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하회·양동마을 가볼까

-마을 전체가 살아있는 문화재
-유유자적 거니니 선비가 따로 없네

-아는 만큼 보이는 '살아있는 문화유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1999년 4월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가장 한국적인 곳을 보고 싶다는 여왕의 요청에 의해 이뤄졌다. 여왕은 서애 류성룡의 13대손인 한류스타 류시원의 안동 하회마을 집 담연재에서 하회별신굿 탈놀이를 관람한 후 47가지의 궁중음식으로 장만된 73번째 생일상(아래 사진)을 받았다.

류시원의 안동 집 담연재에서 73번째 생일상을 받고 있다. 하회마을 입구 엘리자베스 여왕 방문 기념관에 있는 사진을 찍은 것이다. 맨 우측이 류시원인 것 같다. 근데 지금 류시원은 39세란다. 깜짝 놀랐다.

하회별신굿 관람 때 흥에 겨운 여왕의 발장단 맞추는 장면이 영국 BBC 카메라에 포착돼 전 세계에 방영됐다. 여왕은 류성룡의 종택 충효당에서 김치와 고추장 담그는 모습을 관심 있게 지켜본 후 안방으로 신을 벗고 들어섰다. 처음에는 신을 신고 마루에 올라섰다 누군가의 귀띔으로 신발을 벗었다고 한다. 여왕이 한국의 관습에 따른 것이다. 영국 왕실에서는 맨발을 보이는 게 금기시돼 있어 공개석상에서 드러난 여왕의 첫 맨발은 앞서 장단 맞추던 신발 속의 발과 함께 대비되며 또다시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덩달아 하회마을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이후 2005년 아버지 부시, 지난해에는 아들 부시 전 미국 대통령도 각각 이곳을 찾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일정상 여유가 있었다면 그 다음 방문지는 경북 경주 양동마을이었을 터. 양동마을도 하회마을 못지않게 한국의 전통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적 관람객이 경1000만 명을 넘어섰고, 입장료 주차비를 받아 이미 관광지화 돼 버린 하회마을보다 상대적으로 더 한적한 양동마을이 더 한국적이다." 양동마을도 수년 전부터 일본은 물론 중국 캐나다 등 여러 나라 방송에서 영상 취재를 올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한국의 역사인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난 8월 1일 이 두 마을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양동마을은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수백 년 전부터 모여 사는 일종의 씨족마을. 각 성씨를 대표하는 서애 류성룡, 우재 손중돈, 회재 이언적 선생을 봉향하는 병산서원, 동강서원, 옥산서원(독락당 포함)도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항공사진으로 본 하회마을. 사진 중앙 가운데 약간 위 절벽이 부용대이며, 역S자 상단 뒷산 너머에 병산서원이 있다. 사진제공=문화재청

하늘에서 본 양동마을. 맨 우측 가운데 빨간색이 보이는 지점이 마을 입구이다. 마을 뒤 댐은 안계댐.
다른 각도에서 본 양동마을 항공사진사진. 우측 상단 쪽이 마을 입구. 사진제공=경주시

민족 최대의 명절인 한가위가 다가왔다. 올해는 사실상 17일 오후부터 연휴가 시작돼 길게는 9일까지 쉴 수 있다. 꿀맛 같은 여름 휴가를 한 번 더 보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차례와 성묘를 다녀온 후 '길고 긴' 이번 한가위 연휴에는 가족이나 친구들, 아니면 연인과 함께 유네스코가 인정한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을 다녀오는 것이 어떨까.

"한옥만 많이 있다고 해서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아닐 겁니다. 그 안에 사람이 살고, 전통 관습이 살아 있고, 올곧은 유교 정신이 지금까지 꽃을 피우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이지휴(62) 경주 양동마을 문화유산해설사의 이 말 속에는 전통마을을 찾아 무엇을 느끼고 배워야 하는지가 잘 함축돼 있다. 그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계문화유산이 일등 관광지로 가는 첩경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며 "이는 지금껏 지켜온 전통을 그대로 유지해 달라는 전 세계인의 공식적 부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후 주변에 흉물스러운 다리가 건설되면서 5년 만인 지난해 세계문화유산 목록에서 삭재된 독일 엘베계곡의 교훈이 떠오른다.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후속편(유유자적 거니니 선비가 따로 없네)을 보시려면 여기(http://hung.kookje.co.kr/501)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수영구 남천동 일본우동 전문점
                    다케다야(武田家)

 우동은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지만 실은 일본 말이자 일본 국수의 이름이다. 그럼 일본 우동의 본산은 어딜까. 시코쿠섬 가가와현이다. 43개 현 중에서 인구가 100만 명으로, 돗토리현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시골'이다.

 우동의 유래는 이렇단다. 804년 헤이안시대 당으로 유학간 홍법 대사가 우동 만드는 법을 배워 고향인 사누키에 전했다는 것이다. 당의 수도 장안(현 시안(西安))은 광대한 밀 경작지대로, 면요리가 특히 발달해 현지인의 도움 없이는 주문조차하지 못할 정도로 면 종류가 다양하다.

겉은 부드러우면서도 촉촉, 속속 쫄깃
반죽 기포 없애기 위해 발로 밟아 '족타면'
냉우동인 붓가께우동, 사누키우동의 진수

냉우동류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붓가께우동 정식. 우선 일종의 간장소스인 쯔유를 붓고...
후루룩 드셔보세요. 한국에서 좀처럼 맛볼 수 없는 우동맛의 블루오션이죠.

 사누키는 가가와현의 옛 이름으로, 일본에선 우동의 본산으로 통한다. 시안처럼 기후가 따뜻해 좋은 밀이 생산되는 데다 국물맛을 내는 데 필수적인 멸치 다랑어 다시마 등이 풍부한 세토내해를 품고 있어 우동 탄생의 모든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가가와현 사람들은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간식 모두 우동을 먹는다. 재밌는 점은 지금도 가가와의 우동을 먹기 위해 열도 전역에서 순례를 올 정도다.

 이런 사누키우동을 맛볼 수 있는 곳이 최근 부산에도 생겼다. 광안리해변과 수영구청 사이, 파파이스 맞은편에 위치한 '다케다야'(武田家·051-611-5711). 민현택(42) 대표가 가가와현 간장우동의 원조집인 '오가타'에서 3년간 허드렛일부터 반죽, 우동 제조에 이르기까지 도제식으로 배워 문을 열었다.

'오가타'의 사장부부와 함꺼한 민현택 대표.

'오가타'는 일본 간장우동의 원조집이다.


 민 대표는 "사누키우동의 매력은 쫄깃하고 차진 면발에 있다"고 정의했다. 그는 "밀가루 소금 그리고 물만으로 반죽한 후 발로 밟아(아래 사진) 숙성시켜야 기포가 없어지고 반죽의 탄력이 최고조에 달해 면이 쫄깃해지며, 이때 밀가루 속의 단백질 성분인 글루텐이 많이 생겨난다"고 덧붙였다. 수타면이 아니라 족타면인 셈이다. 면은 지금까지 국내외를 통틀어 본 면 중 가장 굵다. 촉감은 입술을 미끄러져 내려갈 정도로 굉장히 부드럽고 촉촉하지만 속은 씹히는 맛이 아주 많이 느껴질 정도로 탱탱하다. 한마디로 입술과 혀를 '희롱한다'.








     발로 밟아줘야 반죽에 기포가 없어져 면발이 더욱 쫄깃해진단다. 수타면이 아니라 족타면이다.
     민현택 대표.

메뉴판에는 크게 온우동류와 냉우동류로 분류돼 있다. 민 대표는 "한국사람들은 흔히 가께우동 등 온우동류를 선호하지만 가가와현 현지에선 8대 2 정도로 냉우동류가 인기"라고 말했다.

 냉우동류에선 일본인들이 가장 즐기는 것으로, 사누키우동의 진수인 붓가께우동(6000원)을 권하고 싶다. 냉우동을 먹어야 면발의 진면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멸치 다시마 가쓰오부시 표고버섯으로 만든 원국물에 맛의 비결인 간장을 섞어 만든 쯔유(일종의 간장소스)를 부어 먹는다.

민 대표는 "가게를 열기 전 지인들에게 가가와 현지의 붓가께우동을 그대로 시식시켜본 결과 쯔유의 맛과 향이 너무 강하다는 평을 받아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조절했으며, 손님이 원할 경우 현지의 맛을 그대로 내놓는다"고 말했다. 쯔유는 우리네 모밀국수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깊은 맛과 향취가 묻어난다.

 모밀국수처럼 대나무발에 올려져 나오는 자루우동(6000원)은 붓가께우동에 나오는 쯔유에 쫄깃한 면을 모밀국수처럼 적셔 먹으며, 새우 등 각종 튀김이 곁들여지는 냉덴뿌라우동(8000원)은 쯔유에 비벼먹는 것이 차이점이다.
모밀국수와 모양이 비슷하게 나오는 자루우동.

 온우동류의 가께우동(6000원)은 흔히 우리가 아는 우동과 비슷하며, 가마아게우동(6000원)은 갓 삶은 뜨거운 면을 바로 꺼내 간장소스에 찍어먹는 일본가정식 우동이다. 일본 현지에서 공수해 온 전통 유부 맛을 느낄 수 있는 유부우동(6000원)도 맛있다.

가께우동 정식.

정식의 밥은 장어덮밥이다.

가께우동.


유부우동

냉덴뿌라우동


 우동에는 일본식 주먹밥인 조그만 오니기리가 함께 나오며, 우동 정식(1만1000~1만3000원)을 주문하면 샐러드 유부초밥 튀김 등이 나와 푸짐하다.

 
싱글로 가는 길
          고수에게 배운다

-동래 베네스트 파3 골프장
                   이재희 프로

 기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국내 여자 프로골퍼들과 라운드를 한 '영광'을 누린 적이 있다. 제법 장타자로 알려진 그들과의 라운드를 앞두고 겉으론 애써 담담한 척 표정관리를 했지만 심장이 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1980년대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던 한국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월드컵에서 강호들과의 경기 전 주눅 들었던 그런 심정이었다면 적당한 비유가 될까.

 '창피는 당하지 말아야지'가 첫 목표였다. 덧붙이자면 '그간 갈고 닦았던 샷을 무심 타법으로 날리다 보면 어떻게든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으로 티잉그라운드에 올라섰다.

 근데 웬걸. 드라이버 샷과 세컨 샷에서 기자의 샷이 오히려 더 멀리 나가지 않는가. 시합 때와 달리 몸도 안 풀고 부담 없이 나와 그렇겠지 생각했지만 이후에도 거리 차가 크게 줄지 않았다. 몇몇 홀에선 볼이 페어웨이를 벗어나기도 했고, 그린 앞 벙커에도 이따금 볼을 빠뜨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리커버리 샷으로 파 세이브를 하지 않는가.

 스코어는 어땠을까. 프로는 70대 중반, 기자는 90대 초반. 여자 프로 선수와 주말골퍼와의 차이는 숏 게임 즉 어프로치와 퍼팅의 정확성에 있었다. 그 이면에 바로 15타가 숨어 있었던 셈이었다.

 결국 스코어를 줄이기 위해선 드라이버와 아이언 샷 대신 어프로치와 퍼팅에 용맹정진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팔로스로 크기와 타법에 따라 백스핀에 의한 런 차이나
퍼팅은 전체 스코어의 43% 차지…그린은 전체를 먼저 봐야
부산 유일 파3 동래베네스트 골프장 숏 게임 연습 천국

스코어 줄이는 데 숏 게임이 지름길

동래 베네스트 파3 골프장 이재희(35) 프로는 "스코어를 단기간에 줄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숏 게임이지만 주말골퍼들은 이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정규홀에서 자주 라운드하면 실력이 금방 늘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숏 게임만 할 수 있는 파3 골프장을 찾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동래 베네스트 파3 골프장의 3번 홀(85m).

 2007년 6월 문을 연 파3 골프장인 동래 베네스트는 웨지와 퍼터만 하프백에 넣고 카트 없이 쉬엄쉬엄 걸으며 숏 게임을 할 수 있다. 가장 긴 홀은 97m, 짧은 홀은 55m이며 오르막, 내리막 홀에 해저드와 벙커를 두루 갖춰 정규홀의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그린도 제법 까다로우며, 그린 주변에는 어김없이 러프와 함께 오르막, 내리막, 발끝 오르막, 발밑 내리막 어프로치 샷을 연습할 수 있게 설계돼 있다. 한마디로 숏 게임 연습의 천국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뒷조가 곧바로 따라오지 않을 경우 반복해 연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프로의 간략한 어프로치 강의가 시작된다. 주말골퍼들이 가장 간과하기 쉬운 것이라고 한다.

 그는 어프로치 샷을 배우기 앞서 대뜸 백스핀의 원리를 물었다. 이걸 먼저 알아야 된다는 것이었다. 속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자 그의 설명이 이어진다.

 "임팩트 때 클럽 페이스의 그루브와 볼 표면의 딤플이 마찰을 일으키며 볼이 뒤로 도는 소위 백스핀이 생기죠. 하지만 볼이 러프에 있으면 클럽과 볼 사이에 낀 잔디가 백스핀에 방해가 되겠죠. 이럴 경우 백스핀이 덜 먹어 그린에서 런이 많이 생기겠지요. 근데 아마추어들은 러프 때문에 볼이 앞으로 나가지 않을 것을 고려해 평소보다 더 세게 치는 우를 범하지요."

 그의 강의는 계속 이어진다. "러프에서의 어프로치 샷은 왼손 그립을 조금 더 단단히 잡고, 백스윙은 평소보다 약간 가파르게 하고, 다운스윙 땐 평상시보다 코킹을 약간 더 오래 유지하면서 볼을 쳐야 합니다. 물론 런이 더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해 거리는 자신의 스윙크기에 맞춰야 하겠죠. 참고로 러프에서의 아이언 샷도 유의해야 합니다. 러프에서는 클럽 헤드가 잔디에 감겨 빨리 닫혀 흔히 훅이 나지요. 거리 또한 감소하지요. 이럴 경우 거리 손실을 막기 위해 한 클럽 크게 잡고 페이스는 약간 오픈시켜 4분의 3 스윙을 해야 합니다."

정상적인 어프로치 샷은 백스윙과 팔로스로의 크기가 1대 1(위)이지만 런을 인위적으로 줄이기 위해선 임팩트 때 끊어쳐 백스핀을 늘이면서 동시에 팔로스로 땐 발목과 무릎 사이쯤에서 멈춰야 한다(아래).

 이 프로는 어프로치 샷을 할 때 런을 인위적으로 줄이는 법도 소개했다.
 "정상적인 어프로치 샷의 경우 백스윙과 팔로스로 크기는 1대 1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은 팔로스로를 발목과 무릎 사이쯤에서 멈춰야 합니다. 원리는 임팩트 때 끊어쳐 인위적으로 마찰력을 증가시켜 백스핀을 늘리는 것입니다. 이때 손목 코킹은 유지하면서 클럽 페이스를 약간 열고 '아웃인(out-in)' 궤도로 쳐야 효과가 있습니다." 이는 제법 고난도 기술이어서 상당한 연습이 필요하다고 전제했다.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어서 실전에서 사용할 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이 프로는 모든 샷이 그렇듯 원리를 알면 쉽게 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왼발 내리막 어프로치 샷의 경우, 흔히 무릎 허리 어깨를 경사면과 나란히 하고, 자세와 클럽 페이스를 열고, 클럽은 한 클럽 짧게 잡고 '아웃인' 궤도로 쳐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서 이 프로는 기자에게 열린 어드레스 자세를 취해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세를 오픈시키면 어깨도 자연스럽게 열리게 되며, 스윙궤도 또한 어깨라인을 따라 자연스럽게 '아웃인'으로 된다"며 "스윙궤도를 무작정 암기하려고 하지 말고 몸을 물 흐르듯 천천히 움직이면서 그 원리를 깨달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왼발 내리막 어프로치 샷 모습.

 그는 "어프로치 샷만 해도 경우의 수가 무진장 많다"며 "이런 경우를 대비하지 않고 그날그날 대충 치다 보면 구력에 비해 스코어는 결코 줄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퍼팅은 전체 스코어의 43% 차지

이 프로는 퍼팅의 중요성도 빠뜨리지 않았다. "퍼팅이 전체 스코어의 43%나 차지할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에 매일 집에서 연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퍼팅의 중요성도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말골퍼들은 퍼팅만 연습할 뿐 실전에서 그린 보는 법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흔히 초보 주말골퍼들은 홀과 볼 사이의 라인만 열심히 볼 뿐 그린 전체는 보지 않기 때문에 착시로 인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한다는 것. 그린으로 다가가면서 먼저 그린의 전체 경사를 먼저 살펴보는 것을 잊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와 함께 그린 바로 옆에 벙커가 있으면 그곳은 높고, 해저드가 있으면 낮다고 했다. 비가 온다고 가정할 때 설계자는 빗물이 벙커 쪽 대신 해저드로 흐르게 설계하기 때문이다.

 주변 지형도 살펴야 한다고. 주변이 확 트인, 바람이 잦은 곳에 그린이 있으면 이곳은 특히 잘 구른다. 바람이 그린의 수분을 빼앗아 딱딱해져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변이 꽉 막혀 있고 옆에 해저드가 있다면 그곳은 특히 구르지 않는다.

 이 프로는 이렇게 강의를 끝냈다. "파3 골프장을 찾는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입니다. 왕초보와 80대 초반 이상의 고수들(학생 선수 포함). 왕초보야 그렇다 치고 80대 초반들이 찾는 이유는 더 이상 스코어가 줄지 않는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숏 게임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꼭 와야 될 사람들은 왕초보와 80대 초반 그 중간의 골퍼들인데…."





 청마 유치환(1908~1967)은 부산과 적지 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우선 동래고보를 졸업했고, 22세 때 권재순 여사와의 결혼 후 1934년 부산으로 이주, 1년간 한 백화점에서 근무했다. 한국전쟁 땐 부산으로 피란, 경남문총구국대에 편입해 국군 제3사단 소속으로 종군했다.

 교편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에서 잡기 시작해 1952년 함양 안의중학교 때 처음 교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경주 대구 등지를 거쳐 1963년 7월 부산 경남여고 교장으로 부임하며 부산에 정착했다. 이듬해 부산문인협회 회장을 맡았다. 1965년 영도 남여상(현 부산영상예술고)으로 옮긴 뒤 60세 때인 1967년 동구 좌천동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죽기 한 달 전 부산문인협회 회장에 재선됐고, 예총 부산지부장까지 맡았다.

 살아 생전 청마는 교가도 많이 지었다. 통영초등 통영고 통영여고 둔덕중 대구여고와 부산고 동래고 등등. 시비는 국내 시인 중 가장 많다. 만인의 연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부산에도 5개의 시비가 있다. 에덴공원과 동래고의 '깃발', 남여상과 부산진역 앞 수정가로공원의 '바위', 용두산공원의 '그리움' 시비가 바로 그것이다.

동래고 '깃발'

에덴공원 '깃발'



용두산공원 '그리움'

부산영상예술고(옛 남여상) '바위'



■"교장선생님이 아닌 시인으로 대했다"

청마를 교장으로 모신, 그래서 청마를 잊지 못하는 경남여고 35기 동기생들이 강갑회 교감과 함께 모자상 앞에서 청마를 떠올리고 있다. 왼쪽부터 허정임, 백월아, 남용강 씨.

지난 20일 오후 동구 수정동 경남여고 역사관. 머리 희끗희끗한 초로의 여성들이 모처럼 자리를 함께했다. 남용강 백월아 허정임. 올해 65세인 이들은 경남여고 35기 동기생으로, 청마 유치환이 교장으로 부임할 때 3학년이었다. 남 씨는 당시 학생회장이었고, 백 씨는 교장과 평교사로 13년간 모교에 근무했다. '문학소녀'였던 국어교사 출신인 허 씨는 청마를 가장 잘 기억했다. 그들은 "청마로부터 졸업장을 받은 두 기수 중 처음이었다는 사실이 우리 생애에 큰 행운이었다"며 소녀처럼 자랑했다.

 "여름에는 노타이로, 평소에는 베레모 비슷한 모자를 자주 쓰셨던 청마 선생님은 저희에게 '공부하라' 대신 '책을 많이 읽어라'고 늘 말씀하셨어요. 노벨문학상이 발표된 후 열린 어느 조회시간에선 수상자의 시를 낭송한 후 해설까지 해주신 로맨티스트였기도 했어요."

 허 씨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청마를 교장선생님이라기 보다 흠모의 대상으로 여겼다"며 "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으면 교장실을 찾았다"고 기억했다.

 부임한 그해 겨울 청마는 수필집 '나는 고독하지 않다'를 발간했다. 책을 구입한 몇몇 학생이 교장실을 찾아 사인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면서 이후 교장실 앞은 한동안 쉬는 시간이면 길게 줄이 이어지는 진풍경이 일기도 했다.

 청마와 함께 찍은 사진도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이었다. 나무와 꽃을 관찰하며 유난히 교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청마는 학생들과 사진을 찍는 전속 모델이었다. 이날 허 씨와 백 씨는 오랫동안 고이 간직한 빛바랜 흑백 사진을 갖고 왔다. 백 씨는 "경여고 학생이라면 대부분 모자상 등 교내에서 청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갖고 있다"며 "그때 왜 팔짱을 못 끼고 찍었는지 아쉽다"며 활짝 웃었다.

 청마 선생을 두고 당시 조순(시인) 국어선생은 수업시간에 농담으로 이런 말씀을 자주 했다 한다. "저렇게 멋있는 분을 두고 연애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공부만 하는 이 둔한 녀석들아!" 47년이 지난 지금도 청마는 여전히 그들에겐 영원한 노스텔지어였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청마는 말년 객지 생활 10여 년을 빼놓고 대부분을 고향인 통영에서 보냈다. 물론 젊은 시절이었던 일제강점기 때 평양 만주 부산 등을 잠시 전전하기도 했지만 그의 삶의 뼈대는 누가 뭐라해도 통영이었다.

 통영에서 청마의 발자취는 통영중앙우체국에서 가장 많이 묻어난다. 마흔을 바라보던 청마는 아홉 살 연하의 시조시인 정운 이영도(1916~1976)에게 20여 년간 5000여 통의 연서를 보냈는데 5년여 이 우체국을 이용했다. 청마는 잘 나가는 시인 겸 통영여중 교사였으며, 경북 청도가 고향인 문재와 미모를 갖춘 정운은 남편과 사별 후 딸 하나를 둔 과부였다. 통영으로 시집 온 그의 언니집에 머물렀던 것이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계기였다.

청마거리에 위치한 통영중앙우체국.

우체국 앞 우체통 옆엔 '행복' 시가 눈길을 끈다.


우체통 앞에서 보면 '시선집중'이라 적힌 옷집이 보인다.

길 끝나는 곳을 자세히 보면 초록색으로 적힌 '충무교회' 간판이 보인다.


 정운은 처음 수예점을 운영하다 이후 청마가 근무하던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다. 퇴근 후에도 수예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정운을 보기 위해 청마는 수예점이 훤히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 연서를 쓰고 또 썼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는니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우체국 정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복)
 
'파도여 어쩌란 말이냐/파도여 어쩌란 말이냐/님은 뭍 같이 까딱 않는데/파도여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그리움)

 청마 사후 정운은 '탑'이란 시를 통해 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너는 저마치 가고/나는 여기 섰는데/손한번 흔들지 못하고/돌아선 하늘과 땅/애모는 사리로 맺어/푸른 돌로 굳어라'

 지금 청마거리엔 정운도 청마도 없지만 당시 그들이 머물렀던 흔적은 남아 있다. 정운이 운영한 수예점과 그의 언니가 운영하던 약방 '박애당'은 우체국에서 바로 보이는 옷가게 '시선집중'터다.

 또 청마의 집필장인 영산장과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가 운영하던 문화유치원(2000년 폐원)이 있던 충무교회는 우체국에서 세병관 방향으로 불과 50m 거리에 위 치해 있다. 도중 만나는 공영주차장은 두 사람이 가끔씩 찾던 옛 봉래극장 터다. 청마와 정운이 함께 근무한 통영여중은 충무교회에서 서문고개 방향으로 200m쯤 떨어진 붉은색 벽돌건물이다.

청마와 정운이 함께 근무했던 옛 통영여중 건물. 지금은 통영문화원이다.

청마거리 입구.


충무교회 내 옛 문화유치원.

충무교회 내 청마집필장인 영산장.

지금의 충무교회.


 통영시 문화예술과 김순철 문화예술담당은 "통영을 찾은 관광객 중 어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청마거리라고 답한다"고 말해 통영에서의 청마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청마문학관은 청마거리에서 차로 10분 거리. 이곳에서는 청마의 유품과 각종 문헌자료 3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정운이 펴낸 서간시집 '사랑하였으므로…'와 '이영도 평전' 등 정운에 관한 자료와 사진도 보인다.

청마문학관 내부.

청마문학관 외형.

청마문학관 내 청마 흉상.


'멀지 않아 저 또한 당신 곁에 당신 모셔…'

'거제도 둔덕골은/팔대(八代)로 내려 나의 부조(父祖) 살으신 곳/적은 골안 다가 솟은 산방산 비탈 알로/몇 백 두락 조약돌 박토를 지켜…'.

거제시비공원 '바위'

거제시비공원 '낮달'

거제시비공원 내 청마흉상.


거제시비공원 '춘신(春信)'

거제시비공원 '동백꽃'


청마시비공원 시비와 흉상.

청마시비공원


 청마의 묘는 그의 시 '거제도 둔덕골'에서 밝힌 것처럼 선산인 거제 둔덕면 방하리 산방산 지전당골 산록에 위치해 있다. 묘지 입구 너른 터에는 청마 탄생 100주년 때인 지난 2008년 청마의 흉상과 함께 그의 역작 '행복' '깃발' '춘신(春信)' '행복' '바위' '낮달' '울릉도' '동백꽃' 시비가 너른 터를 동그랗게 에워싸고 있다.

 청마의 묘에 서면 남으로 둔덕만과 한산섬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묘를 감싸고 있는 송림 뒤로는 산방산이 솟아 있다. 지관이 아닐지라도 명당임을 짐작할 수 있다. 가까이로는 둔덕면 어귀 방조제 둑과 마을을 연결하는 청마교와 청마 고향시비동산이 보인다.

청마 부부묘. 승학산과 백운공원묘지 때의 묘비도 함께 모셔 놓았다.
청마 부모 합장묘.

청마 부친 유준수는 천주교 신자였다.

청마가 모친에게 바친 사모곡.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청마는 원래 부산 승학산 기슭에 묻힌 후 동아대 하단캠퍼스 확장공사 때인 1981년 경남 양산 백운공원묘지로 이장됐다. 이후 그가 쓴 '멀지 않아 저 또한 당신 곁에 당신 모셔…"라는 '사모곡'의 바람대로 지난 1997년 이곳으로 옮겨 모셔져 있다. "그토록 목숨같은 사랑인데 어찌하겠어요"라고 살아 생전 대범하게 청마와 정운의 관계를 인정한 조강지처 권재순 여사의 묘와 함께. 청마의 부모 묘는 바로 옆에 합장돼 있다. 그 앞에는 청마가 쓴 '사모곡'이 오석에 음각돼 있다.
경남 양산 백운공원묘지를 찾은 청마의 조강지처 권재순 여사와 청마의 벗 박노석 시인.
정운 이영도의 오빠인 시조시인 이호우의 경북 청도 시비를 찾은 문인들. 우측이 청마, 앞줄 가운데가 정운.

 청마 탄생 100주년에 맞춰 개관한 2층 규모의 청마기념관에는 청마의 사진, 지인들과 주고받았던 서신, 교원 발령증 등 250여 점의 자료가 전시돼 있다.

거제청마기념관

거제청마기념관 외형

거제청마기념관 앞 청마시비와 청마.


출생지와 친일 논란…그를 위한 변명
언제부턴가 친일문제와 출생지를 논하지 않고선 청마를 제대로 다룰 수 없게 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취재 도중에도 이를 여실히 느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청마와 관련, 최근 일어난 일련의 사건 결과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어 팩트만을 간략하게 전한다.

 우선 친일 문제. 지난해 11월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홍난파 안익태 박정희 등 4389명을 친일 인물로 발표했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청마와 관련해선 공청회까지 열어 갑론을박 했지만 결국 청마는 친일 논란에서 빠졌다.

 다음은 출생지 문제. 지난 2004년 대법원 민사소송 상고심 재판부는 "청마의 출생지는 거제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사실상 통영의 손을 들어주었다. 청마의 세 딸이 거제 측 원고였으며, 피고는 통영시장이었다. 이와 관련, 남송우 부경대 국문과 교수는 "이 재판에서 원고는 '청마의 출생지가 통영시 태평동'이라고 적힌 통영 청마문학관의 청마 연보를 삭제해달라는 것이었다"며 "출생지 자체에 대한 재판은 아니었으며, 이는 법원에서 판결할 문제가 아니다"고 견해를 밝혔다.

탄생 102주년 청마의 발자취 상편(교장선생님 청마는 당시 여고생들의 '영원한 노스탤지어')을 보시려면 아래 주소를 클릭하세요. 
http://hung.kookje.co.kr/497





- 부산외국어대 사회체육학부 
              김규동 겸임교수(하)


최우석 씨가 볼펜으로 목의 유연성을 테스트하고 있다.
목의 유연성을 늘이기 위해선 손바닥을 반대편 뺨에 댄 채 불편한 쪽으로 약 6초간 당겨주는 스트레칭이 필요하다.<이상 사진4>

어깨 허리 손목 등 아프면 스트레칭으로 회복 가능
매일 10분씩 한 달 정도 지속하면 변한 내모습 발견
"이게 무슨 도움되나" 싶어도 꾸준히 하면 확 달라져

50대 이상 시니어 주말골퍼, 고관절 유연성 점검해야

 몸과 스윙과의 관계를 언급하며 골프에 있어서 몸의 중요성을 강조한 지난번 기사가 보도된 후 한 독자로부터 문의 전화를 받았다. 이 독자는 "이현주 프로처럼 국내 정상급 선수 말고 우리처럼 평범한 아마추어 골퍼들도 스트레칭으로 몸을 만들어 제대로 된 스윙을 할 수 있는지, 또 가능하다면 그 기간은 어느 정도 걸리느냐"고 물었다.

김규동(45) 부산외국어대 사회체육학부 겸임교수는 이에 대해 "우선 몸 상태를 점검받는 것이 중요하며, 증상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매일 10분씩 한 달 정도면 확연히 몸 상태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하모니 더 골프' 연습장(051-703-7274)을 찾아 몸 만들기와 스윙 연습을 병행하고 있는 주말골퍼를 예로 들었다.

만년 '백돌이'가 보기 플레이어로 변신
   
 부산의 한 고교 교사인 최우석(50) 씨. 구력 3년의 최 씨는 한때 병원에서 골프를 치지 말라는 선고를 받았다. 스윙만 하면 어깨 허리 손목 발목 등이 차례로 아파 '움직이는 병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클럽을 놓았지만 마음속은 늘 허전했다.

우연히 알게 된 집 근처의 '하모니 더 골프'를 찾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상담한 후 스윙과 몸 상태를 점검받았다. 김 교수는 "최 선생의 스윙은 교단에 오래 있어선지 목과 어깨가 굳어 몸통의 회전을 이용한 스윙이 아니라 팔의 힘만으로 무조건 세게 치는 타입이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특히 목의 유연성이 부족해 백스윙 때 공을 잘 보지 못해 헤드업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답은 나왔다. 목의 유연성 향상이 과제였다. 목 부위와 관련, 독자들의 자가 진단도 가능하다. 입에 펜을 물고 좌우로 목을 돌려 70~90도 정도 돌아가면 정상이다. 하지만 왼쪽으로 돌릴 때 덜 돌아가거나 불편함이 느껴지면 백스윙에서 공을 잘 보지 못할 것이고, 오른쪽으로 돌릴 때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면 헤드업이 자주 발생한다.

김 교수는 "머리의 힘을 빼고 손바닥을 반대편 뺨에 댄 채 불편한 쪽으로 약 6초간 당겨준다.〈사진4〉 이어 번갈아서 양쪽으로 2~3회 실시하되 불편한 쪽을 더 많이 실시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횟수를 늘리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이어 "막상 해보면 아주 간단해 '이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매일 꾸준히 한 달 정도 반복하면 눈에 띄게 달라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 교사의 몸 만들기 체험담은 아주 재밌다. "골프를 배우러 왔는데 처음엔 매일 스트레칭만 시켜 시간 낭비 같았어요. 어떤 날은 바로 타석에 들어서려고 하자 스트레칭을 하기 전에는 못 들어간다고 막는 거예요. 내 돈 내고 내가 하겠다는데도 말이에요. 결국 제가 두 손을 들었죠. '시키는 대로 해보자'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따랐지요. 한 달쯤 지나니 스트레칭을 열심히 했을 경우 통증이 나타나지 않았어요. 예전엔 연습을 한 달 정도 하면 어깨나 등이 아파 연습을 할 수 없었거든요. 세 달이 지난 지금 덕분에 만년 '백돌이'가 보기 플레이어 수준까지 근접했어요."

치킨윙 현상은 가슴 유연성 부족 때문   

가슴과 어깨를 연결하고 있는 근육의 유연성은 누운 다음 머리 위로 양손을 깍지 낄 경우 정상이라면 양 팔꿈치가 바닥에 닿아야 한다.

가슴 부위를 늘이기 위해선

문을 이용한 스트레칭이 필요하다.


 구력 2년의 직장인 이철호(42) 씨는 앞서의 최 교사보다 증세가 심한 경우. 골프 채널이나 책을 보며 나홀로 공부하며 볼을 친 그는 백스윙 때 오른쪽 어깨가 심하게 목 쪽으로 들리면서 동시에 가슴 쪽으로 움츠러진다. 연습장에서 흔히 목격되는 스윙의 소유자다. 이 스윙은 지적을 받고도 잘 고쳐지지 않는 폼이기도 하다. 이렇다 보니 이 씨는 늘 주변 사람들에게 통증을 호소했다.

김 교수는 "이는 가슴과 어깨를 연결하고 있는 근육의 유연성이 부족해 생기는 현상"이라며 "백스윙 땐 어깨와 가슴이 제대로 돌려지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에 따른 보상작용으로 오른쪽 엉덩이가 뒤로 빠지고, 팔로스로 땐 왼쪽 엉덩이가 심하게 빠진다"고 설명했다.

집에서의 자가 진단 요령은 바로 누운 다음 머리 뒤로 양손을 깍지 낄 경우 정상적인 어깨라면 팔꿈치가 바닥에 그대로 닿는다.〈사진1〉 하지만 오른쪽이 바닥에 닿지 않거나 눌렀을 때 다시 올라오면 백스윙 때 어깨는 움츠러들어가 올라가고 팔꿈치는 닭날개 모양으로 들리게 되는 소위 치킨윙 현상이 생긴다. 반대의 경우에는 팔로스로 때 왼쪽 어깨가 움츠러들거나 올라가면서 동시에 치킨윙 현상으로 왼쪽 팔꿈치가 들리게 된다.

김 교수는 "이런 경우 가슴 부위를 늘여주는 느낌의 스트레칭이 필요하다"며 "예를 들어 문 가운데 서서 팔을 어깨높이로 올려 팔꿈치를 문틀에 고정시킨 후 몸통을 앞으로 쑥 내밀거나〈사진2〉, 벽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 지점에 양팔을 굽혀 고정시킨 후 푸시업을 하는 기분으로 몸통을 역시 앞으로 내밀면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두 달쯤 꾸준히 스트레칭을 했더니 스윙이 좋아진 것은 물론 아프던 어깨마저 호전되어 라운드를 하는 동반자들이 깜짝 놀라더라"고 활짝 웃었다.

50대 이상 시니어 골퍼들을 위한 조언 

50대 이상의 시니어 골퍼들은&#13;&#10;

유연성에 특히 유의해야 한다.


 
오른발을 40도 정도 오른쪽으로 돌리면 몸은 왼쪽으로 돌려야 왼쪽 고관절 스트레칭 효과가 있다.<사진3>

 김 교수는 50대 이상의 시니어 골퍼들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은 대개 ▷피니시 때 왼발 앞 끝이 들리거나 돌아가는 경우가 많고 ▷백스윙 때 허리가 심하게 뒤로 빠지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엉덩이와 다리의 연결 부위인 고관절이 유연하지 못한 때문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진단이다.

혼자서도 점검이 가능하다. 다리를 어깨 넓이만큼 벌린 후 벽에 등을 대고 선다. 이때 등과 엉덩이는 벽에 닿고 허리와 발뒤꿈치는 벽에 닿지 않아야 한다. 여기서 발뒤꿈치는 바닥에 대고 앞 끝을 몸의 안쪽으로 돌려본다. 엉덩이는 벽에 붙이고 어깨도 고정시켜야 한다. 양발 모두 약 40도 정도 돌아가면 고관절은 정상인데 반해 만일 왼발이 적게 돌면 팔로스루와 피니시 때 왼발이 들리거나 돌아가며, 오른발이 잘 안되면 백스윙 때 골반이 오른쪽으로 회전이 원활하지 못해 허리가 뒤로 빠지거나 중심을 잘 잡지 못하게 된다.

고관절 유연성의 스트레칭 방법은 골반 정도의 넓이로 서서 허리에 양손을 올려놓고 늘리고자 하는 쪽의 발 앞 끝을 안쪽으로 돌려 고정시킨다. 스트레칭은 안쪽으로 돌린 방향의 반대쪽으로 골반을 돌려주면 된다.〈사진3〉

평소 피니시 때 왼발이 돌아갔던 기자는 김 교수와 함께 테스트를 해본 결과 역시 왼쪽 고관절의 유연성이 확연히 부족했다. 같은 연령대보다 빨리 고관절이 나빠졌던 것이었다. 해서 스트레칭을 매일 하고 있다. '싱글'을 위해서.



  
 
 

- 강서구 명지동 '배꼽 빠진 고기'


대나뭇살 16개가 들어가는 불판. 담양에서 공급받는데 불판 하나에 900원쯤 들어간다고 한다.


약간 데우면 수액 올라와, 그때 고기 올려야 맛있어
가격 거품 뺀 고기 맛있고, 유기농 싱싱한 야채 꿀맛
6만 원이면 4인 가족 한우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
서낙동강변 걸으며 산 너머로 지는 일몰 장관



 
  
도심에서 하는 가족 외식은 무미건조하다. 차를 타고 쪼르르 갔다가 주차장에서 겨우 몇 걸음 걸은 후 포만감만 안고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식당 음식이 소문보다 별로였다면 기분마저 개운치 못하다.

야채를 담는 식판과 불판이 딱 맞게 들어가도록 테이블을 제작하는 세심함이 돋보인다.

안주인 정성순 씨가 직접 가꾸고 요리한 유기농 야채.


안주인 정성순 씨. 경기도 강화 출신이리 이곳만의 별미 순무도 운 좋으면  맛볼 수 있다.

외형 전경.

서낙동강변 둑길.

이런 점에서 부산 강서구 명지동의 대나무 참숯구이 전문점인 '배꼽 빠진 고기'(051-941-4233)는 고마운 집이다. 녹산수문 인근 서낙동강변에 위치한 이곳은 우선 주변 풍광이 빼어나다. 녹산수문과 순아수문 사이에 위치하고, 바로 옆에는 서낙동강이 흐르고 그 옆으로 둑길이 펼쳐져 있다. 손님이 몰려 기다려야 할 때도 그리 짜증이 나지 않는다. 대기 번호표를 받고 유유히 강둑길을 거닐고 있으면 식당 측에서 연락을 주기 때문이다. 강둑길은 왕복할 경우 3㎞ 안팎이어서 식사 전후 산책길로 안성맞춤이다. 산과 강이 한데 어우러져 펼쳐지는 이 길은 아름답고 포근하다.

  이 강둑길은 계절에 따라 얼굴을 달리한다. 봄에는 주변에 쑥이 많이 자라 단골들은 아예 봉지와 칼을 준비해 오고 있으며 가을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강가의 갈대숲이 추심을 유혹한다.

'배꼽 빠진 고기' 안주인 정성순(51) 씨는 "해 질 녘이면 서낙동강을 온통 붉게 물들이다 산 너머로 지는 붉은 태양의 장관이 너무 아름다워 손님이나 주인 할 것 없이 모두 황홀경에 빠진다"고 말했다.

이름이 재미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배보다 큰 배꼽이란 말이 있잖아요. 한우직판장을 겸하고 있는 저희 집은 그 큰 배꼽을 제거해 가격의 거품을 없앴다는 의미지요."

메뉴판에는 차돌박이 안심 등심 등 각 부위가 조금씩 나오는 한우한마리(600, 900g)가 인기다. 각각 4만9000원, 7만3000원이다. 4인 가족이 한우한마리(600g)를 시키면 남을 정도로 푸짐하다. 부담 없이 한우를 맘껏 먹을 수 있어서일까. 이곳은 평일 저녁 때는 물론 주말이면 줄을 서야 하는 '수고로움'을 겪어야 한다.   
 
이 집만의 자랑거리가 하나 더 있다. 대나무 불판이다. 전남 담양에서 공수한 대나무살 16개가 사용돼 육즙이 오랫동안 남아 있는 데다 고기가 눌어붙지 않고 대나무 고유의 맑고 청정한 향이 배어 한우 특유의 맛이 살아 있다.

정 대표가 알려주는 대나무 불판의 활용법. "대나무살은 데워지면 수액이 생겨 윤기가 돌지요. 이때 적당히 고기를 올리면 돼요. 고기가 거의 다 익었을 땐 밸브를 돌려 숯불을 아래로 내리면, 다시 말해 불조절만 잘하면 종일 불판을 사용할 수 있어요."

밑반찬과 야채는 맛깔스럽다. 돌산갓장아찌, 부추지, 양파오이고추지, 된장박이 고추, 얼갈이 물김치 등은 하나같이 손이 자주 가고, 정 대표가 직접 유기농 재배한 용설채 상추 등과 여러 가지 종류의 고추는 고기 맛을 더해준다. 무한 리필되는 야채와 상차림 비용으로 3000원(13세 미만 1500원)을 내야 한다. 횟집으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초장값인 셈이다.

고기의 맛을 깔끔하게 해주는 천일염과 어린이들을 위한 스테이크용 소스까지 준비하는 배려도 잊지 않고 있다. 한우 각 부위 및 국거리 곰거리도 싸게 판매한다.

참, 이 집 바깥 주인의 동생이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언더핸드 명투수였던, 지금은 마산 용마고 감독인 박동수 선수이다.

이런

자상함과

친절함이


 

배꼽 빠진 국밥.

정육점도 겸하지요.


좌절의 길, 고민의 길, 사명의 길

엄밀히 말하면 이순신의 백의종군로는 크게 세 군데로 나뉜다.
우선 ▷경남 하동에서 권율 도원수부가 위치한 합천 초계(지금의 율곡면)까지는 좌절의 의미가 짙은 순수한 의미의 백의종군로가 되겠고 ▷칠전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초계에서 권율 도원수의 재가를 받아 정세를 살피기 위해 연안답사를 떠나는 길은 고민의 길 ▷연안답사 도중 진주 손경례 집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후 막중한 책임을 갖고 사천을 거쳐 전장으로 떠나는 길이 사명의 길이다. 산청~합천 구간은 갔던 길을 되돌아오기 때문에 중복되는 셈이다.

 
 백의종군로는 경남도와 (사)한국역사문화관광개발원이 고증을 통해 정비 중이지만 아직 미완성이다. 현재 산청 하동 진주 지역의 10㎞ 구간 정도가 도보로 탐방 가능하다. 해서, 현시점에서 백의종군로 답사의 들머리는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으로 불리는 남사마을.

 난중일기에 따르면 하동읍성에서 몸을 추스른 이순신 일행은 하동 옥종면 청수역을 거쳐 남사마을에 도착, 박호원의 집에 묵었다. 전통 한옥 30여 가구와 아름다운 돌담길이 인상적인 남사마을에서 박호원의 집은 걸어서 3분 거리. 조선시대 대사헌과 호조참판을 지낸 박호원의 집 입구엔 그의 재실인 '이사재'를 알리는 안내판과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 행로지'라 새겨진 안내석과 나란히 서 있다. 지금이야 이곳은 남사 고가와 남사천이 내려다보이는 평화스러운 곳이지만 노모를 잃고 왜구에게 짓밟혀 황폐한 들녘을 바라보며 걷던 이순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하늘도 이순신의 마음을 읽었는지 난중일기에는 이곳에 도착한 음력 6월 초하룻날은 비가 구슬프게 내렸다고 한다.

박호원 집에서 본 남사마을과 남사천.

박호원 집.


박호원의 집에서 하동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넘어 4㎞ 정도를 걸으면 하동과 진주의 경계에 인접한 산청의 금만마을에 닿는다. 논길과 밭둑을 번갈아 걷고, 완만한 경사를 오르며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이 구간은 대자연의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어 걷기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금만마을에서 1005번 지방로를 따라 덕천강을 끼고 5㎞ 정도를 걸으면 진주의 가장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수곡면 원계마을 손경례의 집에 닿는다. 이곳은 이순신에게 있어 가장 드라마틱한 역사의 현장이다.

손경례 집 앞마당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 사적비'.

손경례 집.


 잠시 여기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살펴보자. 이 즈음은 원균의 수군이 칠전량에서 대패, 조선 수군의 존립마저 무너진 상태였다. 이로 인해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유린했고, 이 땅은 또다시 아비규환의 공포에 빠졌다. 선조는 그제야 이순신을 다시 찾아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손경례의 집은 이순신이 선조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수임 교지를 받은 장소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백의종군이 끝나는 의미 있는 장소이다. 집 앞마당 한가운데에는 이를 알려주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 사적비'가 서 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이순신은 이후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으니…'로 시작하는 장계를 선조에게 올리며 전의를 다지게 된다.


 이순신은 손경례의 집에서 음력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8일을 머무는 동안 집 앞 '진배미'라 불리는 너른 들판에서 비록 군장을 전혀 갖추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휘하 장병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결국 백의종군로의 여정은 이순신이 들렀던 시기와 일치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경남도에서 현재 일반인을 대상으로 소개하고 있는 백의종군로는 여기까지이다.

 경남도 김종임 관광진흥과 역사문화담당은 "앞으로 백의종군로는 손경례의 집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이순신이 주변 정세를 살피기 위해 오르내린 봉우리인 정개산성을 다녀온 후 덕천강을 가로질러 하동군 옥종면 문암리의 문암정(강정)으로 이을 것이며 이럴 경우 거리상으로는 4㎞ 정도가 더 추가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문암정에서 이순신 장군의 유숙지였던 곤양읍성의 객사 문루였던 사천 응취루(14㎞)와 하동읍성(8㎞) 방향으로 백의종군로가 각각 정비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이러한 계획은 경남도가 이미 도로변 갈림길에 만들어놓은 백의종군로 안내석(아래 사진)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백의종군로는 아직 정비 중이라 나 홀로  걷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방법은 있다. 20명 이상 40명 단체일 경우 다음카페 '백의종군길'(http://cafe.daum.net/wgill)에 신청하면 (사)한국역사문화관광개발원(055-251-4517)이 차량 제공과 해설을 무료로 해준다. 오는 9월 5일에는 선착순 500명을 대상으로 진주 진성중학교에서 집결, 백의종군로 탐방을 실시한다.
 
■ 한산섬 수루 위에서 떠올린 충무공

경남 통영은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은 곳이다. 이 중 한산도는 섬 전체가 충무공의 유적지처럼 여겨지는 성지. 섬 바깥에서는 안쪽이 보이지 않지만 안쪽에선 바깥 해안의 동태를 감시하기 쉽고 배를 숨기기에 용이한 천혜의 요새여서 충무공은 여수에 있던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겨와 3년8개월 동안 머물면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한산대첩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난중일기의 70% 정도가 이곳에서 쓰여졌다.

 흔히 장삼이사들은 "뭐 특별히 볼 게 있나"라고 하겠지만 하은주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꼼꼼히 살펴보면 작은 감동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새 단장도 해놓았다. 지난해 제승당으로 가는 1㎞쯤 되는 해안산책로는 걷기 편한 황톳길로 바뀌었고, 대첩문 입구엔 2명의 수군 조형물도 세워져 있다. 어정쩡한 미색으로 덧칠해놓은 제승당 건물도 전통 단청으로 깔끔하게 해놓았다. 경내에는 제승당 한산정 충무사 수루 등 여러 건물이 있으며 모두 통틀어 제승당으로 불린다.

대첩문 입구의 수군 조형물.

제승당 가는 해안산책로.


제승당 활터.

제승당. 난중일기의 70%가 여기서 쓰여졌다.


수루.

한산도 앞바다 거북선 등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에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끓나니'.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읊조려 보았을 그 유명한 우국충정의 '한산도가'의 배경인 수루(戍樓)에서 바라보는 한산도 앞바다는 410여 년 전 붉은 피로 물든 전장이었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평화롭고 잔잔하다.

 제승당 옆으로 내려서면 조선 수군이 활쏘기를 연마했던 활터가 나온다. 전시에도 특별 무과시험이 치러졌던 곳이다. 사대가 바다 건너 145m 지점에 있다. 실제 해전에서 적선과의 사정거리를 측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전해온다.

 통영에 오면 놓쳐선 안 될 곳이 한 곳 있다. 지난 2008년 문을 연 거북선 문화재 연구소(055-648-7977)이다. 일몰이 아름다운 산양해안도로 입구, 폐교가 돼 버린 산양초등학교 회양분교를 리모델링했다.

거북선 문화재연구소 안광일 소장

김종임 경남도 관광진흥과 역사문화담당 사무관

거북선 문화재 연구소 전경


 한마디로 거북선 복원 작업의 산실이자 거북선에 대한 모든 것을 보고, 만들며 체험하는 곳이다. 체험관에선 안광일 소장과 전문강사의 도움으로 거북선 모형을 만들어볼 수 있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상설문화마당 프로그램' 지원금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무료로 참가할 수 있다. 문의 통영시 관광진흥과(055-650-4532)
 한편 오는 11~15일 통영 일원에선 충무공의 구국정신을 기리는 한산대첩축제가 열린다.

남해서 노량해전 입체영상물 감상

이순신 영상관


돔형 입체영상관 내부


남해대교를 건너 남해읍 방향으로 가다 보면 도로 우측에 노량해전에서 도망가던 적선을 추격하다 적의 총탄을 맞고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국한 충무공을 임시로 모셔놓은 이락사(李落祠)가 있다. 글자 그대로 '이 충무공의 목숨이 떨어진 곳'이다. '관음포 이 충무공 전몰유허'로 불리는 이곳은 그 동안 십중팔구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락사 바로 옆에 거북선 모양의 제법 큰 목조 건물인 '이순신 영상관'이 지난 2008년 개관했기 때문이다. 150억 원을 투입해 최첨단 영상관과 전시관을 꾸며 놓았다.

 138석의 관람석을 갖춘 돔형 입체영상관은 벽면과 지붕 전체가 스크린이어서 기존의 평면 스크린에서의 입체 영상보다 훨씬 더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상영작은 1598년 11월 최후의 전투였던 노량해전의 격전을 보여준다. 러닝타임 20분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어른이 봐도 재밌다. 서울 곳곳에서 대여 문의가 왔지만 경남도와 남해군이 "직접 와서 봐라"고 큰소리를 칠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 이순신 장군이 탄 배의 깃발에 '충무공'이라는 문구가 보인 것이 옥에 티였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이락사 뒤 송림길을 500m쯤 걸으면 바다가 시원하게 열리는 2층 누각인 첨망대가 언덕 끝자락에 서 있다.

 눈앞에 보이는 지금의 관음포 앞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해 치열했던 노량해전의 격전지라는 사실을 실감하기 어렵다.

첨망대에서 본 관암포 앞바다.


이락사 첨망대.

이락사로 안내하는 송림길.


 
충무공의 발자취 좇아 구국의 길을 떠나다(1)편은 여길(http://hung.kookje.co.kr/491)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테마로 통영을 찾았다면 '이순신 밥상'을 받아보는 것이 어떨는지. '이순신 밥상'은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이 즐겨 먹었던 음식을 난중일기와 고문헌 등의 고증을 거쳐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재현한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웰빙 건강식'이다.

 통영에서는 견내량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용남면 '통선재'(統膳齋·055-645-6336)에서 맛볼 수 있다.

 메뉴를 펼쳤다. 크게 통제사 밥상(3만5000원)과 이순신 밥상(1만5000원)이 있으며 일품요리로 통영장국밥(8000원)과 통영골동반(8000원)이 준비돼 있다.

좁쌀죽

통영남새


 통제사 밥상에는 좁쌀죽과 통영남새라 불리는 샐러드에 이어 대구껍질에 다진 꿩고기와 각종 버섯, 산초가루를 넣고 찐 대구껍질 누르미, 숭어를 살짝 쪄 숙주 고사리 미나리 등 각종 야채와 함께 먹는 수어찜, 양파 호박 고추에 집된장을 넣어 맛을 낸 대합구이의 일종인 유곽 등 산해진미가 코스식으로 나온다. 꿩청국장과 연포탕, 메밀과 콩가루로 면을 만들어 사골국물에 말아 먹는 태면까지 하나같이 맛이 있다.
 쌀 식혜 대신 나오는 보리 식혜 또한 별미이다. 4인 이상이어야 하며, 반드시 예약해야 한다.

수어찜

대구껍질 누르미



유곽

갈비찜




꿩청국장


연포탕

볼락구이


태면


 이순신 밥상은 통제상 밥상에 비해 수수하다. 좁쌀죽과 샐러드에 이어 와각탕이라 불리는 조개탕과 해초전, 꿩청국장, 생선구이, 대합구이 등이 나온다. 2인 이상, 역시 예약 필수.

 일품요리 중 하나인 통영장국밥은 덕수 이씨 종가의 내림음식으로 충무공이 즐겨 먹던 음식. 사골국물에 무 고사리 숙주나물 시금치 등 각종 나물을 넣고 끓였으며, 통영골동반은 통영 향토음식으로 새우 오징어 조갯살과 가지 미역 톳 등을 넣고 비빈 통영의 비빔밥으로 이해하면 될 듯싶다.

 김현숙 대표는 "처음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없던 고추 양파 등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럴 경우 맛을 낼 수 없어, 더 솔직히 말하면 손님들의 불평이 잦아 지금은 천연 양념과 함께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조금씩은 사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경남도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마시던 막걸리 조선수군주도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다.

보리식혜

오미자차


그릇에도 거북선이 보인다




(사)한국역사문화관광개발원과 경남도가 함께 주관한 이순신 백의종군로 탐방에 참여한 시민들.


-이순신 백의종군로와 한산도 제승당 그리고 남해 이순신 영상관

 
 전란 중인 정유년 1597년 음력 4월 초하룻날 투옥 중 고문을 견디고 의금부 문을 절뚝거리며 나선 한 초로의 늙은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이순신. 나이는 53세였다.

 한산대첩을 비롯해 출정하는 전투마다 왜군을 초토화한 전직 삼도수군통제사였지만 그는 '명령 불복종'이라는 죄명으로 투옥된 지 28일 만에 경남 합천 권율 장군의 도원수부에서 백의종군할 것을 명받고 풀려난 것이다.

 많은 전공(戰功) 덕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에게는 치욕이었다. 상한 육신과 땅에 떨어진 명예 그리고 좌절감.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옥문을 나서며 다시 쓰기 시작한 난중일기엔 당시 그날의 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 정으로 권하는 여러 지인들의 위로주를 사양할 수 없어 억지로 마시고서 몹시 취해 밤새 땀이 몸을 적셨다."

 백의종군할 합천으로의 길고 긴 고된 여정 중 이순신은 노모의 부고를 접하고 잠시 고향 땅 아산에 들르지만 전시 중인 데다 죄인이라는 이유로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황망히 길을 재촉해야 했다.

 이순신이 걸은 백의종군로를 당시의 것으로 완벽하게 고증할 수 없지만 난중일기나 고문헌 등을 종합해볼 때 한양~수원~천안~공주~논산~여산~전주~남원~구례~하동~산청을 거쳐 지금의 합천 율곡면인 초계 땅에 다다른 것으로 추정된다. 초계에서 40여 일 백의종군하며 머물던 이순신은 원균의 칠천량해전 대패 소식을 듣고 권율 도원수의 재가를 받아 왔던 길인 산청 하동 사천으로 정세를 살펴보기 위해 연안 답사를 나선다. 도중 그는 진주에 이르러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돼 4개월여에 걸친 백의종군에 종지부를 찍는다.

 그의 발길이 스쳐 지나갔던 백의종군로는 410여 년의 긴 세월 탓에 속절없이 변했다. 그러나 그가 잠시 머문 초가나 돌담, 나룻배를 타고 건넜던 강, 후일을 도모하며 형세를 살폈던 산성 등이 걷기 열풍에 힘입어 이순신의 자취를 좇는 역사의 길로 거듭나고 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로가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10곳 중 역사적인 상징성이 높은 역사의 길에 선정됐기 때문이다.
 경남도 관광진흥과 김종임 역사문화담당은 "백의종군로의 경남 구간인 하동~합천 161㎞ 중 우선 산청 단성면에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진주 손경례 집까지 도보로 탐방 가능한 10㎞ 정도를 올 상반기 마무리했으며, 손경례 집에서 하동읍성까지의 나머지 10㎞ 구간은 올 연말까지 고증을 거쳐 끝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 여행은 이순신 장군과 백의종군로를 테마로 잡았다. 백의종군로가 내륙인 데다 지금 휴가철이 절정에 이르고 있는 점을 감안, 세계해전사에 길이 남을 한산대첩 당시의 본영인 통영 한산도와 그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해전이 펼쳐졌던 남해 관음포 앞바다와 이락사(李落祠)도 함께 찾았다.

경남 통영 한산도 제승당의 수루에서 바라본 한산도 앞바다는 평온하기 그지 없다. 410여 년전 누가 이곳이 피로 물든 전장이라 생각하겠는가.

이락사는 이제 남해대교를 건너 잠시 스쳐가는 곳이 아니었다. 바로 옆에는 거북선 모양의 복합미디어 전시관인 '이순신 영상관'이 새로 생겨  노량해전을 주제로 한 입체영상물을 볼 수 있다. 학익진 전법으로 왜군을 수장한 한산도 앞바다에는 요트와 여객선이 평화롭게 푸른 바다를 가르고 있다.

 통영에는 '이순신 밥상'이란 게 있다. 경남도가 이순신 장군과 우리 수군이 먹었던 77가지 음식을 난중일기와 고문헌 등을 통해 복원한 음식이다. 일본 시마네현에 가면 400년 전 사무라이들이 먹던 '타이메시'보다 훨씬 운치가 있다. 음식 또한 경쟁력 있는 관광상품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충무공의 발자취 좇아 구국의 길을 떠나다(2)편은 여길(http://hung.kookje.co.kr/492)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길따라 맛따라
 

-부산진구 부전동 '강화삼계탕'

황기 엄나무 녹두 등 20가지 넣어 개발
해물닭도리탕 닭칼국수 전기구이도 일품


전복삼계탕
닭칼국수
해물닭도리탕
추억의 전기구이


삼계탕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여름철 보양식. 특히 초복날은 통과의례처럼 삼계탕을 한 그릇 해야 제대로 된 하루를 보낸 것처럼 인식될 정도로 이미 장삼이사들의 뇌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단오나 동지, 정월 대보름 등 전통적 의미의 절기들은 바쁜 현대인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져가고 있는 반면 삼복날은 이제 한가위나 설날 못지않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복날이면 유명 삼계탕집 앞에서 밝은 얼굴로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신문에 등장하는 모습이 이를 입증한다.

 허나 복날 삼계탕집을 찾을라치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손이 아주 많이 가는 데다 한여름 반짝 하다가 손님이 줄어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대형 삼계탕집이 주위에 흔치 않은 것이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모처럼 괜찮은 삼계탕집을 발굴해 소개한다. 서면교차로 인근 KT 후문 근처에 위치한 '강화삼계탕'(051-808-3989)이다. 수십 년 전통의 유명 삼계탕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혜성과 같이 나타난 '숨은 삼계탕집'이다.

 모든 음식은 재료만 좋으면 맛은 부수적으로 따라오기 마련. 3년 전 문을 연 이 집이 미식가들을 매료시킨 이유도 바로 그 같은 평범한 진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국어교사 출신인 박경숙(54) 대표의 철저한 사전 준비였다.

안주인 박경숙 대표.


"문을 열기 전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유명 삼계탕집을 찾아 재료와 레시피를 확인했어요. 닭을 공급해주는 대형 도매상인의 소개였지요. 부산에서 식당을 열 계획이었기 때문에 쉽게 허락을 받았지요."

 박 대표의 결론은 재료였다고 했다. "닭의 배 속에 찹쌀과 인삼 밤 대추 은행 등을 채워 넣고 통째로 삶는 삼계탕은 사실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문제는 국물이었어요."
 박 대표는 "350~450g쯤 되는 영계는 삶아 봐야 기름이 거의 안 나온다"며 "진한 육수를 내기 위해 황기 당귀 엄나무 수삼 녹두 등 20가지 재료를 넣고 제맛이 날 때까지 각 재료의 양을 조절해가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고 했다. 한약재 맛이 너무 나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밋밋해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진국 육수는 식혀 묵처럼 보관, 삼계탕(1만1000원)에 적당한 비율로 넣어 맛을 완성했다.

 차츰 입소문을 타면서 지점 문의와 함께 일본에 진출해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의도 들어오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강화삼계탕의 장점은 다양한 메뉴에 있다. 닭칼국수(7000원)는 삼계탕집의 이점을 십분 발휘, 다른 닭칼국수집에 비해 국물이 기가 막히다. 박 대표는 "서울의 그 유명한 '명동칼국수'와 레시피는 같지만 진한 닭육수가 더 들어가는 데다 백화점에 납품되는 최고급 면을 사용하기 때문에 아마도 더 맛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박 대표가 직접 만든 만두와 석이버섯까지 첨가돼 기존의 닭칼국수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해물닭도리탕(중 2만5000원, 대 3만 원)은 박 대표가 적극 추천하는 메뉴. 해물을 좋아하는 부산사람들을 위해 개발한 것으로 특히 젊은 층이 선호한다. 다 먹고 난 다음 면이나 밥을 비벼 먹을 수도 있다.

 '추억의' 전기구이(2마리 1만7000원)도 맛볼 수 있다. 부산에는 없어 서울의 재래시장 주방용품 시장을 샅샅이 뒤져 전기구이 기계를 직접 주문, 제작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덕분에 기름이 쏙 빠진 전기구이의 옛맛을 그대로 재현했다.

직접 담근 인삼주와 수정과도 맛있다. 원액을 사와 제공하는 인삼주와 수정과와는 차원이 다르다.

금산 수삼으로 직접 담근 인삼주.


최근에는 롯데호텔부산에서 숙박하는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입소문을 듣고 많이 찾는단다.

닭똥집. 메인 요리 나오기 전 인삼주의 안주로 제격이다.

직접 담근 오이 양배추 피클도 별미다.


레몬 한 조각 띄운 센스.

바같에서 본 강화삼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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