구옥희 임진한 프로도 최 회장에게 배웠다. 이쯤 되면 부산의 골퍼 1세대로, 한 시대를 풍미한 아마추어 최강 골퍼라 해도 입을 댈 사람이 없지 않겠는가.

 세월에 장사없다고 했던가. 허리와 목 디스크 후유증으로 그의 드라이브 스윙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70대 후반의 스코어를 내는 싱글이다. 비결을 물었다. "골프는 우리 몸의 거의 모든 부분을 사용하는 운동이야. 백스윙, 다운스윙은 물론이고 강한 임팩트를 줄 때 우리 몸의 상·하체가 유기적으로 움직여야 좋은 샷이 나오지. 그러니까 스윙은 현재 자신의 몸상태에 맞게 해야 돼. 시합 때도 그날 컨디션에 맞는 스윙을 해야 하고, 평소 컨디션이 좋을 때와 안 좋을 때의 스윙을 준비해 놓아야 돼. 이 늙은이는 이제 몸의 회전이 잘 안 돼 어쩔 수 없이 내 몸에 맞는 스윙을 스스로 찾은 거야." 나이 들어 타이거 우즈의 스윙을 교과서로 혼자 냅다 갈기는 연습에서 벗어나 한 번쯤 프로나 고수에게 자신의 몸상태에 맞는 자신의 스윙을 점검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그립도 나이가 들면 바꿀 것을 권했다. 그는 50대 중반까진 장타를 날리기 위해 스토롱 그립을 잡았지만 지금은 몸이 따라주지 못해 약간 완화된 스트롱 그립으로 느슨하게 잡고 있었다. 미세한 변화지만 'in-out 스윙'이 쉽게 된다고 했다.

평소 몸관리는. "나이가 들면 파워보단 유연성이 중요해. 젊었을 땐 매일 아침 등산도 했지만 지금은 방안에서 앉았다 일어섰다를 100번하고 가벼운 아령을 들고 있어. 그 정도야. 최소한의 유지인 셈이지." 70대 싱글 유지의 한 단면이었다.

그의 싱글 비법은 세컨샷부터 있었다. 바로 유틸리티우드였다. 힘이 있으면 롱아이언은 훌륭한 무기가 되지만 힘이 달리면 유틸리티로 바꿔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순간 인터넷에서 타이거 우즈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30대인 나는 아직 3번 아이언을 칠 수 있는 체력이 있다. 하지만 40세가 되면 4번 아이언을 빼고 7번 우드를, 50세가 되면 5번 아이언 대신 9번 우드를 추가하겠다."

실제로 그의 골프백에는 1, 3, 5, 7, 9번 우드와 6~9번 아이언 그리고 웨지 3개(S, A, P)가 들어 있었다. 5번 아이언을 대체할 9번 우드는 2년 전 구입했다. 그만큼 체력관리를 잘 했다는 방증이다. 4번 아이언으로 골치를 앓고 있는 주말골퍼에겐 고려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최 회장은 "유틸리티는 힘을 크게 들이지 않고 설렁설렁 쓸어쳐도 거리가 나고 미스샷을 해도 표가 크게 나지 않는다"며 "힘과 유연성이 떨어지면 롱아이언을 고집하지 말고 유틸리티로 바꾸라고 말했다.
  
퍼터에도 변화가 있었다.


롱퍼터인 벨리(belly)퍼터(옆 사진)였다. 퍼터의 끝부분을 배꼽 쪽에 고정시키기 때문에 배꼽퍼터라고 불린다.

사실 골퍼에게 퍼터 교체는 큰 모험이다. "젊었을 때부터 술을 많이 마셔 이젠 떨려 몸의 고정이 잘 되지 않아. 일종의 입스 현상이지. 그러니 차선의 선택이었을 수밖에."

벨리퍼터(42인치)는 스윙할 때 일반 퍼터(34인치)보다 손목의 움직임을 제한하기 때문에 퍼터 하기기 편하고 스윙 궤적을 정확히 만들어줘 임팩트 순간 헤드가 비틀어지는 확률이 적어 볼이 똑바로 굴러간다. 나이 들어 퍼터를 바꾼 예는 미PGA에서도 흔히 있다. 1996년 상금왕 탐 레이먼이 2002년부터 벨리퍼터를 사용했고, 비제이 싱은 2002년 마스터즈에서 벨리퍼터로 우승했다. 미국 골프잡지에선 벨리퍼터들의 퍼터 성공률이 일반 퍼터의 그것에 비해 더 높다는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골프 인생 40년을 뒤돌아볼 때 골프는 서드샷부터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아무리 장타를 날려도 그 홀 스코어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서드샷을 붙이거나 넣으면 반드시 1~2타가 줄기 때문이다. "파4홀에서 티샷과 세컨샷은 머리 쓸 일이 없잖아. 그저 있는 힘과 기술을 발휘하면 되지. 하나, 서드샷부턴 조절의 개념, 즉 힘을 전부 발휘하는 것보다 힘을 죽이며 조절하는 것이 더 어려워. 어프로치나 퍼트가 그렇잖아."

벨리퍼터를 쓰는 그는 피칭도 웬만하면 낮게 굴리는 런닝 어프로치를 즐겨한다고 했다. 실제로 최 회장은 파4홀의 경우 2온은 무리였지만 대부분 세컨샷을 그린 근처에 붙인 후 정확한 칩샷으로 핀 근처에 3온 시킨 후 1펏으로 홀아웃했다. 대부분 3온 1펏 작전이었다.

한때 드라이브샷을 250~260m 날리며 지역 아마 골프계를 호령했던 최 회장은 이제 유틸리티와 벨리퍼터 그리고 정교한 어프로치샷으로 여전히 싱글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파이어볼러 박찬호가 팔색팔조의 변화구 투수로 변화했듯이.

부산의 맛 - 구포국수

-후루루룩~ 총총 썬 '땡초'의 마력은 덤
- 잔치·서민음식 대명사
- 일제 강점기부터 구포역 곡물하치장 덕 제분·제면업 발달
- 가내공장 30곳 성황…옥상·마당 곳곳 면 말리는 진풍경도
- 현재 구포엔 가내공장 1곳 뿐
- 진한 멸치육수에 말아 단무지채 부추 고명 올려

 국수는 서민의 음식이다. 장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마솥에서 퍼올린 육수에 만 국수 한 그릇이면 시름도 잠시 잊는다. 또 잔치음식을 대변한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에게 "언제 국수 먹여줄래"라고 묻는 것은 국수가 바로 잔치음식의 대명사로 굳어졌음을 의미한다.

불가에서는 국수를 승소(僧笑)라 부른다. 스님들의 미소라는 의미로, 늘 밥만 먹는 스님들의 유일한 별미가 바로 국수였기 때문에 국수 생각만 하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해서 붙여진 애칭이다.

그러고 보니 국수는 오랫동안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먹을거리였다. 해서, 지방마다 향토색 짙은 국수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정선 콧등치기국수, 제주 고기국수, 담양 선지국수 등등. 하나같이 우리네 삶과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

부산에는 구포국수가 있다. 타 지역의 여느 국수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지명도는 꽤 높은 편이다. 6·25한국전쟁 기간 푸짐한 양과 쫄깃한 면발로 많은 피란민의 배고픔을 달래줘 깊은 인상을 심어준 때문이다. 구포국수는 이런 시대적 상황에 힘입어 지난 1980년대까지 부산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매김했지만 1990년대부터 식문화의 급격한 변화와 대기업의 진출로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부산시 홈페이지의 '부산의 별미' 코너에도 이제 구포국수라는 음식은 찾아볼 수 없다.

관의 지원도 끊겨…명맥만 겨우 유지

 왜 구포국수인가.

일제 강점기 때부터 구포역 인근엔 곡물하치장이 있어 제분업과 제면업이 발달했다. 남선곡산과 영남제분이 대표적 공장. 구포 일대는 또 낙동강 하류의 염분 섞인 바다 바람이 연신 불어대 국수를 자연 건조시키기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구포장을 끼고 원료 구입의 용이함과 자연 조건 등을 두루 갖춘 이곳은 국수공장이 들어서기에 안성맞춤이었던 셈. 자연스럽게 가내 국수공장이 한 두 곳 들어섰고, 이러한 공장이 차츰 잘 되니까 여러 집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이름은 자연스럽게 지명 이름을 따 구포국수로 명명됐다.

구포에서 국수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40년대 초반. 구포시장에서 '이가네 구포국수'를 운영하는 이원화(49) 대표는 "선친으로부터 구포국수 공장이 처음 만들어진 시점은 대략 1940년대 초반이었으며, 우리 집은 1945년 국수공장을 처음 시작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구포에서 국수공장이 가장 많았을 때가 1960~70년대로 아마 30여 곳은 됐을 것"이라며 "당시에는 대부분 가내공장이어서 옥상이나 마당에서 국수를 말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구포국수 공장은 이후 1980년대 들어 기울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부터 고임금과 대기업의 진출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부산 북구 구포 일대의 구포국수공장은 구포연합식품 단 하나뿐. 하지만 구포국수라는 이름으로 국수를 만드는 공장은 경남 김해 등 부산 외곽에 몇 곳 더 있다. 김해에서 구포국수를 만드는 업자들은 오래 전 구포에서 국수를 만든 사람이라 제품에선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구포국수라는 명칭과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 지난 1988년 모 국수공장이 상표등록을 해 다른 업자들이 명칭 사용을 못하게 되자 소송을 걸었다. 결국 재판부는 '구포국수는 구포의 명물로 역사성이 있는 명칭이므로 단독 소유할 수 없다'고 판시해 구포국수는 만인의 상표가 돼버렸다.

부산 동래구청이 동래파전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애쓰듯 북구청도 구포국수와 관련, 관심을 보이고 있을까. 지금으로선 아쉽게도 없다.

북구청은 1998년 구포국수축제추진위원회를 구성, 제1회 구포국수 축제를 연다고 널리 알렸지만 결국 예산 문제로 무산된 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북구청 관계자는 "구포국수는 이제 지명만 구포가 들어갈 뿐 실제론 북구만의 특화된 상품이 아니라 부산 전역에 널리 분포돼 있는 데다 예산마저 부족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쫀득쫀득 씹히는 면발과 진한 육수의 그맛

부산엔 구포국수집이 제법 있지만 구포국수를 제대로 하는 집은 몇 집 안 된다.

남산동 구포촌국수. 육수는 직접 부어 먹는다.

현재 금정구 남산동 외대운동장 입구 맞은편 '구포촌국수'가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집이다. 그래서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다. 구포촌국수(051-515-1751)의 김향이(47) 대표는 "김해 '대동할매국수'를 하는 그 할매와 비슷한 시기에 인근에서 30년 동안 구포국수를 삶은 할매가 저의 친할머니"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국수는 김해 주촌의 한 구포국수 공장에서 특별 주문한 것만 사용한다. 좋은 밀가루를 사용해 가격은 일반 제품의 배. 멸치는 보름에만 잡혀 특히 맛있다는 오사리멸치만 쓴다.

육수에는 비법이 있었다. 그냥 멸치를 넣는 게 아니라 건강이 안 좋은 할머니가 집에서 버섯 다시마 양파 대파 등을 말려 손수 빻아 만든 가루를 섞는다. 그것도 비율이 정해져 있단다. 30년 노하우가 숨은 최고급 육수에 최고급 구포국수가 만났으니 맛이 좋지 않으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정도다.

자연히 단골이 늘 수밖에. 한달이면 25번쯤 찾는다는 박경득(52·현대자동차 금정지점) 씨는 "면도 쫄깃해 좋지만 이 집 육수는 해장용으로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전날 과음했을 경우 그는 출근 후 기본적인 업무를 마치면 반드시 이 집을 찾는다. "문을 여는 오전 10시 전에 와서 기다리다 주인이 출근하면 대신 셔트문을 올리고 들어가 땡초를 넣은 구포국수 한 그릇을 해치워야 하루 일이 손에 잡히죠."   

몸속에 육수의 피가 흐르는 현대자동차 박경득(왼쪽) 씨와 부산대 황진연 교수.
 
역시 한달이면 20일쯤 이 집 국수를 먹는다는 부산대 지구환경과학부 황진연(58) 교수는 이 집의 국수 감별사. 다른 국수업체에서 맛보라며 샘플로 갖다준 국수의 경우 김 대표는 가장 먼저 황 교수에게 삶아 대접한다. 황 교수는 "제법 이름 있는 국수를 맛봤지만 구포국수만큼 탱탱하면서도 쫄깃한 국수는 없다"고 말했다.

육수의 피가 흐르는 이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속이 풀리는 진한 육수에 고명으로 단무지채 부추 김가루 깨소금이 들어가는 구포국수야말로 소박하면서도 진솔한 음식"이라고 말했다.

맨 오른쪽이 보통 그릇이며, 가운데가 2배인 곱배기, 맨 왼쪽이 4배에 해당되는 왕곱배기 그릇이다. 이 집은 왕곱배기를 4그릇이나 먹은, 그러니까 보통 국수 28그릇을 먹은 사람이 최고로 많이 먹은 사람이다. 새 기록이 나올 때까지 신기록 보유자는 공짜다.

줄 서 기다릴 때의 번호표.

구포국수.


'이가네 구포국수' 이원화 대표

- "국수공장집 아들이어서 반죽 절단 등 면 만들기가 어린 시절의 일상이었죠"

 "구포국수를 직접 만들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구포국수 식당을 하는 경우는 부산에 아마 저밖에 없을 겁니다." 부산 북구 구포1동 구포시장에서 '이가네 구포국수'를 운영하는 이원화(49) 대표는 '구포국수의 적자'라 할 수 있다.

이가네 구포국수 대표 이원화 씨.


이 대표의 선친은 지금의 가게에서 여섯 블록 떨어진 현 신용협동조합 맞은편 지점에서 1945~79년 34년간 구포국수 공장을 운영했다. 그 모습은 가게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고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저희 집을 포함해 7개의 국수공장이 함께 있었지요. 살림집과 함께 있는 가내공장 수준이었지요. 조금 큰 곳은 옥상에 건조대를, 저희 집은 마당 한쪽에 나무로 만든 건조대를 둬 국수를 말렸어요."

이가네구포국수.

육수. 땡초를 넣어야 맛있다.


사진을 자세히 보니 이 대표가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건조대 앞에서 활짝 웃는 모습이 확인된다. 자전거를 탄 사진 앞에서 이 대표는 한마디 툭 던진다. "저 자전거를 타고 추운 겨울 서남다리까지 구포국수 배달을 다녀왔어요. 어찌나 춥던지."

옛날 구포 일대 사진들.

이원화 씨의 옛날 사진.


이 대표는 초등학교 땐 건조대에서 떨어진 한 두 가닥의 국수 줍는 일을 했고, 중학교 땐 포장과 배달을, 고등학교 땐 수업을 마치면 곧바로 집으로 와 반죽과 절단 작업을 했다고 한다.

당시 국수는 여러 단계를 거쳐 만들어졌다. 밀가루에 굵은 소금 녹인 물을 섞어 반죽통에 넣은 후 수 차례의 롤러작업을 해 자르면 국수가 되고 이를 햇빛에 3~4일 완전히 말려야 상품으로 완성됐다.

"흔히 낙동강의 염분 섞인 바람이 맛을 낸다고 하죠. 하지만 이곳은 엄마산(이 대표는 어릴 때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지금의 백양산 줄기를 의미)이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줘 오랫동안 그 바람을 머물게 했기 때문에 더욱더 짭조름한 맛이 났죠."

이곳의 면발은 뜨거운 육수 속에서 살아 있었다. 남해산 멸치 등 15가지를 넣어 만든 육수는 약간 순하고 시원했다. 다른 집처럼 오래 끓이지 않는다. 그게 노하우라고 했다. 이 대표는 "이 맛이 오래 전 구포장터에서 먹던 그 맛"이라 강조했다. 국수는 이 대표가 일러준 당시의 레시피로 김해 주촌의 한 공장에서 주문생산 방식으로 뽑은 면이다.

그는 "무형의 자산과 가업을 잇는 자부심을 갖고 구포국수를 널리 알리는데 여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051)333-9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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